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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독립운동가 59인을 지워버린 박근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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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독립운동가 59인을 지워버린 박근혜 정부

[시베리아 시간여행] 3. 우수리스크 : 고려인의 눈물부터 지워진 독립운동가들까지

라즈돌리노예 역에서 죽음의 강제이주 열차를 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40여 분을 달렸을까. 시골 마을에 덩그러니 놓인 역 앞에 도착했다. 라즈돌리노예 역. 한가로워 보이는 여느 러시아 시골 마을의 역과 같지만, 한인들에겐 아픈 눈물이 새겨 있는 곳이다. 1937년 연해주 일대 17만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가 이곳에서 시작됐다.

1936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고려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일군 터전과 재산을 모두 빼앗긴 채, 화물 열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인 중앙아시아의 반사막지대까지는 6000여 킬로미터. 칼바람이 몰아치는 시베리아의 9월에 고려인들은 간단한 옷가지만 챙긴 채 거의 빈손으로 화물열차를 탔다.

▲라즈돌리노예 역을 둘러보는 조합원들 ⓒ프레시안(박정연)

▲강제 이주되는 고려인의 모습.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회관에 전시된 당시 상황을 묘사한 삽화. ⓒ 고려인문화센터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푹신한 침대칸 위에서라도 3박 4일을 달리면 온몸이 뻐근하다. 재정 러시아 시대부터 유배지로 유명했던 중앙아시아의 벌판을 향해 6000킬로미터를 가려면 30일~40일은 족히 걸린다. 화물 열차에 있는 유일한 편의 시설은 나무판자 뿐이었다. 짐짝처럼 화물열차 안에 쌓여진 고려인들은 그 열악한 곳에서도 자신의 삶을 지켜내야 했다. 언제 서는지 모르는 열차가 멈추기만 하면 사람들은 바지를 내려 볼일을 봤다. 가장 큰 고통은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곳을 향해 달리는 겨울의 그 기차에선 몇 천, 몇 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달리는 열차에서 밖으로 던져진 죽음도 있었고, 열차가 설 때면 가혹한 이동 조건을 견디지 못해 삶을 마감한 가족들의 시신이 정거장 주변에 묻혔다. 삶의 기반을 한 순간에 잃고 그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참담했지만, 영문도 모르는 채 탄 열차에서 가족과 동료가 죽어나가는 광경을 목격한 고려인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강제 이주 과정에서 사망한 고려인이 9000~2만5000여 명에 이른다는 추측만 있을 뿐, 정확한 수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라즈돌로니예 역 플랫폼에 나가니 마침 화물 열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 옆을 지난 저 화물 열차가 그때 고려인들이 탔던 그 열차는 아니겠지만, 당시 화물 열차 안에서 마음은 불안하고 몸은 만신창이가 된 고려인의 심정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라즈돌리노예 역을 지나는 화물 열차 ⓒ프레시안(서어리)

간간이 보이는 러시아 시민들은 동양의 관광객이 왜 시골의 작은 역에 모여있는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러시아어를 할 수 있다면 일상의 평범한 이 공간이 한인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슬픔의 공간임을 말해주고 싶었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1993년 4월 러시아 의회는 무고한 고려인의 희생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하고 고려인 명예회복 법안을 채택했다.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은 연해주로 재이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강제 이주의 출발점이었던 라즈돌로니예역 그 어느 곳에서도 고려인 강제 이주 열차에 관한 표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59인을 지워낸 박근혜 정부

우수리스크를 방문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비슷한 코스로 우수리스크를 다녀갔음을 알 수 있다. 라즈돌로니예 역을 시작으로 고려인 문화센터를 비롯해 독립운동가의 흔적들을 따라간다. 다녀온 이들이 입을 모아 인상깊었다고 한 곳은 고려인 문화센터였다. 의외였다. 일종의 '고려인 박물관' 같은 곳이라고 생각되는 그 곳이 왜 그리 인상깊었을까.

우리 일행 대장인 박흥수 철도기관사 역시 고려인 문화센터를 다섯 차례나 왔을 정도로 이 공간을 애정하고 있었다. 고려인 문화센터로 가는 차 안에서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는 "고려인 문화센터엔 마음을 뜨겁게 하는 사진들이 있었다"고 했다. 한국의 교과서와 언론에서는 볼 수 없는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 빼곡한 공간이 있다고 했다. 그 공간에서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뭉클해지는 경험이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박 기관사는"이제는 그 공간을 볼 수 없어요"라고 초를 쳤다. 왜인지 이유를 물었다. 박 기관사는 "자 이제 도착했으니 들어가서 그 이유를 한번 보시죠"라고 대답을 대신했다.

▲ 고려인 박물관이 리모델링된 2016년 이전에 전시되었던 항일 영웅 59인의 사진과 이름들. 이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박흥수 제공
▲ 고려인 박물관이 리모델링된 2016년 이전에 전시되었던 한인 신문의 민족 계몽과 항일운동의 역사. 이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박흥수 제공
▲ 고려인 박물관이 리모델링된 2016년 이전에 전시되었던 한인사회당의 역사. 이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박흥수 제공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2009년 문을 연 고려인문화센터는 우수리스크 한인들의 거점이었다. 고려인 문화 계승의 역할을 했으니, 고려인의 정신을 담고있는 공간이라 할만 하다. 기대를 품고 고려인 문화센터 전시실에 입장했다.

웬걸. 첫 전시물부터 어이가 없었다. 봉건 제도를 타파하기 위해 연해주로 모인 이들이 정착한 이곳에 양반 자제만 글을 배울 수 있었던 서당을 차릴 리 없을 터인데, 입구의 첫 전시물은 서당을 재현해 놓은 것이었다. 용인의 한국 민속촌과 다를 바 없는 전시물이 러시아 고려인 문화센터에 빼곡했다. 그 옆에는 조선시대의 전통 혼례 복장이 전시됐다.

▲고려인 문화센터 내부에 전시된 전시물. ⓒ프레시안(서어리)
▲고려인 문화센터 내부에 전시된 전시물. ⓒ프레시안(서어리)
▲고려인 문화센터 내부에 전시된 전시물. ⓒ프레시안(서어리)

전시는 후반부에 접어들었으나, 갈수록 태산이었다. 조정래의 <아리랑>이 출판사별, 시기별로 한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리랑 노래 LP판, 악보, 아리랑을 부르는 한국 아이의 영상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이나 음악으로서 아리랑을 폄훼하고자 하는 건 절대 아니다.) 고려인 박물관이어야 할 곳이, '아리랑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가슴이 뜨거워진다던 독립운동가의 얼굴과 사료가 가득한 벽면은 찾을 수 없었다.

▲고려인 문화센터에 전시된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프레시안(서어리)
▲고려인 문화센터에 전시된 아리랑을 부르는 한국인들의 영상 ⓒ프레시안(서어리)
▲고려인 문화센터에 전시된 아리랑 관련 악보 ⓒ프레시안(서어리)
▲고려인 문화센터에 전시된 아리랑 관련 LP판 전시 ⓒ프레시안(서어리)

언제부터 이 곳이 '아리랑 박물관'처럼 변했을까. 그 이유는 2016년 고려인 박물관 리모델링 사업에서 찾을 수 있다. 박근혜 정부 말기 탄핵 열기가 한창이던 그 시기, 고려인 박물관은 정부 지원을 받아 기존 전시물을 싹 갈아엎는 공사를 했다고 한다. 2016년 12월 21일 문화체육관광부 보도자료를 보자.

"연해주는 멀리 발해의 영토였으며 항일 투쟁의 근거지였고 수십만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열차에 오른 곳이며, 현재도 러시아 내에서 가장 많은 수의 고려인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간직한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내 고려인역사관은 2009년 10월 동북아평화연대의 지원으로 개관되어 우수리스크 지역 고려인과 러시아인, 그리고 한국 방문객에게 우리 민족의 강제 이주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전시관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번에 재개관을 통해 기존의 고려인 강제 이주와 이 일대 항일투쟁사를 다룬 구성에서 탈피하여, 한민족의 생활과 아리랑 주제를 보강하고 세련된 디자인을 통해 전면 개편되었다."

이 박물관 재개관의 목적은 "기존의 고려인 강제 이주와 이 일대 항일투쟁사를 다룬 구성에서 탈피"에 있었던 것.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을 지워내고 대신 "한민족의 생활과 아리랑 주제를 보강하고 세련된 디자인을 통해 전면 개편"된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예우를 강화하고 대대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해내는 현재의 움직임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체육관광부는 왜 '항일투쟁사 탈피'를 주창하고,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지워내기를 자행했을까.

고려인 문화센터를 둘러보던 부부 참가자 나영미, 이상래 조합원은 "내가 왜 이곳 러시아까지 와서 아리랑의 판본들을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려인들의 삶과 아리랑이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큰 공간을 가득 메워 아리랑을 전시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정희 조합원도 전시관을 나가며 "이건 아닌 것 같다"라며 "어떻게 여기서 고려인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의 역사를 볼 수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아쉬움을 보였다.

"리모델링이 된 고려인 문화센터를 보며 자괴감이 들었다"

프레시안 : 고려인 문화센터를 총 몇 번 방문했나.

박흥수 : 러시아는 총 9번 다녀왔고, 고려인 문화센터는 리모델링 이전에는 세 번, 리모델링(2016년도) 이후에는 두 번, 총 다섯 번 방문했다.

프레시안 : 이전에 방문했던 고려인 문화센터와 현재의 고려인 문화센터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박흥수 : 고려인 문화센터는 연해주 고려인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보여주는 전시관이었다. 가장 큰 울림을 주는 공간은 독립운동가 59명의 흑백 사진들이 한쪽 벽에 가득 차 있던 곳이었다. 김알렉산드라, 홍범도 등등 한국 역사책에서 볼 수 없거나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분들의 사진이 빼곡했는데, 사람들은 그 앞에 서면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숙연해졌다. 하지만 이제 그 공간은 사라지고 입구부터 '한국의 전통 교육 기관 서당'이라는 전시물이 자리했다. 고려인들은 봉건적 계급 질서를 타파하고 평등한 질서를 꿈꾸고 조선 독립을 위해서 싸워온 삶을 산 사람들이다. 그런데 양반 자제들만 글을 배울 수 있었던 서당이 입구부터 자리한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해외에서 발간한 최초의 한글신문이 연해주 동포들이 만든 해조신문이었다. 그런데 명색이 고려인 문화센터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한자(漢字)로 가득 찬 책이 작은 책상 위에 놓여있다. 설혹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고려인들은 중국말을 배웠거나 그 아류 민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서당 옆에는 한국 전통혼례, 색동저고리 등 한국 민속촌에서 봐도 충분한 것들이 전시됐다. 우수리스크에서도 조선식 전통혼례가 열렸겠지만 그걸 입고 결혼하면 얼어 죽는다. (웃음) 고려인들의 정신을 말도안되게 훼손한 행위다.

리모델링이 된 이후 많은 자괴감이 들었다. 고려인들의 정체성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고민해본 사람들이 과연 고려인 문화센터 리모델링을 주도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전시물 감수를 담당했거나 개관식에 참석했던 분들 중에는 연해주 연구의 대가로 불리는 역사학자들도 있었다. 이런 분들이 바뀐 전시물들을 보고도 문제의식을 못 느꼈다면 그 자체로 한국 인문학 연구의 결핍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를 제기했다가 정부 관련부처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혜택을 포기해야 하는 고민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뜩이나 설자리가 줄어드는 역사연구를 위해 최소한의 양심을 저버리더라도 인문학은 살려야 했을까. 물론 이런 사고 자체가 반 인문학 적인 것이지만.

프레시안 : 이전에 방문했던 고려인 박물관에서 고려인들의 삶을 느낄 수 있었던 전시물은 어떤게 있었는가.

박흥수 : 고려인이 만들었던 잡지인 '레닌기치', '동방 꼼무나', '고려신문' 등이 있었다. 평등한 세상을 염원하고, 조선 독립을 꿈꿨던 고려인들이 당시 어떤 글을 썼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전시물들이 많았다. 리모델링을 주도한 이들은 고려인들의 자료와 흔적들을 치워버렸다. 과거 고려인 문화센터에 가면 가슴이 뜨거워져서 같이 방문한 이들과 함께 몰랐던 역사를 발견하며 부끄러워하고 자랑스러워도 하면서 우수리크스가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지 알 수 있었는데, 바뀌고 난 다음에는 충격과 부끄러움뿐이다.

프레시안 :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있던 공간 한 쪽에는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흥수 : 한국의 어떤 작가보다도 조정래 작가를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한국의 수많은 서점에서 볼 수 있는 조정래의 <아리랑>과 여러 판본의 <아리랑>이 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가득했던 벽면을 대체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인 민중들의 한과 기쁨, 슬픔을 담고있는 노래로서도 아리랑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고려인의 전시관의 아주 중요한 공간을 <아리랑> 판본으로 채우는 것은 블랙코미디 같은 일이다. 전시된 <아리랑>은 꺼내 보기도 어렵다. 고려인들이 도서관에서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아리랑 표지 디자인 변천사를 다루는 건지... 이렇게 성의 없이 책만 채워 놓은 채 전시해 놓은 것은 충격적이다.

프레시안 : 왜 고려인 문화센터를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고려인의 정신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했을까

박흥수 : 유추하기로는 박근혜 정권 말기 탄핵 정국 시기에 리모델링이 이뤄졌는데, 그 정부는 아마도 고려인 문화센터의 전시된 많은 내용들이 불편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공산주의는 금기시되고 오랫동안 콤플렉스로 작용했다. 반공주의적 시각으로 고려인 문화센터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곳이고, 가장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던 곳이었다. 사회주의와 독립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에 정착한 많은 한인들은 사회주의자였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살았던 한인들의 시간에 대해서 현재적 관점에서 다시 조명하고 발견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렇게 편향적으로 전시공간을 훼손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리모델링 과정에서 고려인들의 반발은 없었는가

박흥수 : 안타깝지만 실제 고려인들의 반응까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프레시안 : 이번 해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해인 만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쏟아지는데,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이 살아있었던 고려인 문화센터가 다시 고려인의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박흥수 : 사실 고려인 문화센터의 설립은 정부가 주도한 게 아니다. 연해주의 사람들에 애정과 관심이 있는 사업가들과 지식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민간 주도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정부가 외국에 있는 한국과 관련한 역사적 공간을 적극적으로 보존하고 지원한다면, 그 전시 공간이 갖는 역사적 진실과 특수성,고유의 문화에 맞는 모습으로 전시 공간을 꾸리는 게 정부의 기본적인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연해주를 뜨겁게 달궜던 페치카(난로)와 수이푼 강이 슬픈 이유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한인의 본거지이며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우수리스크 곳곳에 남아있는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우수리스크 블로다로스코고 거리 38번지에 있는 최재형 생가 역시 그 증거 중 하나이다.

러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 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민족 언론 대동공보와 대양보의 사장을 역임한 최재형은, 한인들의 교육을 위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다. 노비 출신으로 연해주에 둥지를 튼 최재형은 어린 시절 러시아어와 문학을 공부해 32세에 지방 정부 산하에서 촌락의 한인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는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자택에 세워진 조형물 ⓒ프레시안(박정연)

최재형은 한인들의 세금만을 관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3000원을 은행에 맡긴 후 그 이자로 일 년에 한 명씩 러시아의 대도시로 한인 유학생을 파견했다. 한명세, 오하묵, 최고려, 김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최 레프 페트로 비치 등이 최재형의 장학생이다. 한인들에게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난로처럼 따뜻한 삶을 선물한 그였기에 고려인들은 그를 '페치카(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뜻)'라고 불렀다.

최재형은 초기 러시아 이주민으로 일 하며 모은 상당한 재산을 독립운동가를 지원하고 양성하는데 썼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도왔고, 안 의사가 붙잡힌 후 변호사를 직접 준비해 주기도 했다. 안 의사의 가족까지 보살폈다. 연해주의 항일 운동가라면 그 누구라도 최재형이라는 '난로' 곁에 서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최재형 생가는 박물관으로 개관하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문을 열자마자 그를 상징하는 난로가 있었고, 그의 곁에 머물렀던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박흥수 대장은 "최재형은 조선의 '양반과 상놈' 질서에 근본적 거부감을 느끼던 사람으로, 그는 그의 공동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했다고 한다"며 "연해주 항일 조선인의 기둥이 되어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최재형 생가에서 남쪽 시 외곽으로 달리면, 오른쪽 시야에서 강줄기가 흐른다. 수이푼 강이다. 이 강을 따라 올라가면 한글이 적혀있는 이상설 유허비가 있다. 이상설은 대한광복군정부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로 우리에겐 헤이그 특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07년 고종이 내린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뜻에 반하고, 국제법(공법)을 따르지 않은 원천 무효"라는 내용의 밀서를 가지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된다.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에 분노한 이상설과 이위종, 이준은 평화회의장 앞에서 한국의 호소문을 배포하며 조선 말 최초의 1인 시위를 펼쳐 일본의 침략 행위를 세계에 알린다.

▲수이푼 강가 옆에 위치한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 ⓒ프레시안(박정연)
▲이상설의 유해가 뿌려진 수이푼 강 ⓒ프레시안(박정연)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헤이그 특사에 대한 일제의 궐석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라며 남은 생을 조선 독립을 위해 바쳤다. 하지만 결국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조국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겠는가.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의 유언에 따라 그의 동지들은 유해를 거두어 수이푼 강에 뿌렸다. <프레시안> 조합원들은 흐르는 수이푼 강을 보며, '슬픈강'이라고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상설 유허비에서 한적한 시골 마을을 지나 달리다 보니 광활한 들판이 나왔다. 발해성터의 유물이 발굴된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점프샷'을 찍기 위해 오래 걸어 아픈 무릎을 쥐고 여러 번의 점프를 했다. 결국 성공적인 점프샷을 얻어내고 이날의 일정을 마쳤다.(계속)

▲발해성터에서 '점프샷'! ⓒ박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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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연 기자
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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