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몇 마리로 낸 평화수업료
1793년 영국 글로스터셔의 농가에서 열두 남매 중 넷째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부였고 집안은 퀘이커였다. 젊은 조지프 스터지(Joseph Sturge, 1793–1859)는 민병대복무를 거부했다가 벌금 대신 양을 빼앗겼다. 양심의 값을 양으로 치른 셈이니, 평생 이어질 거래의 첫 장부였다. 1822년 버밍엄으로 옮겨 형제와 곡물수입상을 차렸는데, 장사가 잘되어 영국에서 손꼽는 큰 상사가 되었다. 철도회사 이사까지 맡았고 돈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돈이 쌓일수록 잠을 못 이뤘다. 보통 부자는 그럴 때 세무사를 찾는데 스터지는 양심을 찾았다. 맥아와 보리가 술 빚는 데 쓰인다는 걸 알고는 그 사업을 통째로 접었다. 알짜 장사를 제 손으로 걷어찬 것이다. 곡식장수가 술꾼의 간을 이렇게까지 걱정한 일은 전에도 후에도 드물다.
이름표만 바꿔 단 노예제를 현장에서 뜯어보다
1833년 영국의회가 노예제 폐지법을 통과시켰다. 박수치기엔 일렀다. 정부는 노예소유주에게 2천만 파운드를 보상했고, 노예였던 이들에게는 '도제'라는 이름으로 수년간 무급노동을 더 시켰다. 피해자는 공짜로 일하고 가해자는 보상금을 받으니, 도둑에게 수고비를 얹어준 꼴이다.
스터지는 말로만 싸우지 않았다. 1836년부터 이듬해까지 서인도제도를 직접 돌며 도제제의 실상을 눈으로 확인하고 『1837년의 서인도 제도』를 펴냈다. 하원위원회에서 증언하고 영국 곳곳을 돌며 지지를 모은 끝에, 1838년 도제제가 막을 내렸다. 누이 소피아 스터지(Sophia Sturge, 1795–1845)도 즉각 해방을 외친 한편이었다. 1839년에는 동료들과 영국·해외 반노예제협회를 세웠고, 1840년 런던에서 세계 반노예제 대회를 열었다. 1841년에는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John Greenleaf Whittier, 1807–1892)와 미국을 다니며 노예제의 참상을 살폈다.
자메이카에는 학교와 해방노예의 자유마을을 세울 돈을 보냈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 몬세라트(Montserrat)에서는 땅을 사서 자유로운 노동으로도 농사가 수지맞는다는 걸 몸소 증명했다. 남의 노동으로 먹고사는 게 경제 상식이던 시절에, 품삯을 주고도 남는다는 걸 장부로 보여준 것이다.
이길 수 없던 선거, 이긴 주장
정치에도 뛰어들었다. 1841년에는 성인남성 모두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완전선거연합'을 만들었다. 노동자 중심의 차티스트 운동 지도자 피어거스 오코너(Feargus O'Connor, 1796–1855)와 손잡으려 했으나 1842년 12월 회의는 결렬되었다. 쟁점은 '차티스트'라는 이름을 버리느냐 마느냐였다. 목표는 같은데 간판을 두고 다투다 판을 깬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스터지는 1842년 노팅엄, 1844년 버밍엄, 1847년 리즈 선거에 나섰지만 내리 떨어졌다. 존경은 받았으나 인기는 없었다는 평이다. 옳은 말만 하는 사람이 표를 못 얻는 건 만국공통의 법칙인가 보다. 그래도 보통선거는 끝내 현실이 되었다. 낙선자의 주장이 당선자의 공약보다 오래 산 셈이다.
전쟁을 말리러 다닌 사람
1840년대 후반부터 스터지는 시민이 직접 나서는 '민간외교'로 전쟁을 막자고 했다. 브뤼셀, 파리, 프랑크푸르트, 런던, 맨체스터, 에든버러의 평화대회가 그의 도움으로 열렸다. 1850년에는 코펜하겐 등을 찾아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분쟁을 중재에 맡기자고 설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54년에는 퀘이커 대표단을 이끌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Nicholas I, 1796–1855)를 만나러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갔다. 크림전쟁을 말리려던 이 걸음도 실패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진 뒤에는 영국함대에 부서진 핀란드의 굶주린 이들을 돕는 구호를 마련했다. 말리지 못하면 뒷수습이라도 하겠다는 고집이다. 1850년대에는 아편무역을 반대하는 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는 1859년에 세상을 떠나 버밍엄의 불 거리(Bull Street) 퀘이커 모임집 뒤뜰에 묻혔다.
오늘 한국에서 곱씹을 것들
첫째, 이름만 바꾼 청산을 경계해야 한다. 가해자는 보상받고 피해자는 '도제'가 되는 구도는 낯설지 않다. 친일청산이 반민특위의 좌절로 흐지부지된 일, 국가폭력 피해자의 배상이 오래 미뤄진 일이 그렇다.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이후에도 책임자를 가리고 피해를 회복하는 일이 말뿐인 개혁으로 끝나지 않게 지켜봐야 한다.
둘째, 현장에 가서 기록하는 힘이다. 스터지는 소문 대신 직접 보고 책으로 남겼다. 시민이 기금을 모아 가해자의 이름을 기록하는 『반헌법행위자열전』 작업이 바로 이 계보에 선다. 기록은 느리지만 거짓말보다 오래 간다.
셋째, 간판싸움을 멈추는 일이다. 완전선거연합은 이름 하나 때문에 갈라섰다. 한국의 개혁진영도 목표는 같으면서 지분과 명분을 두고 싸우다 연대가 깨지곤 한다. 이름은 양보하고 목표는 지키는 기술이 필요하다.
넷째, 민간의 평화노력이다. 남북적대가 깊어져 정부사이 길이 막힌 때일수록 민간교류와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중재가 실패해도 핀란드 구호처럼 뒷수습은 할 수 있다.
다섯째, 인기와 옳음은 다른 장부라는 점이다. 스터지는 세 번 떨어졌지만 그의 의제는 이겼다. 여론조사의 오차범위 안에서 소신을 접는 정치인이 있다면 이 곡식장수의 장부를 한번 들춰볼 일이다.
양을 빼앗기고, 장사를 접고, 선거에서 지고, 전쟁도 못 말렸던 사람이 역사에는 이겼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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