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정부의 위신은 뭐가 되오?" 증거 없어도 기소하라는 검찰 수장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정부의 위신은 뭐가 되오?" 증거 없어도 기소하라는 검찰 수장

[기고] 영국에서 읽는 『반헌법행위자열전』: 인혁당 기소를 강행한 서주연

검사들의 항명을 받고도 1차 인혁당 기소를 강행한 서울지검장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3권을 펼쳤다. 서주연(徐柱演, 1920~1979) 항목을 읽다가 한 문장에서 멈췄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담당 검사 이용훈이 "증거가 번연히 없어 검사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고 보고하자 서울지검장 서주연이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위신은 뭐가 되고, 정보부의 위신은 또 어떻게 된단 말이오? 학생들의 데모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지 해보아야 할 것이 아니오?"

이 말이 이 글의 핵심이다. "정부의 위신." 검사가 기소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증거와 법이 아니라 정부의 위신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서울지검장 서주연이 공개적으로 말했다는 것.

1920년 출생, 월남 후 검사로 변신한 이북 출신 법조인

서주연은 1920년 이북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월남해 검사로 임용됐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지검 검사로 재직하면서 부산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자들의 집단처형에 관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쟁 중 법무체계의 공백 속에서 이루어진 이 처형들은 나중에 '부산정치파동과 서민호 의원 사건' 때도 그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그가 검찰의 정치도구화에 얼마나 깊이 연루됐는지를 보여준다.

서주연은 3·15부정선거 당시 서울지검장이었다. 부정선거가 드러나면서 검찰수뇌부에 인책요구가 쏟아지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그는 부산지검장으로 좌천됐다.

세계사 속의 동류, '위신을 위해 법을 구부린' 검사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구조의 인물이 떠오른다. 소련의 안드레이 비신스키(Andrey Vyshinsky, 1883~1954)다. 스탈린(1878~1953) 대숙청 재판을 총지휘하며 "국가의 위신을 위해" 이미 결론이 정해진 기소를 밀어붙였다. 그의 논리와 서주연의 논리는 구조적으로 같다.

"정부의 위신을 위해 어떻게든지 해 보아야 한다."

미국의 J.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 1895~1972) FBI 국장도 비슷하다. 공산주의자 색출이라는 명목아래 증거가 불충분해도 기소를 밀어붙이는 문화를 만든 인물이다. 서주연은 이들과 비교하면 작은 규모의 역할을 했지만, 구조는 같았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항명한 검사들, 굴복한 검사들

서주연의 반헌법 행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다. 배경은 이렇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전국을 달구던 1964년, 박정희(1917~1979) 정권은 이를 잠재우기 위한 카드가 필요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1923~1979)은 "북괴의 지령을 받아 학생 데모를 제2의 4·19사태로 발전시켜 현 정권을 타도하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반국가단체 인민혁명당"을 발표했다.

사건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이용훈에게 배당됐다. 이용훈은 26명의 피의자를 검토한 뒤 "증거가 번연히 없어 검사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고 서울지검장 서주연에게 보고했다. 공안부 검사 세 명 모두 기소를 거부하며 사표를 제출했다. 검찰 역사상 공안부 검사들이 집단 항명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때 서주연이 한 말이 바로 저 유명한 문장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위신은 뭐가 되고, 정보부의 위신은 또 어떻게 된단 말이오?"

그리고 서울지검 형사3부 검사 정명래를 긴급 투입해 피의자 26명 전원을 기소하게 했다. 검사 발령 후 7년간 지방에서 맴돌다 서울로 발령받은 지 4개월 만의 정명래에게 이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후 장면이 흥미롭다. 대법원장 민복기(1913~2007)는 기자회견에서 서주연이 사의를 표했느냐는 질문에 "통솔자의 도의적인 문제"라고 자진사퇴가 필요하다는 투로 답변했다. 이를 전해들은 서주연은 퉁명스럽게 "늙으면 그만두겠다"라고 반발했다. 사표를 쓴 것은 항명한 검사들이었는데, 정작 기소를 강요한 지검장은 버텼다. 결국 서주연은 인혁당 피의자들에 대한 공소장 내용이 변경되던 날 서울지검장에서 경질됐다.

기소를 강요당한 정명래의 운명, 그리고 역사의 아이러니

1차 인혁당 사건에서 서주연의 명령으로 기소를 맡은 정명래는 어떻게 됐는가. 훗날 그는 이 일을 평생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기소를 거부해 사표를 쓴 공안부 검사 이용훈은 재야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79년 법무부차관에 발탁됐다. 양심을 지킨 사람이 결국 더 높은 자리에 올랐다. 역사의 작은 정의였다.

1차 인혁당 사건에서 기소된 피의자들 가운데 14명은 공소가 취하됐고 나머지 12명은 당초 국가보안법 위반에서 반공법 찬양·고무로 죄목이 줄어들어 실형을 면했다. 증거도 없이 "정부의 위신"을 위해 강행한 기소는 결국 흐지부지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훗날 더 끔찍한 2차 인혁당재건위 사건(1974년)의 선례가 됐다. 1차에서 명단에 올랐던 사람들이 10년 뒤 다시 잡혀가 사형대에 올랐다.

3·15부정선거와 서주연, 이승만 독재의 검찰 실무자

서주연의 반헌법 행위는 인혁당 사건에 앞서 3·15부정선거(1960년)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서울지검장으로서 그는 이승만(1875~1965) 정권의 부정선거에 검찰이 눈을 감는 환경을 조성했다.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경찰의 총격을 받아 사망자가 속출했을 때도 검찰은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않았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검찰수뇌부에 인책요구가 쏟아졌고, 서주연도 그 대상에 포함됐다.

이처럼 서주연의 이력은 이승만 정권에서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권위주의 체제에서 검찰이 어떻게 권력의 도구로 기능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검사가 "정부의 위신을 위해 어떻게든지 해보아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의회청문회, 검찰청장 해임요구, 언론의 집중보도가 이어졌을 것이다. 영국의 검사 독립 원칙(Director of Public Prosecutions Independence)은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기소결정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다.

한국에서 서주연은 "늙으면 그만두겠다"고 버티다 결국 경질됐다. 그리고 1979년 사망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 8명이 처형되던 1975년에도 "아직 늙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1964년 서주연의 그 말을 떠올렸다.

"정부의 위신은 뭐가 되오?"

이 문장이 60년을 건너 다른 방식으로 귀환한 것이 아닌지를.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서주연 ⓒ반헌법행위자열전 제공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