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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윤보선을 암살하라!"

방준모 전 중앙정보부장 감찰실장 고백

지난 13일자 본지는 "나는 세번의 암살지시를 받았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방준모 전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의 기록을 공개했었다. 그러나 당시 본지는 세번의 암살지시 가운데 김재춘 전 중정부장과 민중당의 박한상 의원 암살지시 두 건만 보도할 수 있었다. 본지가 입수한 <KCIA>라는 책에 실린 내용이 두 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이 <KCIA> 후속편을 입수했다. 여기에는 놀랍게도 67년 5월 대통령선거 당시 야당후보였던 윤보선씨를 암살하려 했던 중정의 공작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김형욱 당시 중정부장은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 후보를 앞설 경우 그를 죽이려 했던 구체적 암살음모를 추진했던 것이다. 지난 63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연상케 하는 섬뜩한 대목이다.
과연 이 암살계획이 김형욱의 단독작품인지, 아니면 박정희 당시대통령의 지시사항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야당 대통령후보를 죽이려 했던 만큼 중정부장 혼자의 결정이라 보기엔 여러가지로 무리가 있어보인다. 밝혀져야 할 역사의 이면은 아직도 많은 것이다. 편집자

1961년 5.16 군사혁명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제5대 선거 때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와 격돌, 15만 표의 근소한 차로 승리했다. 1967년 5월3일에 실시될 제6대 대통령 선거는 박대통령의 4년간의 집권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상당한 지지가 예상되었지만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자유당, 민주당 때로부터 연결된 야당세가 강했었고, 군사혁명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혁명주체 세력들은 어떻게든지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박정희후보를 당선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제6대 대통령선거 전략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정세파악 보고서는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후보를 압승할 수 있다’는 좋은 판단이 아닌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감찰실장이었으므로 대통령선거 준비에는 손대지 않고 정보부 자체 문제에만 전념했다. 6대 대통령을 뽑기 위한 대통령유세가 한창 진행되던 4월 어느 날 김형욱 정보부장이 갑자기 나를 호출했다.
김부장과 나는 육사 8기생 동기였다. 동기생이라기보다 평소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김부장은 나를 불러 그 해결을 지시했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김부장의 방을 노크했다. 김부장은 혼자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부장님, 부르셨습니까?”
동기생이었지만 직책상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대하는 사이였다.
“방실장! 어서 오시오.”
김부장 주변에 감돌던 조금 전의 고요는 씻은 듯이 없어졌다.
부하 앞에서는 야심만만하고 배짱 두둑했던 김부장의 본래 모습대로 돌아갔다.
“방실장에게 긴히 지시할 일이 있어서 불렀소.”
“말씀 하십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선거가 아무래도 위험해!”
“위험하다니요.”
“백중지세야, 까딱하다간 박대통령 자리가 윤보선 씨에게 넘어 갈 것 같아.”
김부장은 박대통령의 재선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방실장! 박대통령의 혁명과업 완수와 경제계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지 이번 선거에서 재선해야 되지 않겠소. 준비하시오.”
“부장님, 무엇을 준비하란 말씀이십니까?”
“할 수 없지 않소. 윤보선을 암살할 준비를 하시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요. 한국이 사는 길이니 철저히 준비하시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진 기분이었다.
김부장이 나를 호출한 이유는 ‘윤보선 암살명령’을 하달하기 위해서였다.
상관의 명령이었으므로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김부장의 방을 나왔다.

윤보선씨의 암살을 지시 받은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대학을 졸업한 나의 신앙 양심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엄청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윤보선씨와는 직접 대면하지 않았지만 같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명령을 받은 나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것도 대통령이 될지도 모를 윤보선씨를 죽여야 한다는 엄청난 현실 앞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정보요원의 무기인 공작을 통해서 윤보선씨가 대통령이 되는 길을 막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 영감이 나의 뇌리를 스쳐갈 때, 발 벗고 나서서 박정희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뛰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설령, 내가 사표를 내면 암살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이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십자가를 지기로 했던 것이다.

조준경이 달린 ‘레밍톤 22mm 구경 5연발 칼빈’을 소지시킨 저격수를 대통령 후보인 윤보선씨 집 건너편에 상주시켜 놓은 상태에서 선거전은 열전을 뿜기 시작했다.
윤씨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지도 모를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감찰실장인 나는 부하들에게 세 가지 와해공작을 지시했다. 세 가지 내용은 ▲윤씨의 선거참모인 김총경을 후퇴시키고 가능하면 일간지에 사퇴성명을 발표시켜라. ▲윤씨 당락의 결정요인인 5백만 기독교 신자를 정치중립화시키라. ▲기독교 정치단체인 ‘염광회를 분쇄시켜라’였다.
특히 5백만 기독교 신자의 정치중립화는 박대통령의 당락과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였다. 그래서 기독교 내의 정치단체 활동을 어떻게든지 막아야 한다는 정책을 세워놓고 있었다.
기독교 정치단체 중 ‘염광회’의 활동이 심상치 않았다. 염광회는 윤씨의 선거참모인 김총경이 만들었다. 의정부 판자촌에서 목회하는 P목사가 회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최모 감찰과장을 불렀다. 그는 공정하며 의리가 있는 민첩한 정보부원이었다.
“최과장!”
“예.”
“염광회가 어떤 단체지요.”
“앞으로 이 단체는 많은 활동을 벌일 단체입니다. 수십만 명의 신앙집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집회를 통해 윤보선씨의 정치선전을 맹렬히 전개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활은 여기에 달렸소. 철저한 공작으로 염광회를 분쇄시켜야 할 것이오.”

염광회는 남산 야외음악당을 종교집회 사용목적으로 빌려 20여만명이 모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염광회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그 반응의 심각성이란 상상할만했다. 만약 1백만명의 기독교인들이 박대통령을 반대하기 시작했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게 되면, 윤보선씨의 득표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둘러서 염광회를 이끄는 P목사의 배후를 조사시켰다. P목사는 교인 30여명이 있는 의정부 XX교회의 목사였다. 그의 웅변술과 대중을 향한 설득력은 대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실력 있는 목사였으나 신학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았다는 약점이 있는 사람이었다. 교단차원에서 보면 ‘가짜목사’인 셈이다. 나는 P목사의 약점인 ‘가짜목사’라는 사실로 염광회가 가진 신비감을 파괴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서 기독교계 주간신문사 편집국장을 시내 모 음식점으로 불러내 점심을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점심을 먹다가 한마디 꺼냈다.
“제가 말씀드릴 내용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요즘 ‘염광회’란 단체가 나서서 신앙대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를 이끄는 P목사의 뒷조사를 해보니까 가짜목사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하는 교회로 세계에 소문이 나 있는데 목사 자격증도 없는 가짜목사가 판을 쳐서야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수십만 명이 모이는 군중집회까지 준비하고 있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특종감이 되겠는데요. 방실장님! 자세한 내용이 있으면 공개하십시오.”
내가 말하기 전에 기사감이 된다면서 P목사에 대한 자료를 요청해왔다. 그래서 준비해 간 자료를 못 이기는 척 내놓았다. 국장은 이 자료를 주욱 읽어갔다.
“사이비 목사군요. 이런 목사들은 조져야 돼. 이런 놈들 때문에 진짜 목사들이 욕을 먹는다니까!”
그 국장은 ‘조지겠다’는 기자특유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P목사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내가 오래간만에 모셨고, 또 기독교계의 정화를 위해 약간 도와드리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기자들에게 의례적으로 주는 촌지 봉투를 편집국장에게 내밀었다. 당시 돈을 싫어하는 기자들은 드물었다.
“기독교 정화를 위하고, 특종이 실린 이번 신문의 부수를 많이 찍으시라고 두둑하게 준비했습니다.”
촌지 봉투 속에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들어 있었다. 이 돈은 김형욱 부장에게 신청해서 타낸 공작비용이었다. 나는 그 돈으로 ‘부탁 아닌 선심’을 쓰고 있었다.
며칠 후 기독교신문은 염광회의 P목사가 가짜 목사라는 사실을 비중 있는 기사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일요일 큰 교회 앞에서 무료로 뿌려졌다. 이 신문을 받아 본 교인들은 “이런 가짜 목사를 왜 교회가 받아들이냐”며 P목사를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신문보도가 나가자 목사는 어디론가 도망을 가 버렸다.
신문은 전국 교회와 전 목사들에게 배부되었다. 이 기사는 기독교 정치단체인 염광회의 신비감을 완전히 파괴했고, 교인들이 정치에 중립을 지키도록 쐐기를 박는데 충분했다.
이렇게 해서 염광회는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선거는 서서히 종반전으로 접어들었다.
개표를 해봐야 당락을 확인할 수 있다 할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과 윤보선 후보의 인기는 비슷했다.
1967년 5월3일.
6대 대통령을 뽑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나와 저격수는 덕성여고 2층 창고에 틀어박혀 있었다.
하루 종일 윤씨의 마당을 주시했다. 이날 저녁시간부터 라디오에서는 개표상황을 보도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개표상황을 청취했다.
“전라도 쪽에서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 후보를 O만여 표 압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개표 집계로 보아 윤후보가 OO만 표 앞서고 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이같이 윤후보가 앞서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손에는 땀이 흘러 내렸다. 임박한 어느 순간에 윤씨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야 된다는 생각을 하니 온몸에 땀에 젖어 들었다. 이 일을 아랫사람을 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형욱 부장의 특별명령이었고,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울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내가 직접 현장에 나갔다.
김형욱부장은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재명령을 내렸던 터였다. 김부장에게 “내가 암살범으로 검거되더라도 가족의 생계 문제는 해결해줘야 한다”는 확약을 받지 못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다.
라디오 보도에 따라 몇 번인가 조준경에 눈을 대었다가 떼냈다.
한 사람 생명을 빼앗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깨달았다. ‘레밍톤’소총을 쥐고 있는 내 손이 떨리고 있었다.

윤후보와 박후보의 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박후보가 훨씬 앞서는 시간이 왔다.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지역에서 박대통령의 몰표가 쏟아져 나왔다.
5월 4일이었다. 박모 부실장이 뛰어 들어왔다.
“실장님 됐습니다.”
박 부실장의 이 보고는 개표상황으로 보아 박대통령의 재선이 확실시되는 표를 얻었다는 전갈이었다. 이 선거는 1백16만표 차이로 박대통령이 승리했다.
나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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