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월드컵 탈락쇼크가 정도를 넘어서 '광분'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는 형상이다.
이탈리아는 한국-이탈리아전에서 골든골을 넣은 안정환 선수를 이탈리아 리그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했다.
독일 일간 빌트지의 19일(현지시간)자 보도에 따르면, 안정환이 소속돼 있는 이탈리아 프로축구리그 세리에A 페루자의 구단주인 루치아노 가우치는 안정환에 대해 "이탈리아팀을 쫓아낸 자를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페루자의 세르세 코스미 감독도 "안정환보다는 팝비오 개티(페루자의 스트라이커)와 플레이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달말 계약이 만료되는 안정환은 더이상 페루자, 더 나아가 이탈리아에서는 선수생활을 하기 힘들 전망이다.
물론 이탈리아의 이같은 방출 결정은 안정환 선수에게 조금도 위협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 빼어난 기량을 선보인 안정환 선수를 스카웃하고자 하는 발빠른 움직임이 유럽 곳곳의 프로구단들 사이에서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40년대 무솔리니 파시즘 시대를 연상케 하는 광분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방출 결정은 우리 국민들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하다.
"이탈리아가 이렇게 속 좁은 나라였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들의 방출 결정은 비이성적이고 몰지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탈리아인들이 현재 빠져있을 '공황적 심리' 상태를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이탈리아는 프랑스,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등 유력 우승후보국들이 줄줄이 탈락하자 내심 우승을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한국 쯤이야..."라는 게 그들의 솔직한 심리 상태였다.
그러다가 다 이겼다고 생각한 게임을 후반 43분에 동점골을 먹은 데다가 연장 후반 11분에 역전골까지 먹고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더욱이 역전골을 넣은 안정환이 자국의 일개 프로구단 페루자의 '임대선수'에 불과한 선수였으니... 얼마나 그들의 복장이 뒤집혔겠는가를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방출 결정은 '심리적 광분'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조금 심한 표현을 쓴다면, 무솔리니가 지배하던 1930~40년대의 '파시스트 국가' 이탈리아를 연상케 하는 광분 상태다.
***어처구니 없는 이탈리아의 '1966 AGAIN' 시비걸기**
이탈리아는 안정환 방출 결정에 앞서서도 '납득 못할 대목'을 문제삼으며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해, 국제사회의 비아냥을 자초하기도 했다.
이탈리아가 패배 직후 문제삼고 나온 '불공정 게임'의 한 증거가 다름아닌 붉은악마의 '1966 AGAIN' 카드섹션이다.
데일리 사커 다이제스트(Daily Soccer Digest)의 19일자 보도를 보자.
"(시합에 지자) 이탈리아 전역이 분노에 휩싸였다. 아주리도 여기에 호응했다. 모든 발단은 6월17일 한국 서포터(붉은악마)가 스타디움에 걸어놓은 한장의 플래카드였다.
'1966 AGAIN'
바로 36년전 영국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 아주리는 역사에 남는 큰 실수를 범했다. 무명의 아마츄어집단인 북한에게 0-1로 패배한 것이다. 이 패전으로 인해 그들은 그룹 리그에서 탈락해야 했다. 실의에 차 귀국하는 아주리를 맞이한 것은 분노한 국민들이 집어던진 썩은 달걀과 토마토 세례였다.
그후 아주리에게 있어서도, 이탈리아 국민에게 있어서도 '66년'은 잊고 싶은 악몽이었다. 그 악몽을 한국이 일깨운 것이다. 남북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같은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의 행위에 이탈리아 감독 지오반니 트라파토니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월드컵은 단지 한국에서 개최되는 것일뿐 그들(한국)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말기를 바란다. (한국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허용돼서는 안된다."
또 이탈리아 스포츠의 최고기구인 올림픽위원회의 페트루치 회장도 이같은 한국의 행위를 "FIFA가 내건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반되는 것"이라며 정식으로 항의문을 제출했다."
이같은 이탈리아의 문제제기는 한마디로 어처구니 없는 트집잡기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응원은 '심리전'이다. 자국 선수들에게는 기를 불어넣어주고, 상대방 선수들은 위축시키고 날카롭게 만드는 것이 응원의 당연한 심리학이다. 이탈리아도 자국에서 개최된 월드컵때 자국선수들에게 얼마나 열정적인 응원을 보냈던가.
"1966년의 기적을 재연하자"는 붉은악마들의 재치 넘치는 캐치프레이즈를 문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축구의 기본상식'조차 결여된 현 이탈리아의 수준을 드러내줄 뿐이다.
FIFA는 이탈리아의 항의를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없도록 신경쓰겠다"고 일축했다. '당신들은 탈락했으니 짐을 싸 집으로 돌아가라'는 식의 냉소적 대응이었다.
***선동의 전선에 앞장서고 있는 이탈리아 언론과 정치인**
이처럼 지금 이탈리아는 전국토가 '광분' 상태에 빠져있다.
이같은 광분의 선봉에 서 있는 것이 이탈리아 언론과 정치인들이다.
이탈리아 일간지 '라 스탐파'는 19일 안정환 방출 소식을 다루며 이같은 결정의 몰지각성을 비판하기는커녕 안정환에 대한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는 저급한 분풀이식 혹평으로 일관했다. 이 신문은 "분노가 지배하는 순간이라서도 아니고 탈락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어서도 아니다"며 "부질없는 행동으로 우리를 집으로 보낸 그는 내일부터 팀을 잃을 것"이라고 감정적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 신문은 또한 페루자 코스미 감독의 "우리에게는 관심도 없는 형태의 축구를 하도록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이 좋겠다. 나에게는 도움이 안된다. 차라리 고양이 경기장이나 한국 축구 신화의 상징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 우리 팀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는 감정적 발언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신문은 이어 안정환이 "2년이 지나도 이탈리아어를 배우지 못했으며 이탈리아인들이 스파게티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어 했다"며 "감독은 모든 선수들에게 경기 전에 칼로리가 많은 스파게티를 먹게 했으나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아 한바탕 설전을 벌여야 했다. 그는 동양식 생활방식을 끊지 못했으며 밀라노까지 가서 한국식품을 구입했다"는 저급한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라 레푸블리카' '일 메사제로' '일 템포' '라 나치오네' '코리에 델라 세라' 같은 이탈리아 언론들도 "주심과 부심이 살인청부업자처럼 이용된 더러운 월드컵에서 이탈리아가 쫓겨났다" "나를 말리지 않았다면 심판을 팼을 것이다(디 리비오 선수 발언)" 등의 선동적 보도로 일관했다.
정치인들도 선동의 전선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카를로 아제글리오 치암피 대통령은 이탈리아가 "이긴 경기(deserved to win)"라고 선언했다. 그는 "나는 우리 팀의 투지와 조직과 페어플레이를 보았다. 그들은 이탈리아 축구의 전통을 빛냈다"고 말했다.
프랑코 프래티니 행정부 장관은 "이번 주심은 수치이며 완벽한 스캔들"이라며 "내 평생 이런 경기를 보기는 처음이다. 그들은 마치 테이블에 모여 앉아 우리를 몰아내기로 모의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말해 언론과 정치권력의 철저한 반한(反韓) 연합전선 구축이다.
***정언유착을 통치수단으로 삼고 있는 '유럽의 부시' 베를루스코니 정권**
이탈리아의 이같은 광란을 접하다 보면, 어이없다는 감정에 앞서 도대체 '저 나라는 왜 저러나'라는 의문이 절로 든다. '비판'과 '비난'의 차이조차 구분 못하는 집단최면적 광란상이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의문은 현재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언론간의 유착 관계, 즉 '정언(政言) 메커니즘'이 어떤 것인가를 알면 상당부분 이해가 간다.
이탈리아는 지금 '신 파시즘' 국면에 진입한 상태다. 이같은 신 파시즘을 주도하는 인물이 다름아닌 베를루스코니 총리이다.
지난해 5월 총리로 컴백한 베를루스코니는 다른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미국 부시대통령의 기후협약 탈퇴,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을 절대적으로 옹호하고 9.11사태직후에는 이슬람의 후진성을 주장함으로써 '유럽의 부시'라 불리는 극우인사다. 그는 동시에 이탈리아의 최대 미디어재벌이자 스포츠재벌로, 교묘한 여론조작을 통해 이탈리아 국민들을 신 파시즘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문제의 인물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2002년 2월호)는 '전통의 이탈리아에 신 파시즘 등장'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의 집권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980년대 이후 이탈리아 정계는 급속도로 부패해갔다. 1992년 '깨끗한 손'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에 의해 정경유착의 부패고리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총리를 역임한 사회당 당수 베티노 크락시가 불법적인 재산축적으로 기소되었다. 역시 총리를 지낸 기민당 당수 줄리오 안드레오티도 마피아와의 결탁 및 살인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후 몇개월 사이에 1천명에 달하는 정관계 인사들이 부패혐의로 조사받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쿠데타를 우려할 정도의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쿠데타 대신 이탈리아 국민들은 베를루스코니가 지배하던 TV에 의해 집단 최면상태에 빠졌다. 1994년 5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총리로 뽑았던 이탈리아 국민들은 다시 2001년 5월 총리로 재기시켰다.
그 배경은 무엇인가.
첫번째는 그의 거대한 재산이다. 그는 세계화가 어떤 것인지 그 진실의 일단을 보여주는 상징조작의 힘을 과시한다. 경제력과 매체력을 가지면 거의 자동적으로 정치권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베를루스코니는 바로 경제력과 매체력을 가지고 정치권력까지 얻은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의 재산은 1백20억달러(약 15조6천억원)로 포브스지에 세계 14위의 거부로 올라 있다.
밀라노 출신인 베를루스코니는 종업원 4만명의 미디어 제국 '핀인베스트'의 사실상 소유주다. 부동산 사업으로 시작한 그는 현재 이탈리아의 채널 5, 텔레친코 등 3개 민영TV와 최대 판매부수를 가진 잡지 파노라마, 일간지 일 지오르날레, 이탈리아 최대 출판사 몬다도리, 인터넷미디어그룹 '뉴미디어, 영화제작·배급사 '메두사', 이탈리아 최대의 슈퍼마켓체인, 금융 서비스 회사, 명문 프로축구팀 AC 밀란 등을 거느리고 있다.
은행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유람선 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60년대초 밀라노 외곽에 아파트단지를 건설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부터는 언론사업에도 손을 댔다.
***이탈리아, 지금 신 파시즘으로 직행중**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라는 책에는 베를루스코니의 위력에 대해 이렇게 쓰여져 있다.
"그는 1992년부터 시작된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 개혁 돌풍에 위기감을 느낀 극우세력과 기득권층의 전폭적 지지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언론매체를 통한 대중여론 조작에 힘입어 1994년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승리, 그해 4월에 이탈리아의 총리로 취임한 이탈리아 최대의 '정경복합권력'이다.
베를루스코니는 검찰의 사정수사가 총리인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자기 소유의 TV 네트워크와 막강한 권력을 총동원해 방어에 나섰다. 이같은 '권언(權言) 십자포화'로 결국 마니 풀리테의 기수인 안토니오 피에트로 검사를 뇌물수수 혐의로 사임하게 했다."
1994년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까지 되었지만, 베를루스코니 역시 탈세와 부패, 범죄조직 연루 혐의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집권 2백55일 만에 사임했다."
그는 그후 6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지난해 5월 총선에서 경제불황에 찌든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지배아래 있는 매스컴을 총동원해 "나를 뽑으면 당신들도 나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불어넣으면서 재집권에 성공했다.
베를루스코니 정권 출범후 이탈리아는 급속한 신 파시즘으로 경도되고 있다. 이 와중에 이탈리아팀 탈락이라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여론조작, 선동정치를 유일한 무기로 삼고 있는 베를루스코니 정권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 대처하다가는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할 수는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이탈리아 광란은 이런 면에서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파쇼적'이다. 이런 맥락을 읽을 때에만 최근의 이탈리아의 정도 이상의 정신적 이상상태의 본질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