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22일 정부세종청사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르면 9월 정기국회에 ILO핵심협약 비준동의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사노위 협상이 결렬된 데다 내달 10일부터 열리는 ILO 100주년 기념총회를 앞두고 국제적 압박이 거세지면서 정부가 직접 나선 것이다.
한국은 ILO핵심협약 8개 중 4개만 가입한 상태다. 정부는 미가입 된 4개 협약, 즉 결사의 자유에 관련된 제87호와 98호, 강제노동 금지를 담은 제29호 등 3개 협약부터 비준을 추진키로 했다. 강제노동 철폐 관련 제105호 협약은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비준 추진 대상에서 빠졌다.
노동계 "늦었지만 진일보,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적인 노동 공약이었다. 당초 정부는 노동조합법, 교원노조법, 공무원노조법 등 관련 법개정부터 마친 뒤 핵심 협약을 비준할 계획(선 입법 후 비준)이었으나 경사노위 협상이 최종 결렬되면서 입법과 비준을 동시에 추진하기로 방향을 바꿨다. 이재갑 장관은 "그간 사회적 대화를 통해 양보와 타협을 모색해왔지만, 경사노위 논의가 종료됐다"며 비준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이 장관은 "ILO 핵심협약, 특히 결사의 자유 협약은 산업현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 개정 사항이 수반된다"며 "최소한 법 개정과 비준동의안이 국회에 같이 가서 논의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노동계가 요구하는 '선 비준, 후 입법'에 대해선 "선 비준은 우리나라 헌법체계상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이 장관은 "정부는 올해 정기국회에서 3개 협약에 대한 비준동의안과 관련 법안이 함께 논의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면서 "ILO 핵심협약 비준 추진을 통해 우리 경제가 당면한 통상 문제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자율과 상생의 노사관계로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이 장관은 비준 추진 대상에서 빠진 핵심협약 105호에 대해선 "우리나라 형벌 체계와 분단국가 상황을 고려할 때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제노동 철폐와 관련된 105호는 정치범에 대해 강제노역 금지 등을 규정하고 있어 국가보안법 및 집시법 등과 충돌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비준 추진 방침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환영 입장을 밝혔다. 민주노총은 이날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며 "재벌과 사용자 단체 편에 서서 노동조건을 악화시킬 입법에 골몰하지 말고 2500만 노동자의 최소한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노총도 "ILO 핵심협약 비준 의지를 표명한 것은 늦었지만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며 "다만 정부는 비준동의안 마련 과정에서 그동안 사용자 단체가 주장해온 '파업 중 대체근로 허용'이나 '부당노동행위 처벌조항 삭제' 등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계없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도록 유의해서 비준동의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비준까지 첩첩산중
정부는 비준 동의안이 마련되는대로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그러나 비준 동의권을 가진 국회가 이를 제대로 논의할지는 불투명하다. 노조의 단결권 확대에 강한 거부감을 보여온 재계의 반발이 불가피하다. 특히 해고 노동자의 노조 가입을 인정토록 한 ILO 핵심협약 비준은 현재 법외노조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합법화와 관련된 문제여서 자유한국당 등의 반대가 예상된다.
이에 따라 ILO 핵심협약 비준안과 관련 입법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당초 취지와 동떨어진 결과를 보게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국회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이 논의된다면, 재계 요구를 100% 수용해 발의된 자유한국당 법안과 병합돼 논의될 가능성이 높다"며 "그렇게 되면 노동기본권 보장 취지가 담긴 내용은 남김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오 위원은 "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함께 논의되는 순간, 노동법 개정 없이는 절대로 ILO 협약 비준은 안 된다고 재계와 정당들이 합창을 할 것"이라며 "그로 인해 입법과 ILO 핵심협약 비준 모두 무산되더라도 정부는 그 책임을 국회로 돌리면 그만"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오 위원은 "ILO 핵심협약을 일단 비준하면 비준 후 1년 간 유예기간을 둔 뒤 효력이 발생한다"며 "그 1년 사이에 미비한 법령을 개정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현 정부는 계속해서 '선 비준 후 입법'에 반대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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