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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적 불의에 맞선 철물상, 토마스 개럿이 21세기에 던지는 '신발 한 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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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적 불의에 맞선 철물상, 토마스 개럿이 21세기에 던지는 '신발 한 켤레'

[인물로 본 세계사] 노예해방운동을 도운 백인 조력자, 파산도 협박도 그를 멈추지 못했다

역사에는 기이한 법칙이 하나 있다. 대개 이기는 쪽이 기록을 독점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겉으로는 처참하게 패배한 듯 보였으나 실상 시대를 이기고 있었던 인물의 이야기가 살아남아 후대의 가슴을 친다. 19세기 미국, 노예제라는 거대한 악에 맞서 자신의 전 재산과 안위를 기꺼이 던졌던 철물상, 토마스 개럿(Thomas Garrett, 1789~1871)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철물장수 퀘이커교도, 노예제의 악몽이 되다

토마스 개럿은 178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어퍼 다비에서 태어나 1871년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직업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철물상이었다. 쇳덩어리를 사고파는 상인의 이력은 지루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지독하고 집요한 노예해방 운동가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사건은 1813년, 그의 나이 스물넷 때 발생했다. 가족의 집에서 일하던 자유 신분의 흑인여성이 노예상인들에게 납치되어 남부로 팔려 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개럿은 즉시 추격에 나서 그녀를 구출해냈고, 그날 이후 평생을 흑인권리 옹호에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오늘날로 치면 '인생을 바꾼 한 사건'이었으나, 19세기 미국사회에서 이 결심은 목숨과 재산을 통째로 거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1822년, 그는 델라웨어주 윌밍턴으로 이주했다. 이 도시는 지리적으로 노예주인 남부와 자유 주 북부사이의 경계선이었다. 이 선택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집은 곧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의 가장 중요한 종착역이 되었다. 지하철도는 실제 기차가 아닌, 노예들의 북부탈출을 돕는 비밀조직망을 뜻했다. 개럿은 이 망에서 가장 신뢰받는 '역장'으로 40년 넘게 활동하며 2,700여 명의 탈출노예를 자유의 땅으로 인도했다.

해리엇 터브먼과의 동맹, 어둠 속의 유쾌한 저항

개럿의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이다. 스스로 노예 신분을 탈출한 뒤 수십 차례 남부로 잠입해 수백 명을 탈출시킨 터브먼에게 개럿은 든든한 보급 창고이자 스폰서였다. 개럿은 그녀에게 숙식과 자금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험로를 걷는 탈출자들을 위해 항상 새 신발을 준비해두었다.

한번은 윌밍턴 다리에 경찰 감시초소가 세워져 탈출이 불가능해진 적이 있었다. 이때 개럿의 기지가 빛났다. 그는 벽돌공 무리를 고용해 두 대의 마차에 나눠 타고 나가게 한 뒤, 도시 외곽에서 터브먼과 노예들을 마차 바닥에 숨기고 담요와 공구로 덮어 초소를 유유히 통과했다. 노예제라는 거악에 맞서는 그의 방식은 이토록 영리하고 유쾌했다. 그는 투사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재간꾼이었다.

1848년의 법정, 파산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은 용기

개럿 이야기의 절정은 1848년 연방법정이다. 노예가족의 탈출을 도운 혐의로 기소된 그는 당시 보수적 법 해석의 상징이었던 로저 태니 대법원장 앞에 섰다. 재판결과는 가혹했다. 법원은 그에게 전 재산을 몰수하는 수준의 엄청난 벌금을 선고했다. 쉰여덟의 나이에 일궈온 모든 경제적 기반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판결 직후 재판장은 개럿에게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훈계했다. 그러나 개럿의 대답은 역사의 전설이 되었다.

"판사님, 당신이 내 돈을 다 가져가셨군요. 하지만 이 법정에 계신 모든 분께 말씀드립니다. 도망치는 노예가 있어 은신처와 친구가 필요하다면, 토마스 개럿에게 보내십시오. 그를 친구로 맞겠습니다."

이 선언은 법정 안을 뒤흔들었다. 협박에 굴복하기는커녕, 협박을 발판 삼아 자신의 신념을 더 크게 외친 것이다. 당시 남부출신의 노예소유주였던 배심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개럿과 악수를 나누며 사과했다는 일화는, 진정한 용기가 적마저 감화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다.

마흔 살의 마음으로 다시 시작한 일흔의 노병

파산 이후 개럿은 사실상 빈털터리가 되었으나 체념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철물장사를 시작해 재산을 회복했고, 그 돈을 다시 노예탈출 지원에 쏟아 부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1865년 노예제폐지를 명시한 수정헌법 제13조가 통과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일흔 여섯이었다. 그는 평생의 목표를 이뤘음에도 "3,000명을 채우지 못하고 2,700명에서 멈췄다"며 아쉬워했다.

1870년 흑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수정헌법 제15조가 통과되자, 윌밍턴 거리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흑인주민들은 개럿을 어깨에 메고 행진하며 그를 '우리의 모세'라고 불렀다. 이듬해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흑인이 모였고, 그의 관은 해방된 흑인들의 어깨 위에 실려 묘지까지 운반되었다.

잊힌 백인 조력자, 그러나 영원한 인간의 양심

토마스 개럿은 한동안 역사교육에서 소외되었다. 노예해방운동이 흑인중심의 서사로 정리되는 과정에서 백인조력자의 존재가 다소 불편하게 여겨지거나, 그가 정치가나 군인이 아닌 평범한 상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 속 인물인 '사이먼 핼리데이'를 통해 개럿의 정신을 문학 속에 박제했다.

한국사회에서 토마스 개럿을 호출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는 '합법적 불의'에 대한 저항이다. 법이 곧 정의가 아닐 때, 인간의 양심은 실정법보다 높은 곳에 있어야 함을 그는 보여주었다. 둘째는 '경계에서의 연대'다. 그는 안전한 북쪽이 아니라 위험한 경계선인 델라웨어에 살며 몸으로 부딪쳤다. 셋째는 생존을 담보로 한 협박 앞에서의 태도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침묵을 선택하는 이 시대에, 파산한 채로 더 크게 정의를 외친 그의 모습은 아름다운 충격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백인 퀘이커교도였으나 흑인 여성 터브먼과 완벽한 동맹을 맺었다. 계급과 성별, 인종을 넘어서는 연대가 얼마나 강력한 세상을 만드는지를 증명했다.

토마스 개럿은 거창한 이론가가 아니었다. 배고픈 자를 먹이고, 신발 없는 자에게 신발을 내어주며, 법이 틀렸을 때 주저 없이 법을 어긴 실천가였다. 역사는 개럿 같은 사람들이 건넨 신발 한 켤레 덕분에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를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 미담의 감상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변에 숨겨주어야 할 사람이 있는지, 그리고 그를 위해 나의 기득권을 포기할 용기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다.

▲토마스 개럿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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