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 <문화/과학> 편집위원이자 생활예술모임 '곳간', 생활 글쓰기 모임 '회복하는 글쓰기' 대표인 젊은 문학평론가 김대성의 두 번째 비평집 <대피소의 문학>(갈무리)이 나왔다. 재난의 시대로 오늘 한국 현실을 진단한 평론가는 한국 문학이 이 시대의 대피소가 돼야 한다는 지론을 여러 글을 통해 독자에게 전한다. 2015년 7월 신경숙 작가의 표절 관련 토론회에서 발표한 '한국 문학의 '주니어 시스템'을 넘어' 등의 글이 담겼다.
이 책을 읽은 유채림 소설가(칼국수·보쌈 전문집 두리반 주인의 남편)가 <프레시안>에 서평을 보냈다. 해당 글을 싣는다. 편집자.
책을 펼친다. <대피소의 문학>이다. 읽는 내내 김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대피소의 문학>을 덮고 나서도 꽤 그랬다. 김과 <대피소의 문학>이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란 말인가.
김은 <한겨례> 신문 정치부 기자 출신이다. 최순실 국정농단을 파헤친 주역 중의 주역이다. 김은 전세살이를 벗어나진 못했으나, 촛불혁명의 불쏘시개였다는 충분한 명예만큼은 얻었다. 그러나 김은 만족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2기 대변인으로 부르자 그는 허파에 바람 들도록 달려갔다. 덕분에 김은 은행장조차 구십 도로 절하는 권력까지 얻었다. 관사가 나왔기에 그동안 살아온 셋집도 뺄 수 있었다. 4억8000만 원의 보증금을 돌려받은 건 덤이다.
김은 충분히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김은 내일을 위해 또 다른 준비가 필요했다. 김은 25억7천만 원에 흑석동 73평짜리 상가주택을 사들였다. 흑석뉴타운 9구역에 있는 상가주택으로 투기성 짙은 매입이었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그건 투기성이 아니라 명백한 투기다, 투기를 잡겠다는 정권이 선봉에서 투기질이냐, 하고 비난했다. 똥 묻은 놈이 겨 묻은 놈 나무란 꼴이지만 제법 그럴싸했다. 김은 해명이랍시고, 기나긴 전세살이에 지쳤다, 평생 살 집을 마련한 거다, 투기는 가당치 않다, 하고 고개를 저었다. 겨 묻은 놈이 73평 상가주택에서 평생 살 거라고 선언했으나 더러운 느낌을 지워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끝내 김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대변인에서 물러났다.
내일을 준비하던 김이 오늘조차 못 채우고 폭삭 망한 꼴이다. 처참하게 추락했다. 그런 김에게도 대피소는 필요한 걸까? 전혀 아니다. 대피소는 개인의 회복이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책을 읽는 내내 추락한 김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걸까?
<대피소의 문학>은 시종일관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고 있다. 그건 왜 하필 대피소인가에 대한 빼어난 설명에서 쉽게 드러난다.
"누구라도 무너지고 쓰러질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절실한 것은 미래나 희망이 아니라 오늘을 지켜줄 수 있는 대피소다. 벌벌 떨리는 몸이 곧 진정되리라는 것에 안심하면서 회복이라는 미래의 시간을 예감하고 예비하게 된다. 그런 대피소의 희미한 불빛은 회복하는 존재들이 서로의 몸을 부대끼고 어울리며 만들어내는 발열에 가깝다."
물론 그 대피소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곳간'처럼 특정한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재웅의 소설 <안내자>나 <어느 날>에 대한 평을 보자.
"이재웅 소설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붕괴한 지반 위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에 대한 메타포라 해도 좋다. 주목해야 할 점은 전 지구적 자본제 체제로 인해 주변부로 내몰린 이들은 단지 특정한 인물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처럼 주변부의 역학을 담지하는 존재란 역설적으로 더는 '혼자'가 아니다."
뿌리가 뽑힌 이들이 부유한다.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부유한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밀려난 상인들이 부유한다. 문 닫힌 조선소 앞에서 갈 곳 없는 노동자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부유한다. 문 닫힌 자동차공장 앞에서 발가벗겨진 노동자들이 애간장을 태우며 부유한다. 역설적이지만 삶의 뿌리가 뽑힌 그 순간,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떠밀려났으나 서로의 몸을 부대끼고 어울리면서 회복이라는 미래의 시간을 예감하고 예비할 것이다.
이는 거대한 힘에 의해 작동돼온 문단도 예외가 아니다. 2015년 6월, 신경숙 표절논란이 전국을 들썩였을 때다. 저자는 접근방식을 달리 함으로써 표절논란에 뛰어든다. 그동안 한국문단의 평론계는 침묵을 강요하고 건강한 논의를 묵살해왔다. 그 같은 구조 안에서 신경숙 사태가 터졌으니 뭐,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놀란 척하는 일군의 무리가 이참에 한국문학의 종말을 고하자고 설레발까지 친다. 저자는 그 일군의 무리에게 단호히 일갈한다.
"침묵을 강요하는 오늘의 구조가 아닌 자생과 '연대'의 생태를 구축할 방안에 대한 논의가 적어도 한국문학의 종말과 죽음 선고보다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서로의 몸을 비벼대고 어울리면서 열을 발산해야 한다. 연대의 힘으로 철벽같은 바리케이드를 밀어내고 전진해야 한다. 열려 있는 곳으로 진격해야 한다. 그게 모든 적폐로 인해 주변부를 배회하거나 떠밀려 난 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다.
선조들은 '천 냥에 집을 사고 만 냥에 이웃을 산다'는 절세의 격언을 남겼다. 한때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김은 내일을 준비한답시고 천 냥에 집을 샀다. 결과는 내일은커녕 오늘 추락하고 말았다. 김이 정녕 내일을 준비하고자 했다면 만 냥에 이웃을 사야 했다. 연대의 힘을 믿고 최순실 사태를 파헤치던 때를 잊지 않았어야 했다. 재개발지역의 73평짜리 상가주택 따위는 살 게 아니었다. 쫓겨난 이들의 통한을 가슴에 새기는 게 먼저였다. 문재인 정부의 덜떨어진 개혁에 촛불의 힘을 믿고 연대의 힘을 믿자고 고언도 서슴지 않았어야 했다. 그게 이웃을 사는 길이고 그게 내일을 준비하는 길이었다.
<대피소의 문학>은 절세의 격언을 오늘의 언어로 재현하고 있다. 내일은 서로가 어울리며 함께 일어서는 데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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