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 행정부가 유럽연합(EU)의 대폭적인 국방비 인상 요구에 이어 아시아의 동맹국들을 향해서도 같은 요구를 내놨다.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은 5월 31일(현지시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 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 연설에서 "우리는 중국의 침략 억제를 중심으로 전략을 전환하고 있다"며 아시아 동맹국들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수준으로 국방비를 늘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는 오는 4일 출범할 한국 정부에도 심각한 도전이 될 것이다. 미국에서 기존에 언급되어온 주한미군 주둔비(방위비 분담금) 인상과 역할 변경(전략적 유연성), 그리고 감축 문제에 이어 한국의 국방비 증액 문제가 한미동맹의 중요 이슈로 부상할 것임을 예고해주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선 한국을 비롯한 동맹들이 국방비를 대폭 증액하면, 중국 봉쇄에 힘을 결집할 수 있고 미국제 무기 판매도 크게 늘릴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아시아 동맹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이미 국방비 60조 원을 돌파한 한국이 이를 대폭 증액하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장 걱정거리는 이미 빨간불이 켜진 경제와 민생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이다. 또 남북간 군비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회복해야 할 한중관계의 부담도 가중된다. 무엇보다도 미국 주도하에 동맹 결속과 대대적인 군비증강이 이뤄지면, 북러간의 군사협력 강화와 북중러 결속의 빌미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에 '노(No)'라고 말하면서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방비부터 비교할 필요가 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24년 중국의 국방비는 3,140억 달러로 GDP 대비로는 1.7%였다. 이에 반해 미국과 미국의 아시아 동맹인 한국·일본·호주·대만·필리핀의 국방비 합계는 1조1,087억 달러로 중국의 약 3.74배에 달했다. 특히 아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은 GDP 대비 2.6%로 다른 동맹에 비해 국방비를 많이 부담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미국 및 동맹의 국방비가 부족해서 대만 해협 등 동아시아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아시아 동맹이 국방비를 대폭 인상하면 중국의 반작용을 야기해 군비경쟁과 안보딜레마가 더욱 격화될 것임을 예고해준다.
물론 중국의 국방비 증액과 군사력 현대화를 비판할 수는 있다. 중국은 지난 35년간 연평균 8%에 육박할 정도로 급격하게 국방비를 증액해왔고, 이것이 국제사회 전반에 '중국위협론'의 근거로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동시에 중국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제 눈의 들보'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군비경쟁과 군사적 긴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더 나은 안보'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한국 정부의 과제는 산적해 있지만, 동아시아 차원의 군비통제 방안도 그 주요한 목록에 올려놓을 필요가 있다. 군비경쟁과 군사적 긴장이 격화할수록 평화와 안보는 위기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고 민생과 경제 회복, 그리고 기후위기 대응에 쓰여야 할 소중한 재원의 낭비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조만간 열릴 것으로 보이는 한미정상회담과 10월말 경주에서 개최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한미정상회담에선 "피스메이커"와 '군축 제안자'가 되겠다던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과 동아시아 군비경쟁의 격화가 초래할 위험을 설명하면서 동아시아 군비통제를 한미, 혹은 한미일의 주요 의제로 삼자고 제안할 필요가 있다. 또 이 문제를 APEC 회담의 주요 의제로 삼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미간에 의견과 갈등이 불거질 수는 있다. 또 중국 등 다른 나라들이 호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군비통제의 의제화는 군비경쟁의 지연과 조율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강대국의 요구와 입장에 수동적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모두의 이익과 안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의제를 발굴해 이를 공론화할 수 있는 '능동적 대한민국'으로 거듭나야 할 때이다.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최근 신간 <달라진 김정은, 돌아온 트럼프>를 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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