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림(22) 씨는 일찍이 자신의 꿈을 포기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무대 공연으로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다. 꿈이 확고해 중학교 때부터 입시를 준비했고, 단번에 이름난 예술대 실용음악과에 합격했다. 입학과 동시에 보컬 연습에 매진했으나, 1년도 되지 않아 학교를 떠났다. 그의 목소리와 재능을 좋아하던 친구들이 아쉬워해도 세림 씨의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림 씨가 꿈을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자해 흉터'다. 학업과 가정환경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할 때면 왼쪽 팔을 긋곤 했다. 학창 시절 내내 새긴 고통의 흔적은 성인이 돼서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무대에 서면 관객들이 그 흔적을 볼 테고, 많은 이들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질 게 뻔했다. 세림 씨는 자신의 흔적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자신이나, 편견에 맞설 용기가 없었다. 아티스트를 포기하고 창업을 꿈꾸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림 씨의 두려움은 허상이 아니다. 은채(23) 씨는 대학생 시절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다 매니저에게 자해 흉터를 들키고 곧장 해고당했다. 일자리를 잃은 것도 문제였지만, '나는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사람'이라는 자괴감이 더 큰 충격을 줬다. 큰 충격에 은채 씨는 해고 당일 자신의 팔에 또 한번 자괴감을 기록했다. 지금도 일자리를 구할 때면 자해 흉터를 들킬까, 부정적인 시선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이처럼 대다수 자해 경험자가 타인에게 자해 흉터를 들키면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2020년 국제 학술지 '정신의학 연구 저널(Journal of Psychiatric Research)'에 발표된 논문 <비자살적 자해 흉터를 자신과 타인에게 숨기는 현상(Nonsuicidal self-injury scar concealment from the self and others)>을 보면, 연구에 참여한 자해 경험자 10명 중 8명가량(79.5%)이 자신의 흉터를 다른 사람들에게 숨긴 적 있다고 답했다.
이는 근거 있는 두려움이다. 같은 논문에 담긴 선행연구에서는 자해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자해 흉터를 가진 사람을 의도치 않은 흉터, 문신 등을 가진 사람에 비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조사됐다. 자해 미경험자들이 자해 흉터를 가진 사람과 친구가 되거나, 그를 직원으로 채용하거나, 연애·성적 관계를 시작하는 등의 교류를 고려할 가능성도 현저히 낮았다. 연구팀은 이런 시선이 자해 경험자로 하여금 낙인을 체화하고 자신을 비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자해 경험자들은 흉터를 가리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쓴다. 긴팔을 입거나 팔토시를 착용하는 게 가장 흔하고, 타투로 가리는 일도 많다. 윤서(24) 씨의 경우 가장 자해 흉터가 많은 왼쪽 팔 전반에 타투를 새겼다. 시술에 120만 원이나 들었고 큰 타투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도 곱지 않지만, 자해 흉터에 비하면 외관이나 사회적 인식상 낫기에 만족하고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흉터 치료지만, 높은 비용 탓에 선뜻 접근하기 어렵다. 장기간 자해로 흉터가 깊고 많은 경우 치료비로 수백만 원을 지출해야 한다. 이에 경기, 충남 논산 등 지방자치단체와 울산시교육청 등 시교육청 일부가 흉터 제거에 필요한 치료비를 일부 지원하고 있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학교 담당자의 추천을 받아오라거나 가구 소득이 일정액 이하여야 하는 등 문턱이 높다.
이 문제를 풀고자 발 벗고 나선 어른들이 있다. 여성 청소년 건강지원단 '나는봄' 이야기다.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이 모여 지난해 서울 마포구 신촌에 터를 잡고 위기에 빠진 소녀들의 건강 회복을 도와 온 단체다. 이들은 올해 초부터 한 병원과 협약을 맺고 자해 흉터 무료 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선생님·부모 등 보호자 동의가 없어도 되고, 가구소득도 따지지 않았다. 미성년자의 경우 의료법상 자해 흉터 치료에 들어가기 전 양육자 동의를 구해야 하지만, 학교와 소득, 서류 작업 등 장벽 대부분이 사라진 만큼 지자체 지원과 비교해 높은 접근성을 보인다.
문턱을 낮추자 전국의 자해 경험 청소년이 찾아왔다. 지난 5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치료 프로그램을 안내했을 땐 한 달 만에 162명이 신청할 정도였다. 예상치 못한 호응에 나는봄도 병원도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그러나 '이만큼 흉터 치료가 절실한 아이들이 많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신청자를 모집·치료했다. 지난 9월까지 모집한 신청자는 총 264명, 오직 흉터 치료만을 위해 서울에 오는 비수도권 신청자는 32명에 달한다.
나는봄이 흉터 치료와 함께 실시한 설문조사는 자해 경험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명확히 드러낸다. 조사에 응한 232명에게 '자해 흉터로 가장 힘든 경험이 무엇인가' 묻자 78.4%(182명)가 '사람들의 시선과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답했다. 이어 '여름옷·수영장 등 일상생활이 제한받는다'(78%), '수치심과 자책감이 든다'(56.9%), '취업과 아르바이트에서 어려움을 겪는다'(45.3%), '자해 충동이 반복적으로 든다'(30.6%) 순이었다.
병원 및 기관을 이용할 때 겪은 현실적 장벽을 묻자 4명 중 3명(77.7%)은 '의료비·검사비 부담으로 치료를 미루거나 포기했다'고 답했다. 가장 보장받고 싶은 권리로는 '자해나 성건강 등 예민한 고민을 비난받지 않고 상담하는 것'(43.7%), '일회성 치료를 넘어 지속적으로 케어받는 것'(29.3%) 순으로 많았다. 흉터 치료를 통해 바라는 변화로는 '타인의 시선·질문·낙인에서 벗어나기', '자신감·자존감 회복', '일상 회복·평범한 삶·새 출발' 등의 응답이 나왔다.
나는봄에서 위기 여성 청소년들을 돕고 있는 사회복지사 이가희 씨는 자해 흉터 치료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만 해도 걱정이 앞섰다. 당사자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백만 원이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게 적절한 지원인지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그램을 운영할수록 생각이 바뀌었다. 가정이나 학교, 심지어는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위기 상황을 발굴하고 개입하는 데 흉터 치료가 매우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프레시안>에 "자해 경험 여성 청소년들을 도우면서 '취약함에 대한 고정관념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문턱이 될 수 있구나'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해 흉터를 치료해 달라며 나는봄을 찾은 여성 청소년 중에는 겉으로 보기에 활발하거나 가정형편이 나쁘지 않는 등 위기를 겪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흉터 치료를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숨겨진 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흉터 치료 프로그램이 가려진 위기 청소년을 발굴해 내는 수단으로 작동한 셈이다.
이 씨는 국가가 흉터 제거에 적극 개입해 위기 청소년을 발굴하고 회복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자해 흉터 치료 지원체계는 지자체마다 방식과 치료비 한도가 달라 청소년들에게 와 닿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건강보험 적용 등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을 통해 누구나 쉽게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어 "궁극적으로는 위기 청소년 입장에서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는 지원기관이 곳곳에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④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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