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와 그 피해자에 대한 공감부족
▲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연합뉴스 |
지난 9월 24일에 박근혜 후보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사과문에서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고, "이제는 증오에서 관용으로,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국민을 저의 소중한 가족으로 여기면서 국민의 삶과 행복을 지켜드리는 것이 저의 마지막 정치적 소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가 진정으로 5·16과 유신시대 수많은 피해자들과의 화해와 통합을 원한다면 '과거사'와 그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 '공감'(sympathy)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타인의 사고나 감정을 자기의 내부로 옮겨 넣어, 타인의 체험과 동질의 심리적 과정을 만드는 일"
과거사 정리 문제나 인권 침해 사건에서 피해사실과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화해를 위한 첫 걸음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공감'은 과거사나 인권 침해에서 발생한 사실 '있는 그대로'를 제대로 알고, 그 침해사실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 엄연히 발생했던 사실을 일어나지 않았다고 부인하거나, 어떤 사건이 발생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 사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우회적으로 부인한다면(박근혜 후보가 이번 기자회견에서 "김지태 씨가 헌납한 재산이 포함된 것은 맞지만, 부정부패 혐의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헌납했던 것"이라고 한 것은 침해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과거사의 정리나 인권침해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부일장학회 재산헌납이 '무효'가 아니라고?
박 후보의 기자회견 후, 1962년에 발생한 '부일장학회 재산 강제헌납 사건'의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보도가 있었으므로, 이 글에서 그 사실관계를 재론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듯하다. 다만, 박근혜 후보가 부일장학회 재산 헌납과 관련하여 언급한 그 '강압'의 의미에 대해서는 몇 마디 훈수의 말을 덧붙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다고 하자. "갑은 도박꾼이다. 그런데 갑은 자신이 도박으로 잃은 돈을 회복하려고 을이라는 사람을 포함한 여러 명을 도박을 하자고 유인한 다음 수사경찰관과 결탁하여 이들을 도박 현행범으로 연행하여 경찰서 보호실에 감금했다. 갑과 결탁한 경찰관은 수사를 빙자하여 을을 협박하였고, 갑은 이런 사태를 이용하여 자신이 도박판에서 잃은 돈의 9배에 달하는 을의 부동산을 넘겨받았다." 자! 이 사건에서 을이 갑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자신이 갑에게 부동산 등기서류를 넘겨 준 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그러니 다시 돌려달라고. 소송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결과는 을의 승소다. 이 사건은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대법원 판결(대법원 1974. 7. 23. 선고 74다157 판결)에서 있었던 실제 사례이다. 대법원은 "갑이 강압적인 방법으로 등기한 것이므로 선량한 풍속과 정의의 관념에 반하여 당연 무효의 등기"라는 이유로 을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근혜 후보는 이번 기자회견에서 지난 2월 24일 있었던 서울중앙지방법원 판결을 언급했다. 그것도 잘못 언급했다. 김지태 씨의 유족들이 패소한 이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김지태가 1962년 정부의 강압으로 주식을 증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증여 계약의 당사자는 김지태와 정수장학회(당시 5·16장학회)이고, 증여계약이 무효는 아니며 취소할 수 있을 뿐이나, 취소권을 행사할 수 있는 10년 제척기간이 이미 경과하여 취소권이 소멸하였다. 정부의 강압행위는 불법행위이지만, 상속인들의 손해배상청구권 역시 10년의 소멸시효기간이 도과하여 청구권 역시 시효로 소멸하였다."
'정부의 강압행위'라는 말이 2번 나온다. 다만, 그 강압행위가 앞서 본 사례와는 달리 '무효'에 이를 정도는 아니고 '취소'할 수 있는 정도라는 이유에서, 그리고 그 취소를 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나가버렸다는 이유로 패소판결을 선고한 것이다.
김지태 씨의 유족들은 위 판결에 대해 항소하였고, 현재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현재 재판 진행 중이므로 위 제1심 판결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법률 전문가의 입장을 떠나 일반인들의 건전한 상식에 기초해서 판단해 보자.
2007년 5월 29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부일장학회 재산 등 강제헌납의혹 사건'에 대한 조사 후 "국가는 공권력의 강요로 인해 발생한 부일장학회의 재산권 침해에 대해 사과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고, "국가는 헌납토지의 경우 부일장학회에 반환하고, 반환이 어려운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함이 상당"하며, "헌납주식에 대하여는 정수장학회로부터 국가에 원상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국가는 김지태 씨의 유가족에게 그 손해를 배상함이 상당하다"는 결정을 했다.
이 사건에 대한 '조사보고서'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다운받아 볼 수 있다. 이 '조사보고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1962년 당시 중정 부산지부장 박○○에 의해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어 군재의 공판이 진행 중일 때 6. 20. 계엄사령부 법무관실에서 고원증이 지참해 온 미리 작성한 양도서류에 날인을 강요당하고 쇠고랑 찬 손으로 본의 아닌 날인을 하게 되었다"(1971. 8. 김지태 경위서)
"내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고 맞서는 경우 간부들이 희생당하는데다가 회사경영이 엉망이 되어 수천 종업원이 실직하게 될 것이 안타까웠다. <중략> 구속된 조건 아래 그런 서류를 작성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니 석방된 연후에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버티었으나 막무가내로 어느 날 작성해 온 각종 양도서에 강제로 날인이 이루어진 것이다."(1976. 김지태 『나의 이력서』)
나는 묻는다. 앞서 본 도박꾼 갑의 사례와 부일장학회 사례 중 어느 것이 더 '강압적'인가. 부일장학회 재산 헌납이 더 '강압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앞서 본 서울중앙지방법원 판결이 변경될 가능성을 기대하셔도 된다. 아직도 답을 내지 못한 분들을 위해 부일장학회 재산 헌납이 이루어질 당시의 신문기사 하나를 소개한다.
박정희 최고의장은 "혁명 1주년을 맞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계엄에 의하지 않고서는 치안이 유지될 수 없다는 현실을 법관들은 직시하고 통절한 책임감과 부끄러움을 간직하여 더욱 분발해주기를 바란다."고 지시하였다.(동아일보 1962. 5. 15. 1면)
"박의장 판검사에 경고각서"라는 제목의 1962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5·16 제1주년'을 맞아 박정희가 대법원장과 검찰총장, 그리고 전국 법관 및 검사들에게 보냈다는 문건의 제목은 '지시각서 제5호'이다. 이 문건에는 "일부 몰지각한 법관들이 혁명정신과는 동떨어진 판결을 하였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김지태씨가 구속된 후 부산고등군법회의에서 7년형이 구형된 것은 1962년 5월 24일이다. 사법부와 검찰총장에게 '박의장'이 '경고각서'를 보내던 때가 바로 그때이다. 부일장학회 재산이 '헌납'된 것은 바로 그런 시절이었다.
과거사의 '진실', 그 근원을 생각하라
한홍구 교수의 글(박정희의 언론장악 부일장학회 강탈, 한겨레신문 2012. 3. 24.)에 의하면 박정희는 5·16장학회에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물을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말이라고 한다. 한홍구 교수가 던진 의문처럼 "박정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휘호를 남긴 것인지"지 모르겠으나, 진정으로 '아버지' 박정희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박근혜 후보는 우리 현대사에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과거사의 진실', 그 '근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강물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번 제18대 대통령 선거는 잘못된 우리 과거사를 바로잡고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분수령이다.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그 도도한 흐름의 근원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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