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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이름, 백범-이휘소-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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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이름, 백범-이휘소-이종찬..."

고은 시인, 역사의 비극속에서 '큰 혼 찾기'

"그 전쟁은
모르는 사람과도 주고받던 인삿말을 앗아갔다
느린 말씨도
순하디순한 말씨도 앗아갔다
말들이 빨라졌다
말들이 날섰다
가을 썬득썬득한 바람 속
사람들의 해맑은 눈빛들도 앗아갔다
차츰 사람뿐 아니라
소와 말의 눈도 자갈밭 머리에서 충혈되어 사나왔다

대전역전
껌팔이 아이 하나가
다른 아이 하나를 죽도록 패대고 있었다
뺑 둘러서서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바람이 먼지를 일으켜세웠다

누구에게도
고향산천의 정든 얼굴은 없었다"

고은 노시인이 7년만에 펴낸 민족 대서사시 <만인보> 16~20권(창비사 간) 가운데 16권에 실린 시 '타인의 눈' 전문이다. 한국전쟁이 우리를 어떻게 황폐하게, 삭막하게 바꾸었나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글이다.

***"전쟁후 한반도 모든 마을에는 제삿날이 너무 많았다"**

다섯 권 총 7백19편, 4천4백매에 달하는 이 장대한 시작(詩作)은 한국전쟁기를 전후한 시대적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번 작품에는 김일성, 이휘소, 이종찬, 신성모, 조소앙 등 수많은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외에 이름없는 무수한 이들이 전쟁기간에 짐승처럼 취급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역사적 비극이 시인의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

날카로운 시인의 눈은 전쟁이 몰고온 재앙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한반도 사람은 3백년 이래 제사의 자손이고 제사의 종이다
한반도에는 매일매일이 제삿날이다 개인날 흐린날의 밤마다

(중략)

1950년 6월25일 이후
한반도 모든 마을에는 제삿날이 너무 많았다
또한 모든 마을에서는
제삿날조차 모르는 귀신이 많았다
나락 두 가마지 지던
김기석이 8월에 죽고
김기석의 두 아들 10월과 이듬해 1월에 죽었다
제사 지낼 핏줄이 끊어졌다

슬퍼 마라 사람보다 한층 위인 뭇짐승들에게는 도무지 제사 따위 없지 않은가"('제삿날'에서)

***'야만과 희생'**

문학평론가 김병익 교수(인하대)는 서평에서 <만인보>를 '벽화-민족사'로 비유하며 "고은은 <만인보>라는 벽화-민족사를 통해 우리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되새김질하며 그 역사를 만들어오고 혹은 그것에 짓밟힌 만상의 인간들을 사랑하며 껴안고 뺨 비비며 삶의 진의와 세계의 진수를 손가락으로 끄집어내고 있다"며 "나는 여기 그가 그려준 거대한 벽화를 보며 분노와 치욕, 그리고 운명과 사랑이 점철된 그의 '역사'를 듣고 오늘의 삶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의 지적대로 시인은 전쟁이라는 이름아래 자행된 '야만'과 민초들의 '희생'을 시편 곳곳에서 통렬히 고발하고 있다.

"(전략)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었다
또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었다

무슨 장난인가

밤에는 빨치산에게
숨겨둔 양식 지고 가야 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빨치산 토벌대에게
무서운
무서운 고문을 받아야 했다

좌도 저승길
우도 저승길이었다

그런 산골의 하루 막막한 연둣빛이다
토평사람 이말수
일자무식으로
두번 산에 짐 지고 갔다가
토벌대에 잡혀
대전형무소 무기수가 되고 말았다

자주 울었으므로 울 때마다 간수에게 얻어맞았다
꿈속에서나
노고단 및
굶주린 고향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고비 베러
낫 갈아 번뜩이며 가던 날 일었다

이른 아침마다 보안과 기상나팔소리에 꿈을 깨었다"('노고단 밑'에서)

피난길에 미군기 오폭으로 가족이 몰사, 그후 고아생활을 해야 했던 한 민초의 이야기도 가슴을 저리게 한다. 요즘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목격되는 참상의 원조격인 풍광이다.

"(전략)
저녁나절 땔감 구하러 형모 떠났는데
쾅!
하고 폭탄이 떨어졌다 오폭이었다
80여명 온데간데없이 날아갔다

형모 달려와보니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생들도 없었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함께 온
백승복이네 식구도 없어졌다

폭탄 떨어진 웅덩이 일대
팔뚝 하나
구두 한 짝
잘린 목 하나
안경 하나 흩어져 있었다
신음하다가 신음소리 끊은 송장 있다

그뒤로 형모 구멍난 담요 두르고
고아의 길 동서남북 없이 가고 있었다"('양형모'에서)

시인은 미군뿐 아니라, 전쟁기간중 자행된 북한 인민군의 만행도 가감없이 그려내고 있다. 이념에 편향되지 않은 시인의 매서운 균형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공(人共) 3개월 다 지나갔다
면 인민위원회 간부들
도망쳐야 했다
눈에 핏발 뻗쳐
그냥 도망치지 않았다

150명 비행장 야간작업이라고 끌고 가
일제말
관동군 방공호마다 밀어넣었다
생매장이었다
죽창에 찔려
염통이 튀어나온 채
벌거숭이로 강간당한 채
돌멩이로
머리 맞아 죽은 채
아니
산 채로 밀어넣고 흙 덮었다"('이정순의 넋'에서)

***'정치군인' 정일권, '참 군인' 이종찬'**

시인의 <만인보>에는 전쟁기간중 양 극단의 대조적 모습을 보여준 정일권 참모총장과 이종찬 장군의 상반된 모습도 매섭게 기술되고 있다.

전쟁후 최연소 국무총리까지 지내며 승승장구했으나 죽어서까지도 내내 구설수에 올랐던 '정치 군인' 정일권 총장과,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까지도 가장 존경했던 인물로 일관된 '참 군인'의 길을 걸었던 이종찬 장군의 대비를 통해 '역사'의 준엄함을 일깨우려는 의도로 읽힌다.

"(전략)
전선에 정일권 참모총장 나타나면
그날 밤은
춘천에서
홍천에서 색시 실어왔다

각하 객고는 그때그때 다 풀으셔야 합니다

니나노는 똥값이고
마담이나
미스 김은 금값이었다"('여자 몸값'에서)

"(전략)
거기 한 사람이 서 있다

가장 장군다운 장군
가장 인간다운 장군
가장 부패하지 않은 장군
다 맡겨두고 떠나온
맡겨둔 것
언제까지나 그대로인 장군

대한민국 육군의 명예 이종찬이었다

후배들
부하들의 마음속에 있었다
전쟁 당시
산중 사찰 태우지 않았다
태운 사찰
다시 짓는 데 팔 걷고 나섰다

하루 몇마디면 되었다 원 별사람 다 보겠네"('이종찬'에서)

***'큰 혼'을 찾으려는 노력**

시인은 그러나 <만인보>에서 한국전쟁이라는 연대기적 시간 제약에 묶이려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시간 제약을 뛰어넘어 전쟁 과정에 파괴되고 상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본디 '큰 혼'을 찾으려는 노력을 곳곳에서 집요하게 펼치고 있다.

시인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찾은 '큰 혼' 가운데 두명은 백범 김구선생과 이휘소였다. 김구선생을 그린 '돼지고기 세 근'과 한국의 자주국방을 돕다가 의문사한 이휘소 박사를 그린 '이휘소-혹은 벤자민 리'의 전문을 읽으며, 30권으로 예정된 민족대서사시 <만인보>의 나머지 10권이 완간될 때까지만이라도 노시인이 지금처럼 건재하기를 기원할 뿐이다.

***'돼지고기 세 근'**

"1926년
쫓기는 신세에
굶는 신세
장장 기숡 떠도는 임시정부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는
진작부터 생일 따위는 없애버렸습니다
나라 찾는다는 자들이
어찌 제 생일상이나 받아먹겠는가
그렇게 자신을 다그쳤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일을 알아낸 나석주가
제 옷을 저당잡혀
돼지고기 세 근을 사왔습니다
모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 고기로 오랜만에
아침밥상의 궁상을 면했습니다

백범 꾸짖기를
아니됩니다
아니됩니다
독립운동에 생일은 없습니다

나석주는 곧 폭탄 던져
왜놈의 간담을 녹게 하였습니다
몸을 바쳤습니다
영영 생일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휘소-혹은 벤자민 리'**

"1977년
시카고 한인 병원
김완일 원장과
이휘소 교수가
원장실 문 잠그고 단둘이었다

말이 없었다
이교수의 다리에 마취주사를 꽂았다

다리 살을 베어
세로 4센티
가로 10센티의 그 살 속에
50분의 1 축소한 투명용지 서류를 넣고
봉합했다
수술 끝났다

일본 토오꾜오 학술대회 참가 명목으로 미국을 떠났다
5월19일 일본 도착
서울에 전보를 쳤다
5월20일 극비 공항 대기
KAL 항공기가 왔다 김호길 기장이 그를 태우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헬리콥터로 이 교수를 태우고
청와대로 갔다
박정희 대통령과 지하실로 갔다
대기하고 있던 의사가
이교수 다리 수술
피 묻은 투명용지 문서를 꺼냈다

단거리 대전차 로켓
다연발 로켓
장거리 미사일 제조원리 중거리 로켓 문서였다

대통령이 눈물을 글썽였다
고맙소 이박사
천만에요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지하실에 대기중인 의사가
이교수 다리 수술을 마쳤다
그른 토오꾜오로 쥐도 새도 모르게 돌아갔다 학술회의에 참가했다
그리고 미국 시카고로 돌아갔다

페르미 연구소 핵물리학의 권위 이휘소
미국 안보의 요인 이휘소
그가 미합중국 국가기밀문서 반출을 마치고 돌아갔다

1977년 이교수는 80번 프리웨이 노상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FBI CIA 요원이 현장을 포위했다
의문이 많았다 미국이 24시간 감시하는 사람의 죽음이었다

1979년 6월 카터 대통령 한국 방문
인권탄압 중지할 것
긴급조치 해제할 것
핵개발 중단할 것
이 카터의 요구가 거절당했다
1979년 10월 YH사태 부마항쟁에 이어 유신체제 박정희 대통령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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