팀 드 마이어 국제노동기구(ILO) 국제노동기준국 선임정책자문위원이 "비준의 시간이 왔다"며 "지금은 우선 비준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의 '비준과 입법 동시추진'에 반대하며 '선 비준 후 입법'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면서 드 마이어 선임자문관은 "ILO의 187개 회원국 중 146개 국가가 여덟 개의 핵심협약을 모두 비준했다"며 "한국처럼 네 개 이하의 협약을 비준한 국가는 11개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드 마이어 선임자문관은 16일 시민정치포럼과 헌법제33조위원회가 주최하고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팀 드 마이어 ILO 국제노동기준국 선임자문관과의 초청 간담회에서 이 같이 밝혔다.
"한국이 ILO 핵심협약 비준하는 것은 큰 의미"
정부는 이달 초 강제노동금지 협약(29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 협약(98호)에 대한 비준 동의안을 국회에 회부했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과제 중 하나였으나 경영계의 반발 등으로 지지부진했다. 노동계는 이에 대해 "입법이 어려우면 비준을 먼저 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비준과 입법을 동시에 추진한다"며 국회에 공을 넘기고 있는 상황이다.
ILO 핵심협약 논의는 유럽연합(EU)이 지난해 문제제기를 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EU가 문제 삼은 부분은 한국과 EU의 자유무역협정(FTA)에 규정된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을 한국이 게을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과 EU는 각각 전문가 패널을 구성해 협약 비준과 관련된 한국의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이르면 올해 말 결과보고서를 작성할 계획이다. 만약 한국이 FTA 노동 조항을 위반했다고 결론을 내려지면 한국은 EU와의 무역에서 제재를 받을 가능성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드 마이어 선임자문관은 OECD 보고서가 한국의 높은 비정규직의 비율과 저출산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지목한 점을 언급했다. 그는 "관련된 정책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있는 것이 큰 문제"라며 "핵심협약 제87호와 제98호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핵심협약 비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올해는 ILO 창립 100주년"이라면서 "5000만의 인구, 세계 20위권 내의 경제규모, OECD 회원국이면서 민주화를 달성한 한국이 ILO의 핵심협약을 비준하는 것은 큰 의미"라고 덧붙였다.
드 마이어 선임자문관은 "제가 기억하기로 한국에서 ILO 핵심협약의 비준을 약속한 게 1998년, 21년 전"이라며 "지금이 한국정부가 정치적 약속을 제대로 이행해서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적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약속이란 국제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을 말한다"며 "EU의 경우 OECD 회원국들과 거래할 때 상대국의 노동환경을 중요한 기준의 하나로 살펴본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한 EU의 문제제기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그는 한국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협약을 비준할 경우 여러 노동법을 한꺼번에 수정해야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핵심협약을 도입하면 실업자의 결사의 권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파업 대체인력 투입 이런 것들이 다 바뀌어야 한다. 굉장히 어려운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협약을 도입함으로써 노동 문제 해결을 위한 전체적인 시스템이 갖춰진다는 것이다."
그는 ILO 핵심협약과 관련한 일부의 우려를 의식한 듯 "ILO 핵심협약을 입법에 앞서 비준한다고 해서 ILO가 당장 한국을 모니터링 한다거나 한국에 강제적인 조치를 이행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1년 후부터 관리 감독하는 것도 법적인 의무와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 한국이 조금 뒤쳐져있는지 파악하고 그 부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말처럼 ILO 핵심협약은 비준이 된 1년 이후부터 이행의무가 발생한다. 그 후 3년마다 ILO에 정기적인 보고를 하도록 돼 있다.
"핵심협약 비준하지 않으면 불평등과 가난 심화"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고 노동법을 정비하게 되면 기업하기 힘들어진다, 또는 비용이 증가한다는 등의 여론이 있다"는 김영훈 헌법제33조위원회 운영위원장의 질문에도 그는 "항상 듣는 이야기"라며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면 단기적으로 개별기업의 비용은 증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는다면 중장기적 관점에서 불평등과 가난이 심화되면 경제성장의 기반이 약화된다"고 말했다.
이정미 정의당 의원은 "ILO 핵심협약이 비준되고 입법까지 완료된다면 한국의 비정규직, 청년, 여성노동자들도 노조에 가입해 자기 권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며 "사회경제적 약자가 발언권을 얻는다는 점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도약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도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해 제출한 노동법 개정안을 보면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연장한다거나 노조간부 출입 제한, 쟁의시 직장출입 제한 등 ILO 핵심협약의 기본 취지에 배치되는 부분들이 있다"며 "국회 상황이 좋지 않지만 개정 조항들에 관해 국회에서 재논의하고 보완한 뒤 내년 총선 이후 21대 국회 초기에 비준을 완료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기존의 입장을 반복하는 데서 그쳤다. 정부 대표로 참석한 김경윤 고용노동부 국제협력국장은 "국내법 개정과 함께해야 실용성 있어서 동시추진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그런 점에서 저희 정부가 사회적 대화 과정 거쳐서 완성한 내용을 국회가 보완해 채워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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