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길고양이가 많고, 그만큼 고양이를 챙기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캣맘'이라 부르기도 쑥스러울 정도지만, 언제든 이웃 같은 길고양이를 마주치면 주려고 가방에 간식과 사료를 챙겨 다닌다.
얼마 전, 가장 자주 마주치던 '노랑이'가 종합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랑이를 챙기시던 할머니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누가 노랑이를 힘껏 걷어찼나 봐. 동네 병원에서는 손도 못 댈 만큼 크게 다쳐서 종합병원으로 옮겼어. 의사도 사람 발에 맞아서 생긴 부상이 맞는 것 같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내가 "어떤 놈인지 찾아내면 절대로 그냥 두지 않겠다"며 씩씩거리자, 할머니가 씁쓸하게 덧붙이셨다.
"요즘 들어 고양이 싫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 같아. 내가 오래 길냥이들을 돌보고 있는데 요즘 분위기가 좀 이상한 것 같아. 대체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
새 때문에 고양이를 혐오한다는 주장
최근 이러한 고양이 혐오 여론이 점점 더 힘을 얻는 모양새다. 스스로를 '새덕후'라 칭하며, 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고양이를 '털바퀴'라 부르고 혐오하는 이들이 대표적이다. 느닷없이 바퀴벌레까지 끌어들여 멸칭을 만드는 것도 맥락이 없거니와, 새를 보호하기 위해 고양이를 혐오한다는 논리 역시 허술하기 짝이 없다.
고양이는 사냥 본능에 따라 곤충이나 새를 공격하곤 한다. 이를 빌미로 일각에서는 고양이의 본능적 행위를 문제 삼아, 새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길고양이를 온갖 방식으로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고양이뿐만 아니라 이들을 돌보는 캣맘들까지 '생태계 교란의 주범'으로 몰며 응징하려 든다. 그 과정에서 "고양이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걷어차겠다"와 같은 잔혹한 가해 폭언을 서슴지 않는 등 이들이 쏟아내는 혐오의 언어는 충격적이고 끔찍한 수준이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가 이미 인간의 문명으로 완성된 공간임을 간과하고 있다. 도시는 철저히 인간 중심으로 재편된 문명의 산물이다. 고양이를 돌보는 행위를 두고 '생태계를 교란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도시라는 공간의 본질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주장이다. 또한 인간주거지와 숲 등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길고양이의 경계 동물이자 도시동물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주장이다.
고양이를 돌보는 이들의 대부분 중장년 남성이었다면
길고양이를 돌보는 이를 칭하는 대명사가 '캣맘'인 것에서 알 수 있듯, 돌봄 노동의 주체는 주로 여성이다. 만약 이 일을 중장년 남성들이 주도했다면 사회적 반응은 어땠을까. 남성 비율이 높은 '낚시'를 보면 그 차이가 명확해진다. 낚시꾼들은 유희를 위해 생미끼로 수질을 오염시키고, 바늘에 아가미가 찢긴 물고기를 다시 방류하거나, 매년 약 5만 톤에 달하는 쓰레기를 방치해 심각한 환경 문제를 일으킨다. 낚시 행위 자체를 악마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낚시나 조류 관찰, 길고양이 돌봄은 모두 인간 중심적 활동이라는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도심을 허물고 대자연의 먹이사슬로 돌아가지 않는 한, 어느 한쪽만 완벽히 무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유독 길고양이와 돌봄 주체에게만 가혹한 언어가 쏟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남성과 가정을 돌봐야 할 여성'이 그 돌봄의 대상을 고양이로 옮겨간 것으로 판단하며 생기는 사회적 반발심이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엔 여성의 돌봄 활동을 남성이 제압할 수 있다는 성별화된 통제심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연약한 존재를 품고 그 존재 자체로 기쁨을 느끼는 태도에 질투를 노출하는 모습은 씁쓸하기까지 하다.
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고양이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문명화된 도시 속에서 고양이도, 새도 결국 인간의 영향 아래 놓인 연약한 생명들이다. 혐오의 언어를 거두고, 공존을 위한 가치 있는 사랑을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 실천을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덕후의 진정한 덕목인 '사랑'을 제대로 배우길
고양이와 캣맘들을 향해 쏟아내는 혐오의 언어는 결코 새를 향한 사랑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사랑은 타자를 배척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생명을 온전히 지켜내는 실천에서 증명되는 법이니까. '새덕후'를 자처하는 이들이 부디 증오를 거두고 진정한 사랑을 배우길 바라며, 몇 가지 실천 매뉴얼을 제안해본다.
하나, 새만금 수라갯벌 지키기 : 수십만 마리 철새들의 마지막 안식처를 파괴하는 신공항 등 대규모 토목사업 반대 운동에 함께하는 것.
하나, 도심 속 죽음에 관심 갖기 : 매년 투명한 유리벽에 부딪히고 인공조명에 방향을 잃어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800만 마리의 새들을 돌아보는 것.
하나, 창틀에 충돌 방지 스티커 붙이기 : 말뿐인 애정 대신, 지금 당장 통창에 새들의 충돌을 막아줄 5×10 규칙 스티커를 붙여 생명을 구하는 것.
하나, 가장 가까운 이웃, 비둘기 보호 : 유해 조수라는 낙인 뒤에 숨은 비둘기에 대한 혐오성 발언을 멈추고 공존을 고민하는 것.
사랑도 주고받는 연습을 거듭할수록 넓어진다. 위에 제시한 내용대로 연습을 거듭하다보면 언젠가는 작고 약한 존재를 아끼고 품어주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리라 믿는다. 질투와 열등감 그리고 혐오로 강팍해진 새덕후에게도 사랑의 마음이 깃들길, 모쪼록 사랑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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