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권력과 재벌의 '포괄적 계약'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권력과 재벌의 '포괄적 계약'

<손광식의 '1997 비망록> (2) 원죄

***2. 원죄**

한보사태는 경제적 사건임에도 사회적 반응은 부정부패에 대한 격렬한 비판으로 증폭되었다. 정치권력은 예의 문법대로 '희생양들'을 사회적 단두대에 내세우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더 큰 실체를 감추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스스로 부패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제일은행의 신광식, 조흥은행의 우찬목 행장등이 검찰에 구속되었다. 그러나'외압'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실체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적어도 이렇게 예단에 가깝게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상징적 사건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수서 사건'이 터졌을 때 정태수 한보회장이 구속되었다. 이때 경제적 관심의 표적은 과연 은행들이 한보에 대한 지원을 계속할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재경원과 은행감독원은 한보의 금융운용 실태와 계획을 보고하라고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에 독촉했다. 사실 그때까지 한보의 금융지원에 대해서 금융계에는 '말을 갈아 탔다'는 설이 유력했다. 정권변동과 재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한 말이다. 한보가 YS라는 새 권력으로 말을 옮겨 탔다는 얘기이다.

어떻든 전직 노 대통령시절 권력 비호하에 수서사건을 일으켰던 만큼 노씨의 비자금 사건은 구권력의 치죄의 수단으로는 안성맞춤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금융계는 한보와 정태수씨에 대해서 위험성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달랐다. 당시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의 이철수행장은 밀실에서 어딘가 전화를 주고 받은 후 기자회견을 자청, "한보에 대한 금융지원은 계속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것은 상식적인 기준에서 볼 때 은행장으로서는 보통 이상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모든 금융기관은 그 말을 신호로 했는지 여신창구를 활짝 넓혔었다.

제1호로 구속된 이철수행장이 검찰청 안에서 한보를 지원하라고 했던'몸통'에 전화를 걸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소박한 추리는 정말 순진하다. 세론이 요구하는 대로 그 '외압'의 실체를 이행장이 불어버리면 진실은 밝혀질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권력세계의 문법에서 그런 자백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며 만에 하나 '고해성사'라도 기대할 수 없다.

이 경우 피의자의 고지와 불고지의 경계선은 권력 세계에서는 그의 정치감각 수준으로 평가되며 심지어 그릇의 크기로 저울질되기도 한다. 그는 불고지함으로써 사회적 생명력을 다시 연명할 수 있지만 권력핵심을 불고 난 다음에는 버려진 몸이 될 수밖에 없다. 혹여 진실을 폭로하는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권력의 핵심을 방호하는 연계철선이 곳곳에 비상선을 치게 마련이다. 여기서 법과 권력의 미묘한 관계가 드러난다.

하나의 실례를 들어보자. 전 상공장관 안병화의 케이스이다. 그는 업계로부터 5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안씨로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상당 부분은 정치자금이고 또 뒷탈을 생각하여 통장으로 입출금했으므로 잔액이 공개적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검찰에서 그는 돈을 받은 것을 시인했다. 그리고 이어 정치자금에 대한 진술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 다음 진술은 수사관에 의해 제지당했다. 수뢰행위만으로 범죄구성 요소를 끊어버린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단순한 정치자금의 중간 이동과정이라고 보았다면 무죄일 수밖에 없다. 권력의 목적은 장관 하나를 구속함으로서 사건을 '수습'하는 데 있었다.

한보사태는 구정을 지나는 동안에 YS의 가신 신한국당 의원 홍인길과 DJ의 총신인 국민회의 의원 권노갑이 '배후 압력 세력'의 당사자로 부각되더니 급기야는 '한보리스트'라는 것이 등장, 수십명의 금전수수 관련자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드디어 핵심권력을 숨기려는 시나리오가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일까. 홍인길은 자신에게 7억원(나중에 10억원으로 밝혀짐)의 돈이 전달되었다는 보도가 일제히 터지던 날 "나는 깃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의 '깃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는 무엇을 체험하고 어떤 세계를 목격한 것인가.

그가 '깃털'이라면 장학로는 어느 수준인가 하는 의문점이 떠오른다. 장이 홍보다 낮았던 위치라면 '솜털'수준일진대 장이 받은 검은 돈은 27억원, 그것도 검찰이 밝힌 공식 액수로만 그렇다면 '깃털'의 그것은 진짜 얼마가 되며 한층 더 올라간 '몸통'은 또 어느 수준인가.

아마도 한보 정태수의 신권력 체제로의 '랜딩 피'(시장 상륙에 드는 돈)'는 엄청났을 것이며 그 돈들이 빨려 들어간 공간도 정계, 관계, 언론계를 포함한 범권력 지대였을 것이다. 한보와 정태수는 이미 기존 권력과 밀착되어 있었고(수서사건) 철강산업 진출에 완강한 저항을 국내외 재계로부터 받아왔으니 천문학적 숫자의 '랜딩 피'를 물었을 것이란 추측은 이미 추측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 기업의 '랜딩 피'는 2중적이라 할수 있다. 기업과 상품이 시장에 착륙하여 자기 영역을 구축하기까지 물어야 하는 '경제적 비용'과, 정치 사회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물어야 하는 '경제외적 비용'이 있다. 물론 크기는 다르지만 두 번째 '랜딩 피'는 선진국에도 존재한다고 볼수 있는데, 문제는 우리 기업의 경우 그 '랜딩 피' 자체가 기업생존을 흔들만큼 규모가 크고 폭이 넓고 감시체제가 불완전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왜곡된 구조는 뿌리가 깊다. 정치권력이 산업세력을 깔고 앉아 왔기 때문이다.

1961년 육군소장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장악에 성공하자마자 재벌총수를 일제히 소환했다. 군사정권이 내세운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하자면 기업인들의 참여가 필요했고 특히 당시로서는 대단위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었던 각종 제조공장을 세우려면 재벌급을 앞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부터가 정치권력이 기업을 올라타기 시작하는 효시라 할 수 있다.

한보사태에 접하여 새삼스럽게 30여년 전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이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해야 그 해법이 가능하다는 관점에서이다. 당시 쿠데타정권은 정치적으로는 무능했던 장면정권을 대체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은 뒤 "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는 명분을 알리고 있었지만 경제재건에 목적성이 보다 뚜렸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이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김종필이 만든 중앙정보부라는 막강한 정치공작본부가 존재하여 각본을 잘 짜고 연출을 그럴싸하게 꾸며갔다는 데 있다고 보기보다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경제적 구호에 있었다.

사실 자유당정권을 이어받은 민주당정권은 신익희-조병옥으로 이어지는 대통령선거에서 민심과 투표의 향방을 가늠한 바 있었다. 자유당정권은 4.19에 의해 무너졌지만 이보다 앞서 민주당이 한강 모래밭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유권자를 향해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소리높였을 때 이미 정치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쿠데타정권이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갈아보았자 별수 없는' 정치세력 대신, 새 정권은 이제는 우리도 잘살아보자는 그야말로 '실사구시'의 표본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도쿄에 머무르고 있던 삼성재벌의 이병철을 비롯하여 박흥식(화신) 서갑호(삼호) 구인회(락희)등 손꼽히던 기업인들을 모두 충무로의 한 건물로 소환했다. 명분은 새 정권과의 협력관계라고 했지만 물리력이 수반된 '불평등 협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 재계 총수들은 이른바 혁명정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낙인 찍혀 있었다.

정확한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이들에게 공장을 지으라는 명령은 특공대 영화에서 죄수들을 감옥에서 차출하여 요새를 습격하게 하고 그 대가로 면죄부를 주는 것과 똑같다고나 할까. 이때부터 재벌에게는 원죄의 너울이 씌워졌으며 그 너울은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도 사회인식에, 가치판단 기준에, 나아가서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와 기업을 놓고 벌어지는 이데올로기 논쟁에, 흑백을 가름하는 기준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두고 자업자득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재벌이 의미하는 인적 요소외에 다른 한 면은 기업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기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아직도 완강한 현실에서 정치권력은 교묘히 그것을 알게 모르게 이용해 왔고 이용해 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와 그의 정치세력들이 긍정적 슬로건('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으로 민심을 잡으려 했던 데는 상당한 진실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들이 '경세제민'이라는 치자(治者)의 원리를 알았든 몰랐든, 자유당정권하에서 국민은 너무도 배고프고 못살았던 것이다.

사회주의 노선은 아니었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신정권의 패러다임은 시장은 있되 시장경제로 운영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물론 배경이 있었다. 신권력 장악세력이 군부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애국심이 깊은 만큼 국가주의자들이다. 어디까지나 국가가 먼저이고 시장은 나중이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시장에서도 국가가 먼저인 나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라 할 수 없다. 인권문제에서도 그랬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도 국가가 앞장서 끌고 나가고 그 뒤에 시장이라는 것이 있다고 굳게 믿어왔다.

거기다가 미국과의 관계가 있었다. 군사권력이 그 성격이야 어떻든 소박하게 말해서 미국편인 것은 분명했다. 아니 그것이 분명하지 않은 이상 반도의 남쪽에서 권력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미국은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국제적 금융협력이나 차관제공 등에 별로였다. 박정부가 통화개혁을 단행한 배경에는 이런 자본조달의 문제가 걸려있었다.

그런데 이때 또 하나의 사태가 전개되었다. 통화개혁이 미국에 사전통보없이 진행됨으로써 워싱턴이 다시한번 더 등을 돌린 것이다. 당시 버거 대사는 박정희 정부의 비협조를 이유로 미군철수 등 압력카드를 행사했다. 군부세력들이 이런 상황에서 발상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실천할 의사까지 있었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쿠데타 세력들이 생각한 것은 '모스크바 행'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권력과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더듬어 볼 수 있다. 미국이 자본을 안 대주면 소련 쪽으로 가겠다는 와일드 카드는 결국 머릿속에만 존재하고 끝났지만, 그 바탕에 흘렀던 소셜리즘(사회주의)적 기류를 우리는 충분히 읽어낼 수가 있다.

결국 권력과 재벌은 선수와 프로모터와 같은 '포괄계약'을 맺게 되고 그 계약은 양 당사자들의 편의에 의해 만료시한이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권력이 시장보다 우위에 있고 그 상관관계를 정당화하는 '국가주의'가 펄펄하게 살아 있는 틀은 아직도 변함이 없으니 이상하지도 않은 일이다.

우리는 세계 챔피언이 된 선수들이 가끔 프로모터에게 저항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대부분이 금전문제다. 선수쪽은 죽을 힘을 다내고 노력을 해서 '달러박스'가 되었는데 돈을 챙겨가는 것은 '중국사람'이란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고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모터 쪽 입장은 다르다. '너를 키워 준 것이 누구냐?'다. 경기판도 마련해 주었고 대중인기를 위해 투자도 했으며 출세길을 골라준 그 은공도 모르고 까분다는 생각이다. 세기적 철권 타이슨과 프로모터 돈 킹과의 사이에 벌어졌던 싸움도 그 한 예이다.

결국 그 싸움은 어떻게 되었는가. 권력과 재벌의 '포괄적 계약'이 끝나고 정권은 정권, 재벌은 재벌로 독립하지 못하는 원인을 찾아낼 수도 있을 듯하다.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근대성'은 이런 권력과 재벌기업의 상관관계에서도 발견되는 대목이다. <계속>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