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고 산업혁명이 성취되어 귀족사회가 붕괴되며 세속의 시대가 열리게 되자 작가들은 또 다른 성격으로서의 예술가적 자기규정을 제시하게 된다. 그들은 이성의 영원함을 믿을 수도 없었고 감성의 초월성을 존중할 수도 없었다. 발자크와 뒤랑티로 대표되는 이들 리얼리즘 작가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사람이었고, 이때 현실이란, 저기에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별의별 사람들이 뒤엉켜 누추하게 그리고 복잡하게 서로 뒤엉켜 살아가는 지금 이곳의 공동체적 삶의 현장이었다. 그것의 재현이란, 객관적이고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을 경과하면서 보편적 체계라든가 공동체적 객관성이란 이미 찢겼으며, 오직 자신의 파편화되고 개별화된 내면, 잠재된 충동을 정직하게 밀고 나갈 수밖에 없게 된, 그것의 거짓 없는 표현이 문학과 예술이라고 믿게 된 모더니스트들의 자기규정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현실이란 알 수 없는 것이고 재현이란 가짜가 되며, 그 알 수 없음과 가짜라는 것의 밝힘이 문학과 예술의 본질이라고 주장하게 된다.(아, 쓸데없이 서론이 길었다는 걸 나도 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작가란 무엇인가를 공부하고 또 가르치는 나에게 시인 김지하는 일종의 아포리아다. 나는 작가란, 그리고 지식인이란 끊임없이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증명을 행하는 자라고 여전히(문학과 예술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든, 그리고 작가에 대한 책무가 무엇이라고 여기든) 믿는다. 동시에 당대의 문제에 개입해 당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행위를 담보하는 자라고 믿으며, 또 그렇게 가르친다. 그런 관점에서 시인 김지하는 하나의 표상이다. 나야 말로만 그렇게 하지만, 시인 김지하는 엄혹한 유신의 동토에서도 글과 행동으로 작가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준 스승이기에 그렇다.
▲ 박근혜 지지 입장을 밝히고 있는 김지하 시인. ⓒ연합뉴스 |
교과서에 실려 있는 그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읽을 때면, 지금도 나는 목이 메어 온다. 연로한 그가 몸이 많이 상했다는 전언을 들을 때면 참혹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충분히 감당했기에 그의 변절을 욕하지 않겠다고 어느 시인은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하려고 한다.(하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게 또 지식인이라고 믿기로 했다!) 다만 일국의 대시인이나 나와 같은 이름 없는 변방의 작가나 예외 없이 늙고 병들어 마침내 한세상을 그렇게 마감하는구나 하는 생각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시인 김지하가 박정희 시대와 화해했다는 건 상관하지 않겠다. 악행을 행한 자가 속죄를 하지 않아도 먼저 손 내밀어 화해를 청하는 풍경을 너무 많이 보아온 탓에 오히려 익숙하기까지 하다. 그런 탓에 감동이 없을 뿐.(아, 시인이란, 문학이란 무엇보다 감동을 전달하는 게 아니었던가? 그로 인해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데 시인 김지하가 그 박근혜를 지지하겠다고, 그게 뭐 문제될 게 있느냐고 묻는다. 문제될 게 뭐 있겠는가.(그런데 좀 뻔뻔하다!) 그 누구든 자신의 판단대로 누구를 지지하든 대체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러나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더구나 이 땅의 지식인이라면 무언가 선택을 해야 하는 지점이 있지 않겠는가.
내가 주장하기 위해선 나와 다른 상대의 말을 감성적 인내를 가지고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까지는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만 옳다는 것 역시 오만이고 독선이다. 누가 어떻게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그런데 나는 지금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근혜가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라서 반대한다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나 박근혜로 대표되는 이 땅의 수구세력은 친일과 군부독재와 기득권을 옹호하는, 아니 바로 그 기득권 중심의 세력이라는 게 문제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대선의 시기에 박근혜의 집권을 막는 게, 부족하고 마음에 차지 않지만, 야권 후보를 통한 정권교체가 옳은 선택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기권도 선택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물론 방관이지만, 원론적으로야 그것도 자신의 의사표현이기는 하지만, 하워드 진의 유명한 언명처럼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중립이란, 기권이란, 방관이란 결국 박근혜로 대표되는 기득권 집단의 집권을 용인하는 결과가 될 테니까. 이 시기, 방관은 역사의 죄악이다. 더구나 시인 김지하가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다른 정상배들이야 그러거나 말거나지만, 시인 김지하가?
누구를 지지하든, 유권자의 권리를 포기하든 그것도 다 각자의 선택이므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작가가 누구를 지지하는가가 여전히 문제되는 건, 작가된 자의 삶이 특이하고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문화적 삶과 긴밀한 관계망에 놓여 있다는 점 때문이다. 나는 지난 세월의 무엇이, 어떤 사건이 시인 김지하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 자체(An-sich)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의 삶이란 객관적이며 당시의 삶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삶은 그 본질로서 사회적-역사적이다. 유신시대, 그 광기와 야만의 시대에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려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시인 김지하는 우리 모두의 초상이었다. 그는 사르트르적 의미의 지식인, 곧 지식인은 자기 고유의 모순이 결국 객관적 모순의 특수한 표현임을 깨닫고서, 자신과 타인을 위해 이러한 모순과 싸우는 모든 인간에게 연대감을 느끼게 한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타자로서 자기 자신」에서 리쾨르가 강조하듯이 어떠한 단계(혹은 상황)에서도 '자기'는 그의 타자와 분리되는 않는, 즉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주체로서의 역할을 기꺼이 감당했었다.(불행하게도, 예전에는!)
1960년 봄, 조지훈 선생은 잡지 <새벽>에 당대의 명문 '지조론(志操論)―변절자(變節者)를 위하여'를 실어 지식인의 변절 행각을 질타했다. 선생은 '지조론' 첫 머리에서 "지조(志操)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고 썼다. 그리고 이어서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다."고도 했다. 선생은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선생은 글 말미에서 이렇게 적었다.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고.
그러니 이제 시인 김지하는 없다. 다만 변절한 지식인 김지하의 추한 몰골만 남겨졌을 뿐. 이것은 그의 불행이 아니라 이 시대의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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