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1974년생이다. 1993년 3월에 대학에 들어갔다. 같은 해 태어난 김모 씨는 1993년 1월 삼성전기 수원사업장에 취업했다.
기자가 대학에서 헤매는 동안, 김 씨는 고압 변압기 생산부 조립공정에서 방사선 검사, 납땜 등을 담당했다. 거기서 납은 액체로 흐르다 다시 기체가 됐다. 그리고 다시 미세한 입자로 응결돼, 김 씨와 그 동료들의 코와 입으로 들어갔다. 이른바 '납 흄'이라고 부르는, 눈에 안 보이는 입자다.
퇴사 이후 김 씨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 그 직후, 만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엄마가 된 김 씨는 산업재해 인정을 요구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거부했다. 소송이 벌어졌고, 김 씨가 이겼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16일 근로복지공단의 불승인 처분을 직접 취소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1993년은 김 씨와 기자의 인생이 갈라진 해였다. 기자가 머문 세상에서, 공장 안에서 '납 흄'이나 벤젠을 들이마시다 백혈병에 걸릴 일은 없었다. 김 씨가 사는 곳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공장 취업해서 축하받는 아이들, 백수가 돼도 공장은 상상 못하는 아이들
기자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때, 실업계에 진학한 친구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일부 실업계 고등학교는 입학 문턱이 꽤 높았다. 공부도 곧잘 하는 편이었던 그는 무난히 진학했다. 주변에서 그에게 축하를 보냈다. 기자도 함께 축하했다.
얼마 뒤, 기자는 새로운 걸 알았다. 같은 하늘 아래 어떤 세상에선, 성적과 무관하게 실업고 진학은 아예 상상도 못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대학에 갈 전망이 안 보여도, 실업고에 진학한 뒤 공장에 들어가는 진로는 아예 꿈꿀 수 없는 아이들이다. 백수가 될지언정, 공장에서 위험물질을 만질 리는 없는 인생. 중산층 이하로는 눈길을 둔 적이 없는 삶.
그 세계에 사는 이들은 실업고 재학 중에 삼성 공장에 취업이 확정됐다고 온 동네에 자랑을 하는 아이들을 상상할 수 없다. 그들에게 삼성전기 생산라인에서 '납 흄'을 들이마셨던 김 씨는 '투명인간'이었다.
'메이저 캠'에서의 '대중노선', 그리고 '투명인간'
옛 운동권 용어 가운데 '메이저 캠'이라는 게 있었다. 학생운동이 활발하고, 시위 참가자 수가 많은 대학을 가리킨다. 묘하게도, 대학 입시 배치표 상단에 있는 학교 명단과 겹쳤다. 서울의 상위권 대학과 지방 국립대학이 '메이저 캠'으로 분류됐다. 전대협, 한총련 의장단도 주로 '메이저 캠' 출신이었다. 이른바 86세대 정치인 역시 '메이저 캠'에서 학생운동 주류였던 이들이 많다.
'대중노선'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활동가는 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받아 안아야 한다고 했다. '메이저 캠'에서 "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받아 안았던" 이들이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을 포함한 86세대 정치인이다.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지만, 인문계 대신 실업계, 대학 대신 공장에 들어간 많은 이들이 있었다.
또 '메이저 캠'이 아닌, 이름 없는 대학이나 2년제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큰 희생을 치른 이들이 있었다. 1980년대를 추억하는 서사에서 이들의 자리는 없거나 비좁다.
같은 하늘 아래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어쩌면 '투명인간'들.
'메이저 캠'에 다니는 활동가들이 이야기한 '대중'은, 그들에게 다른 세계 사람들이었다.
하위 20% 소득은 계속 악화
'메이저 캠', '대중노선' 등과 마찬가지로, 역시 잘 쓰이지 않는 옛 운동권 표현들이 많다. 예컨대 '기층민중'이 그렇다. 요즘 누가 '기층민중' 같은 표현을 쓰나.
대신 이런 표현이 쓰인다. '소득 1분위'. 소득 하위 20%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들은 계속 가난해진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올해 1분기 '1분위'(하위 20%) 소득은 지난해 1분기에 비해 소득이 8.0%p 줄어들었다. 최근 발표된 올해 2분기 가계 동향 조사 결과를 보면, '1분위'(하위 20%) 소득은 지난해 2분기에 비해 소득이 7.6%p 줄어들었다.
요컨대 전직 '사노맹 가담자'(조국 민정수석)와 전직 '전대협 의장'(임종석 비서실장)이 청와대 요직에 있는 나라에서 '기층민중'의 형편은 더 나빠졌다.
소득 불평등, 오로지 '적폐' 탓일까?
'관료'의 항명 탓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관료가 관료 나름의 논리로 움직이는 건 상수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항명하는 관료는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관료 역시 중추는 86세대이므로, 현 청와대가 소통하기에 더 편할 게다.
그렇다면, '적폐' 탓인가? 정책 집행과 효과 사이엔 시차가 있으므로,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정책 부작용이 지금 나타난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렇기만 한가? 지난 2016년 8월 조세재정연구원이 내놓은 보고서 <소득수준별 세부담 평가와 발전방향>을 보자.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 재분배 즉 불평등 완화를 위해 가장 좋은 방식은 '저소득층을 제외한 나머지 계층 증세'다. 그 다음이 '저소득층을 포함한 모든 계층 증세'다. '부자만 증세'하는 방식은 마지막이다.
요컨대 상위 1% 특권층만 겨냥한 증세는 별 효과가 없다. 상위 20~60%, 이른바 중산층까지 아우르는 증세를 통해 재정을 확보해서, 소득 하위 계층을 지원하는 방식이 불평등 완화를 위해 가장 효과적이다. 요컨대 세계화 체제, 수출 대기업 주도 경제의 수혜자인 대기업 정규직과 공공부문 종사자의 소득이 조세를 통해 하위계층으로 흐르게 해야 한다. 그래야 불평등이 완화된다.
이 보고서는 언론에도 여러 차례 소개됐고, 관련 연구자 및 관료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다.
불평등 완화 효과 가장 적은 방식 택한 문재인 정부
하지만 지난해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임기 중에 중산층 증세는 없다며 선을 그었다. 앞서 거론한 세 가지, '중산층부터 증세', '전 계층 증세', '부자만 증세' 가운데 가장 효과가 적은 방식을 택했다. 소수 초고소득층을 제외한, 소득 상위 20% 가운데 다수에겐 지난 정부와 마찬가지 세율이 적용됐다.
그 결과, 상위 20% 소득은 10분기(30개월) 연속 상승했다. 하위 20% 소득이 떨어지는 가운데도 상위 20% 소득은 올랐다. 하위 20%와 상위 20%의 간극은 최대로 벌어졌다.
문재인 정부는 왜 불평등 완화에 가장 좋은 해법을 고르지 않았을까? 왜 상위 20%의 소득이 하위 20%로 흐르게끔 물꼬를 트지 못했을까?
첫 소득이 중위소득 이상, '투명인간'을 상상하지 못하는 그들
현 정부의 핵심 지지층이 86세대다. 대학 진학률이 지금보다 낮던 시절에 대학 교육을 받았고, 큰 어려움 없이 대기업 정규직이 된 세대다.
통계 작성 방식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근로소득자 중위 소득(소득이 많은 순으로 한 줄로 세웠을 때 중간에 있는 값)이 200만 원대 초반이다. 어지간한 대기업 첫 월급이 그보다 높다.
대기업 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첫 소득이 중위 소득보다 높았으므로, 그들은 중위 소득 이하의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근로소득자 절반이 그들에겐 '투명인간'이었다. 인문계 대신 실업계, 대학 대신 공장을 택했던 또래 다수가 역시 '투명인간'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20~30년을 보냈다.
언제까지 '적폐 부활' 핑계 댈 건가?
'메이저 캠' 안에서 추구한 '대중노선'이 대학 밖 진짜 대중을 대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첫 출발이 중위소득 이상이었던 이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는 정책은, '투명인간'까지 아우르는 사회 전체의 불평등 완화에 기여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다시 '적폐 탓'이 나온다. 현 정부를 뒷받침하는 세대로부터 지지받지 못하면, '적폐' 세력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상위 1% 특권층을 대변하는 그들이 다시 활개 치는 걸 막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사실 낯익은 풍경이다. 이른바 '적폐' 세력은 북한의 위협을 내세워 자신들의 횡포를 정당화 했다.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는 것과 '적폐'의 독재를 방치하는 건 다른 차원이다. 그런데 그걸 구별하지 않았다.
'적폐'에 맞섰던 이들 역시 어쩌면 닮았다. 적폐 부활을 막는 것과 상위 20% 집단의 기득권 문제는 다른 차원이다. 그런데 그걸 구별하지 않는다.
또래 친구들이 공장에서 '납 흄' 마시며 일할 때 대학에 있었던 이들이 20~30년 동안 누린 기득권을 조금 헐어서 하위 20%에게 보태자는 게 과연 '적폐 청산'과 양립할 수 없나? 그럴 리 없다.
중산층의 부담 탓에 이탈한 지지는 '투명인간'의 새로운 지지로 메울 수 있다.
최영미 시인은 최근 자신이 과거 민주화 운동하던 시절 겪은 성추행 피해를 페이스북 포스팅으로 고백했다. 당시 최 시인의 여자 선배가 성추행 공론화를 막았다고 했다. 더 중요한 민주화 운동의 대의를 위해.
이런 풍경을 언제까지 봐야 할까. 적폐 청산이라는 대의가, 소득 상위 20%만 살찌우는 현실을 정당화할 근거는 될 수 없다. 과거 '기층민중'을 이야기했던 이들, '민중의 아들 딸'을 자처하던 이들이 권력 중심부에 있는 지금이라면, 더욱 그렇다.
계속 늘어난 상위 20% 소득, 갈 곳은 부동산뿐
무려 30개월 연속으로 상위 20% 소득이 늘어났다. 세금으로 거둬서 아래로 흘려보내지 못한 소득이 방향을 튼 곳이 어디인지, 다들 안다. 서울의 부동산 시장은 작은 신호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갈 곳 없는 돈은 서울 부동산으로 몰린다. 다행히 박원순 서울시장이 용산, 여의도 개발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30개월 동안 팽창하기만 한 상위 20% 소득을 어떻게 하위 20%로 흘려보낼지에 대한 밑그림은 없는 상태다.
통계 숫자마저 '투명인간'을 외면하면…
그리고 이 같은 소득 불평등 실태를 공개한, 전직 노동운동가 출신 통계청장은 갑자기 경질됐다. 새로운 통계청장 역시 통계 독립성을 지키길 기대한다.
'상위 20%' 세계에선 언어마저 사라진 이들, '하위 20%' 투명인간들은 통계상 숫자로만 존재한다. 통계마저 이들을 외면한 세상이라면, '적폐 천하'와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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