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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번의 암살지시를 받았다"

김재춘, 박한상씨 등 암살지시

유신 직후인 지난 73년 중앙정보부(KCIA)가 최종길 서울대 법대교수를 타살한 뒤 최교수를 간첩으로 몰아 자살로 처리했던 사건의 진실이 최근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결과 밝혀져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그동안 항간에 소문으로만 떠돌았던 중앙정보기관의 '정치 살인' 및 '진실 조작'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나 이런 사건이 최교수 살인 한 건에 그치지 않을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그 무렵 중앙정보부의 전횡을 볼 때 비슷한 사건이 재발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74년의 김대중 납치살인 미수사건이나 75년의 장준하 의문사, 87년의 수지 김 사건 등은 70~80년대에 중앙정보기관의 정치 살인 및 진실 조작이 부단히 재연됐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정치살인 시도는 60년대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중앙정보부 재임기간에 나에게 떨어진 암살 명령만도 세 번이나 되었다. 명령은 있었으나 생명을 빼앗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권력을 위해 생명마저 빼앗으려 했던 시대를 돌이켜 보면서 역사앞에 진실로 참회하고 있다."
김형욱 중정부장 시절 감찰실장을 지냈고 71년 중정을 그만둔 뒤 지금은 미국 시민권자로 살고 있는 방준모씨가 문일석씨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방씨의 증언은 지난 96년 <KCIA>(한솔미디어 출간)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으나 모처의 방해로 시중에 거의 유통되지 않아 일반인들은 접할 수 없었다.
방씨는 이 책에서 자신이 받았다는 세 건의 암살 명령 가운데 김재춘 전 중정부장과, 야당의원인 박한상 의원의 암살지시 등 두 건의 비화를 공개하고 있다. 방씨는 암살 명령을 받은 뒤 이들에 대해 '정치 테러'를 가하는 수준에서 명령을 희석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방씨의 증언 가운데 암살 관련 부분만 발췌해 소개한다. 아이러니컬한 대목은 이같은 암살 명령을 내렸던 김형욱 중정부장이 그로부터 10여년뒤인 79년 중앙정보기관에 납치돼 암살됐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무서운 인과응보다.

***1.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 암살지시**

5.16혁명 후 혁명주체들 사이의 권력 쟁탈전은 심각했다. 쟁탈전은 육사 선후배 동기생끼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다. 장도영 장군이 관계된 반혁명사건은 혁명 후 첫 권력투쟁이었다.
뒤를 이어 3대 중앙정보부장인 김재춘씨를 전격 해임시킨 것도 주체 세력간에 불붙은 권력투쟁의 결과였다.
혁명 직후 박대통령은 민정에 참여키 위해 새 당이 필요했다. 그래서 김재춘을 시켜 사민당을 창당시켰고, 김종필을 시켜 공화당을 창당토록 했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1964년 선거 때 김재춘씨가 만든 사민당이 아닌 김종필씨가 만든 공화당 쪽을 택했다.
그후 정보부장에 임명된 김재춘씨의 전격 해임은 육사 8기생에 의한 5기생의 몰락을 의미했다. 해임된 김재춘씨가 반정부 운동으로 돌아서고, 경향신문을 인수하려는 작업을 진행시키자 육사 8기생의 핵심멤버인 김형욱 부장은 그의 암살을 나에게 명령했다.

김형욱 부장이 나를 불렀다.
“방실장, 김재춘 씨가 경향신문을 인수하기 위해 노력한다는데 그게 사실이야?”
“예.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그게 사실이지만 언제 계약한다는 정보는 입수치 못했습니다.”
“대통령께서 경향신문을 국가 것으로 만들라고 지시해서 정부가 그 일을 하고 있는데 김재춘이 인수하면 큰 일 중의 큰 일이야.”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김재춘을 죽여 버렷!”
“부장님! 어떻게 죽입니까?”
“3파운드짜리 다이너마이트를 지붕 위에 던져버리면 될 게 아니야.”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했다. “김재춘을 없애라”는 명령을 받은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권력 싸움은 이처럼 냉엄한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같이 싸웠던 어제의 선배를 경우에 따라서는 없앨 수도 있는 비정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김재춘씨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를 반정부 활동에서 손을 떼게 하는 동시에 경향신문의 인수를 못하게 하는 길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이과장으로부터 긴급연락이 왔다.
“실장님! 내일 밤에 김재춘이 경향신문을 계약한답니다.”
특급정보였다. 큰일이었다. 김형욱 부장은 나에게 김재춘을 없애라고 했는데 내일 경향신문을 인수한다니….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김부장에게 뛰어 올라갔다.
“부장님. 김재춘 씨가 내일 경향신문을 인수하기 위한 계약을 한답니다.”
“뭐라고, 지난번에 내가 뭐랬어. 죽이라고 했잖아. 당장 뛰어가서 끝장을 내버렷.”

나는 권총을 허리에 차고 지프차에 올라탔다. 몇 명의 부하직원을 데리고 김재춘씨가 출입하는 골목을 지켜섰다.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주위가 어두워서 옆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재춘씨를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첫째는 공포를 주어 자신이 알아차리도록 하기로 했다. 또 격투를 해서 내가 부상을 당하면, 김재춘씨를 입건하고 계약을 못하게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자기 살을 베어 남을 살린다는 말을 떠올렸다. 내가 부상을 당해야 부장에게 보고할 때 최선을 다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이고….

김재춘씨의 차가 나타났다. 나는 지프차를 힘껏 몰아 김재춘씨 차를 들이받았다. 김씨의 운전수가 운전을 잘하는 모양인지 부딪치기 직전에 멈춰섰다. 나는 뛰어내리면서 “이 새끼 너 죽을려고 환장했어. 왜 내 차에 부딪쳐!”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문을 열고 김재춘의 넥타이를 휘어감은 채 한방의 펀치를 날렸다. 그러자 차에서 나와서 나를 때릴 줄 알았던 운전수는 나오기는커녕 차를 몰고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나는 질질 끌려갔다. 끌려가면서 속으로는 “좀 많이 다쳐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10m쯤 끌려갔을 때 넥타이가 툭 끊어지면서 나는 길바닥에 나뒹구러졌다. 나의 팔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길로 내가 아는 병원에 달려가 깁스를 해달라고 했다. 진단서를 2개월 부상으로 끊었다.
이튿날 깁스한 채로 절룩거리면서 김부장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옆눈으로 지켜보던 김부장은 “죽이라고 하니까 죽이진 않고 겨우 갈빗대가 두 대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까지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사실은 나의 펀치 세례를 받은 김재춘씨가 그날 저녁 기자회견을 했다는 것이었다. 조간신문에는 “김재춘 씨가 모기관원에게 두들겨 맞아 갈빗대가 두 대나 부러졌다”는 기사가 주먹만한 활자로 찍혀져 나왔다. 김재춘씨도 쇼맨십이 대단한 이였다. 주먹으로 몇 대 맞은 것 뿐인데, 갈빗대 두개가 부러졌다면서 이불을 둘러쓰고 있었다.

김재춘씨는 중앙정보부가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신문인수를 포기했고, 여걸 홍연수씨(경향신문의 실질적 오너)는 “김재춘씨는 안되겠어. 감찰실장이 주먹으로 몇 대 두들겼다고 도망가는 사람한테 어떻게 야당 신문을 맡길 수 있어”라고 말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대단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 대단한 여성도 끝내는 신문을 팔겠다는 결심을 내렸다. 역시 여자는 약한 존재였다. 심리공작이 적중한 것이다.
그리고 김재춘 씨가 경향신문 인수작업에서 손을 뗌으로써 그의 암살명령은 거두어 들여진 셈이다.

한편 경향신문사 내에서는 이형백 체육부장이 간첩 혐의로 입건된 사건과 동시에 정보부 요원이 파견되어 신문사의 보도관제를 아무도 모르게 진행시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료실에 배치된 정보 요원 책상이 문화부, 사회부, 정치부를 거쳐 편집국장석 뒤까지 옮겨졌다. 말하자면 경향신문의 공매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는 이야기다.
신문은 드디어 1966년 1월 25일 공매형식을 거쳐 기아산업 김철호 사장의 소유로 넘어갔다. 공매액은 2억1천8백만원이었다. 그후 신진의 김창원 씨가 사들였다가 정부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매섭고 기세등등했던 야당신문인 경향신문도 이런 과정을 거쳐 불과 1년 수개월만에 정부여당을 대변하는 신문으로 뒤바뀌었다. 내가 손댄 지 1개월반 만에 공매처분에 부쳐지게 된 것이다.
그때 김재춘 씨가 경향신문을 인수해서 발간했다면 한국의 정치판도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재춘씨는 인수와 동시에 생명을 잃어버려야 할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그때 나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김재춘씨 집에 던질 ‘다이너마이트’를 준비해 두었으니까.

어느날 육사골프장에서 우연히 김재춘씨와 맞부딪쳤다. 그는 나를 보는 순간, 재빠르게 얼굴을 90도 각도로 돌려버렸다. 그와 나 사이엔 대양보다 깊은 침묵이 잠시 흐르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여보시오. 당신은 나에게 감사해야 하오. 다이너마이트로 당신을 죽이라는 상관의 명령을 차마 그대로 이행할 수가 없어 그렇게 했으니까….’

***2. 박한상 의원 암살지시**

정론지로 자리를 굳힌 동아일보는 박한상 의원의 정보부 해체 주장 등을 그대로 보도함으로써 정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국회 내에서의 발언은 급기야 학생데모를 유발하는 요인으로 등장했다. 당시 김형욱 정보부장실에는 부장에게 포섭된 거물 야당정치가들이 자기 사무실 드나들 듯 출입하고 있었다.
시시한 여당 국회의원보다는 오히려 이들 야당의원들의 청탁이 잘 받아들여졌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의원은 정보부의 회유공작에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정국이 어수선해지면 전화받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부장으로부터 어떤 명령이 떨어질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박의원의 정부비판이 신문지면을 휩쓸고 있을 때 부장의 호출이 있었다.
“방실장! 박한상이가 또 정국을 흔들어서 사회가 불안해지기 시작했소. 그가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소. 방실장이 그를 해치우시오. 전에도 말했지만 섣불리 하다간 오히려 되물리니까 숨통이 끊어지도록 완전히 밟아치우시오.”
부장은 흥분한 상태였다. 무엇이 김부장을 흥분케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부장이 직접 박한상 의원에게 회유의 손길을 뻗쳤다가 거절당한 것 같은 분위기임을 느낄 수 있었다.
“박의원을 해치우는데 어떤 방법이 있는지를 빨리 말해보시오.”
김부장은 이 말을 마치자 나를 쏘아보았다.
“뒤의 잡음을 생각 안 한다면 무슨 일이든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야당 대변인을 해치운다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선 무언의 경고를 하여 투쟁의 한계를 스스로 낮추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런 기회를 주고 해치워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언의 경고를 어떻게 한단 말이오.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현재 박의원은 정치적 욕망에 사로잡혀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멸망의 길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자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얘기해보시오.”
“박의원 집 마당에 화염병을 던져 한번쯤 놀라게 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김부장의 별명은 ‘산돼지’였다. 산돼지는 원래 뒤를 보지 않고 돌진하는 성미가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박의원 테러문제만 해도 김부장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예이다. 처음에 ‘당장 해치우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만 보아도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 방실장이 책임을 지고 박한상이가 투쟁의 한계를 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시오. 그래도 안될 때는 해치우시오.”

신문에서는 연일 박의원 집의 방화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다.
화염병 폭발사건이 일어나면 박의원은 잠잠할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대정부 비난이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부장은 또다시 나를 불렀다.
“방실장!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는 모르나 그 무언의 경고도 통하지 않잖아. 당시 지금 무엇하는 거야.”
"부장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곧 해결하겠습니다."
김형욱 부장으로부터 ‘박한상을 해치워라’는 명령을 받은 나의 심정은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공작을 잘못 진행시켰다가는 커다란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감찰실 직원인 이수사관과 이모 소령을 불렀다. 박의원에게 신변이 위험하다는 불안감을 심어주기 위한 공작을 펴기 위해서였다.
“이씨는 소매치기가 되고, 이소령은 돈을 빼앗긴 피해자가 되시오. 소매치기인 이씨가 돈을 빼앗아 도망가다가 박한상 의원을 붙들고 빙빙 돌 때 이소령은 소매치기를 때리는 척 하면서 박의원에게 한방을 먹이시오. 그리고 이씨가 도망가면, 이소령은 쫓아가시오. 이것이 상황 끝이오.”

종로 2가에서 쓰러진 박한상 의원의 테러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국회 내무분과위원들이 정보부를 방문했다. 당시 내무분과위원장은 (공화당의) 오치성 의원이었다.
오치성 의원은 정보부가 한 일이 아니냐고 따지고 들었다.
“오의원께서는 정보부가 박한상 의원을 테러했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모양인데, 우리가 왜 박의원을 테러하겠습니까. 정보부 해체론을 들고 나왔다고 해서 쓰러질 정보부도 아닌데...”
부장의 설명을 듣고 돌아가느 오치성 의원은 곁눈길로 나를 쳐다보면서 웃었다. ‘자신은 알고 있다’는 식의 태도였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 예상했던 효과가 나타났다. 박의원의 정치발언은 수위가 낮아졌다. 무언의 경고가 효력을 나타낸 것이다.

박의원 테러사건은 심리적 효과를 노린 우회공작이었다. 대문이 화염병에 불타고, 길거리에서 테러를 당하는 사건으로 인해 심리적인 압박을 당했을 테니까.
정보 공작원들의 고민도 많다. 부장으로부터 ‘박한상을 해치워라’는 명령을 받고 정말 해치워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정보부를 나와 월남에서 일할 때 내 후임에 김X순이 앉았다. 김부장의 말에 따르면 “김성권의 심복부원을 잡아다 조지라고 김X순에게 지시했는데, 정말로 반죽음 상태로 고문하는 바람에 자신의 부장직 수명을 단축시켰다”고 술회했다.
박한상 의원이 당시에 더 극한적인 투쟁을 했다면 정치적으로 얼마간 성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뒤따랐을지는 예측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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