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둘러싼 입장 차이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비준 관련, 지난 9개월 동안 협의를 이어가고 있으나 아직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경영계에서는 ILO 핵심협약 비준 전제조건으로 대체근로 허용, 부당노동행위제도 개선, 사업장 내 쟁의행위 금지 등을 요구한다. 손경식 경총 회장이 15일, 주한 EU 대사단 초청 자리에서 제도 개선 없이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면 기업의 부담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노동계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ILO 핵심협약 비준은 조건 없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사노위에서 논의되는 ILO 핵심협약이 9개월 동안 공회전만 도는 이유다.
이런 가운데 16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주최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ILO핵심협약 비준 관련해서 무엇이 문제인지, 해결법은 어떤 게 있는지를 살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현행 법률에서 노동자의 결사 자유를 억압 주체는 국가"
한국 정부는 국제노동기구 152번째 회원국으로 1991년 가입했으나, ILO 핵심협약 총 8개 중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제87호, 제98호), 강제노동 금지(제29호, 제105호) 협약 등 4개는 가입하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한국이 비준하지 않은 ILO 핵심협약 중 가장 논란이 되는 협약은 '노사 단체에 대한 결사의 자유와 노동자의 단결권 보장'을 내용으로 하는 ILO 협약 87호와 '노동자 단체교섭권의 실질적인 보장을 위해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 금지'를 명시한 ILO 협약 98호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윤효원 글로벌 인더스트리 컨설턴트는 협약 87호 관련해서 "여기서 말하는 결사의 자유에서 '주어'는 노동자 단체(노동조합)가 아닌 노동자 단체와 사용자 단체"라며 "결사의 자유는 사용자의 권리이기도 하며, 이는 결사의 자유가 노동자만 특정해 보호하는 사회권이 아니라 사용자에게도 보장되는 기본적인 수준의 자유권, 즉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임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87호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기본적으로 도입돼야하는 협약이라는 이야기다. 1948년에 만들어진 이 협약은 현재 ILO회원국 187개국 중 155개국(82.9%)이, OECD회원국 36개국 중 33개국(91.7%)가 비준한 상태다.
그러면서 윤 컨설턴트는 ILO의 협약 87호는 "비정상적 상황을 정상화하려는 노력의 출발점"이라고 설명했다. 윤 컨설턴트는 "당시 사용자단체 회원과 임원 자격을 규제하는 법령이나 상근자 급여를 규율하는 법령은 따로 없는 반면, 노동자단체(노조)의 회원과 임원 자격을 규제하고 노조 상근자 급여를 억압하는 법령은 존재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며 "이런 현실 자체가 결사의 자유 측면에서 볼 때는 이상한 일"이었다고 87호 협약을 만든 배경을 설명했다.
"문재인 정부, 뒤로 숨었다"
윤 컨설턴트는 87호 협약을 비준하지 않는 문재인 정부도 비판했다. 윤 컨설턴트는 "87호 제정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결사의 자유(87호)는 (전체주의) 국가가 사용자단체와 노동자단체의 결성과 운영, 활동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그렇기에 이들의 (결사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주체는 국가"라고 설명했다.
윤 컨설턴트는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를 노사간 문제로 곡해한 뒤, 노사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 풀라고 주문하고 자신들은 뒤로 숨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윤 컨설턴트는 "한국에서 노동자의 결사 자유와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법과 제도는 대부분 국가나 정부와 관련된 것들"이라며 "현행 법률에서 노동자의 결사 자유를 억압하는 주체는 국가"라고 덧붙였다.
윤 컨설턴트는 "이런 점에서 이 협약이 말하는 결사의 자유를 고민하고 토론하고 연구하며 법안을 마련하고 이행할 주체는 노사가 아니라 국가, 즉 정부"라며 현재 이 협약 관련, 논의 테이블이 정부가 아닌 경사노위인 점을 꼬집었다.
"국회에 입법 기대하는 건 '우물에서 숭늉 찾기'"
윤 컨설턴트는 현재 ILO 협약 관련, 정부에서 취하는 '선 입법, 후 비준' 정책도 비판했다. 윤 컨설턴트는 "자본을 등에 업은 관료들은 '선 입법' 논리로 비준 자체를 무산하려 한다는 신호는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여러 경로로 감지되고 있다"며 "관료와 자본이 가장 우려하는 문제는 비준이 아니라 입법"이라고 지적했다.
윤 컨설턴트는 "사용자들은 체질적으로 자신들 통제 밖에서 노동권을 보장받고 노동자단체가 힘을 키우는 입법을 혐오하기에 ILO 협약을 처음부터 반대했다"며 "그리고 비준이 입법을 촉진하는 압력이 될 수 있기에 '선 입법' 논리를 내세우며 비준을 방해해왔다"고 주장했다.
윤 컨설턴트는 "지금의 국회에서 입법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와 다를 바 없다"며 "더욱 심각한 문제는 비준 투쟁에 앞장서야 할 노동운동까지도 법령이 정비돼야 비준이 가능한 게 아니냐는 자본, 관료의 논리에 빠져 '선 비준' 논리에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윤 컨설턴트는 "우리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 권한과 의회 권한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며 "헌법은 비준 주체가 대통령이며, 비준을 위해 대통령이 심의를 거칠 기관은 국회가 아니라 국무회의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윤 컨설턴트는 "백번 양보해서 현행 국회의 대표성을 인정한다 해도 국회의 동의 여부는 협약을 비준하여 헌법 정신을 구현하려는 대통령의 의지와 행위를 구속하지 못한다"며 "그리고 촛불 이전의 국회가 대통령의 비준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현행 제도에서는 이 문제를 헌법재판소가 다루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ILO 핵심협약, 양보하며 맞바꾸는 게 아니다"
강규현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은 국제노총(ICTU)이 노동권 위반 정도에 따라 6단계로 등급을 나눈 지표에서 한국이 5단계(아무런 권리보장이 없는 유형)에 해당하는 국가로 분류된 점을 지적했다.
강 위원장은 "노동조건에 관한 노사간 입장 대립이 파업으로 이어지고, 이후 노조 간부들이 체포되고 업무방해죄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는다"며 "이런 악순환을 끊고 정치적 민주주의가 노동현장으로까지 확대되기 위해서는 '결사의 자유'와 '강제노동'에 관한 핵심협약 비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강 위원장은 “하지만 한국 정부는 'ILO 핵심협약 비준에 비준 전 법 개정', '법 개정을 위한 사회적 합의' 등을 주장하며 스스로 손발을 묶었다"면서 "ILO 핵심협약은 무엇을 양보하면서 맞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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