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가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지금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한국에 '무역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사실상 '경제 전쟁'을 선언한 셈입니다. 현 상황은 매우 엄중합니다. 한일 관계에서 이른바 '1965년 체제'를 전환해야 할 시기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 '1965년 체제'는 비단 한일 관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북아 질서와 한일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965년 체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차분히 되새겨봐야 합니다. 그 시작점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입니다.
김민웅 교수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일협정은 무엇인가'에 관한 글을 문답형으로 정리했습니다. <프레시안>은 김 교수의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 글이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12) “일본의 대한(對韓) 청구권 포기”, 애초에 없던 것을 포기한다? 그러면서 무슨 선심을 쓰는 것 같이 들리네요. 1965년 한일협정에서 정리된 차관을 포함한 5억 달러에 대해서도 그걸로 우리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었지 않느냐라는 논리가 꼭 그런 식인 거 같아요.
일본 정부도 그렇게 우리 내부의 친일세력도 그런 논리를 펴지요. 그 돈 아니었으면 이런 경제발전이 있었겠느냐? 라는 겁니다. 빼앗긴 걸 일부, 그것도 아주 최소의 수준으로 돌려받은 것이고 만일 그런 식으로 빼앗기지 않았다면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발전을 했을 지에 대한 반증이 되기도 하는 거지요.
강도에게 빼앗긴 재산의 일부를 겨우 돌려받았는데 그 강도가 “그걸로 너 이제 좀 살게 되었잖아!” 하면 누가 그 말에 “아,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하겠습니까? 일본으로서는 강도와 비유하는 게 불편할 수 있지만, 1947년 미군정 하의 과도 정부가 설치한 대일배상대책위는 “약탈, 강제동원, 학대 강탈”의 세 분야로 나누어 조사합니다. 강도당한 재산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그 경제적 효과로 보면 일본이 훨씬 더 많은 혜택을 누렸습니다. 일본은 한일협정을 통해 자신의 시장 확대 기반을 확실하게 마련합니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 한국전쟁, 한일협정 이 세 가지는 일본의 경제기반에 대한 역사적 본질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1965년 한일협정을 본격적으로 다룰 때 더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지요.
(12-1) 1947년의 대일배상대책위가 벌써 있었군요. 그게 나중에 1949년의 '대일배상요구조서'의 기반이 된 거겠네요.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되었지요. 미군정 아래의 과도정부는 1947년 2월 행정권 이양을 위해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을 민정장관에 임명해 출발했고 미군정청(美軍政廳)은 이후 6월에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편합니다. 물론 미군정이 전권을 쥐고 있는 체제지만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생겨난 겁니다. 이 남조선 과도정부가 8월에 “대일배상문제대책위원회” 설치를 결정합니다. 이런 움직임이 있게 된 것에는 두 가지 국내외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12-2) 국내외적인 요인이라, 국제적인 요인부터 듣고 싶네요. 1947년이면 미국의 대일정책(對日政策)이 종전(終戰) 직후와는 다르게 변화되는 “역(逆)코스” 적용 시기라는 점에서 짐작이 가는데, 대일배상문제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뭔지 몰라서요. 미국의 냉전체제를 만들기 위해 일본의 경제적 부담을 줄인다, 일본의 국가적 역량을 강화시킨다, 그에 장애가 되는 것은 정리한다, 그 정도는 이제 파악이 되요.
종전 직후와 1947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 역코스에 대한 개념, 국제적 요인, 이런 단어들이 술술 나오는 걸 보니 전체 판이 많이 읽혀지나 봐요. 잘 질문하셨습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종료되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자세는 분명했지요. 일본의 산업능력 박탈이었습니다. 군국주의 체제의 기반이었으니까요. 그 박탈의 과정을 통해 일본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은 나라들의 경제복구에 쓰겠다는 방침이었습니다. 1945년 11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대일배상사절단 단장 폴리(Edwin E. Pauley)를 도쿄에 파견, 조사 후 보고를 받게 됩니다. 대일배상 문제 처리 과정에서 당시 우리 민족이 엄청나게 주시했던 조사단이었습니다.
보고의 내용은 확실했습니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 일본에서 잉여 공업 설비를 제거하고 이 설비를 일본의 침략을 받은 나라들로 옮긴다. 독립된 조선 경제의 부흥에 도움이 되기 위해 배상 청구의 일부로서 조선의 자원과 인민을 착취하기 위해 사용된 일본의 산업 설비를 한국에 이전한다.”
(12-2) 오, 그대로 되었다면 오늘의 일본은 아니었겠군요.
그렇지요. 바로 이 보고서의 연장선에서 미군정은 배상목록 작성을 위해 1946년 특별경제위원회를 만들고, 조선 문제에 관건을 쥐고 있던 도쿄의 맥아더가 지휘하고 있던 “극동위원회”의 움직임에 당시 우리 민족 전체가 주목하게 됩니다. 극동위원회에 참가해서 우리 요구를 알리고자 하기도 했지만 좌절되지요. 그 시기 조선상공회의소는 폴리가 방한했을 때 일본 식민지 지배의 수탈과 파괴에 대한 배상 없이 조선의 경제적 미래는 없다는 호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1947년이 되면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스트라이크(Clifford Stewart Strike)를 단장으로 하는 새로운 대일배상특별조사단이 일본을 방문한 뒤 맥아더에게 폴리 보고서의 권고 내용을 뒤집어 버립니다. “폴리 보고서대로 하면 일본 경제에 중대한 악영향을 미쳐 미국의 일본 점령 비용을 증대시켜 미국의 납세자 부담으로 돌아온다. 극동지역 전체에 대한 이해와도 충돌한다.” 이런 소식이 들리자 남조선 과도정부 구성원들은 다급해졌습니다. 신속하게 배상 목록자료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생겨난 것이지요. 이러면서 “약탈, 강제동원, 학대강탈”의 세 분야가 정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12-3) 미국의 정책 변화에 상당한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네요. 이런 정책변화가 있었으니 나중에 “상쇄론”이니 뭐니 하는 식의 논리가 나온 거네요. 그래도 우리의 독자적인 준비와 대응이 있었다는 게 참 다행스럽네요.
그렇지요? 당시는 아무래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그 역사적 기억도 생생하고 그로 인한 고통의 심각성, 피해 복구의 절박성이 개개인 모두의 실존 문제였기 때문이지요.
배상 목록과 분야를 구체적으로 정리한 당시 실무 책임자이자 훗날 한일교섭 과정에서 청구권 위원회 대표가 되는 조선은행 업무부 차장 출신인 이상덕은 치열한 노력을 했습니다. 기억할 이름입니다. 그는 배상의 입장과 권리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힙니다.
“일본의 장구한 조선 지배가 국제 정의의 기본적 조건인 도의, 공평, 호혜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고 폭력과 착취의 지배이었음은 카이로, 포츠담 선언에 ‘조선인민의 노예상태’를 지적한 바로 충분하다. 원래 한일합병은 조선인민의 자유의사에 반하여 일본으로부터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번 대전(大戰)도 일본이 기도하고 강제로 동원케 되었으나 조선인민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끈기 있게 반항했다. 그러나 대일배상이 있어서의 조선의 요구는 일본을 징벌하기 위한 보복의 부과가 아니고 폭력과 탐욕의 희생이 된 피해 회복을 위한 필연적 의무의 이행이다.”
(12-4) 아, 위엄이 있고 단호한데다가 포용력까지 있는 문장이네요. 1949년 '대일배상요구조서'의 서문과 이어지는 정신이네요. “폭력과 착취의 지배, 강제동원, 그에 대한 끈기 있는 반항, 그러나 이런 역사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징벌적 요구는 아니다, 폭력과 탐욕의 희생이 된 피해 회복을 위한 필연적 의무 이행이다” 와! 박수치고 싶어요, 울컥하구요.
그렇지요? 일본이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역사의 양심 앞에 섰다면 지금의 한일관계도 이런 모양이 아니었을 것이며, 일본 역시 자기를 구하는 길로 걸어왔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조사와 대응에는 피해 민중들의 자발적 요구와 운동이 있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과도정부나 이후 제1공화국 단독의 국가적 차원의 대응에만 주목해서는 안 됩니다. 8월 15일 바로 다음 날인 8월 16일, 당시 조선인들은 식민지 지배. 전쟁 피해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각지에서 공장관리 위원회를 조직해서 일본 경영자가 회사의 물품과 자본을 빼돌리는 걸 막기 위한 투쟁을 벌입니다. 귀환 강제 징용 노동자들도 손해배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특히 전쟁 피해자들의 조직이 생겨나와 대일배상 요구 운동을 벌여나갑니다. 태평양 전쟁에 징병, 징용되었던 청년들이 “태평양동지회”를 구성했고, 사할린 쿠릴 열도 등지에서 비참한 지경을 겪고 있던 동포를 구하기 위한 “화태(樺太)천도(千島) 재류(在留) 동포 구출위원회”,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전국 유가족 동인회”등이 나서서 배상요구를 구체화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위안부 출신 여성들이 생존의 위기에 몰리면서 이미 휴지조각이 된 일본 군대 군표(軍票)를 화폐로 바꿔 달라는 청원까지 합니다. 위안부 문제 최초의 등장이었습니다.
(12-5) 정말 놀랍네요! 그런 움직임들이 있었기 때문에 논의의 기반이 생겨났다는 게 말이지요. 식민지 지배 청산은 과거사의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당장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 제기였네요.
하지만 이 모든 요구는 미군정에 의해 묵살당합니다. 쫓겨나가는 일본인들은 이런 요구를 자신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증오의 복수를 하는 것으로 여겼고, 미군정은 “소요, 협박, 강탈”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식민지 지배의 고통을 겪은 이들의 원통함이 외면당했고, 해방 공간의 아우성은 길을 잃고 맙니다. 이후 한일협정은 이런 역사의 현실을 담아내지 못한 채, 식민지 지배 청산이 냉전체제에 압박된 결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바는 민중 자신의 요구와 운동이 결국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입니다. 2005년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공개도 식민지 지배, 전쟁 피해자의 소송 판결의 결과이며, 일본의 한일회담 일부 문서 공개도 한국에서의 문서공개에 자극받은 일본의 학자들과 시민운동이 노력해 2006년에서 2008년에 이르는 기간 가능해진 것이지요. 강제징용 관련 대법원 판결도 그렇구요.
이 문제는 이제 피해당사자에게만 맡길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나서서 파고들어야 할 임무입니다. 한일(韓日) 시민연대의 힘도 길러가야 하구요.
미국 진보사학의 메카인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동화독법>, <잡설>, <보이지 않는 식민지> 등 다수의 책을 쓰고 번역
했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국제·사회 이슈에 대한 연재를 꾸준히 진행해 온 프레시안 대표 필자 중 하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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