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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막다 숨진 수문관리원, 그날 엄마는 '왜' 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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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막다 숨진 수문관리원, 그날 엄마는 '왜' 사라졌나

[엄마가 사라졌다] 폭우가 쏟아진 밤, 엄마는 돌아오지 못했다

"형, 엄마가 돌아오지 않아. 형, 엄마가 안 와."

밤 11시가 넘었을까. 퇴근 후 거실에서 누워 '이제 씻고 자러 갈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휴대전화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아보니 동생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엄마가, 사라졌단다. 창밖엔 비가 거침없이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던 그날 저녁,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한 차례 불길한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그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 많이 오니까 오늘 같은 날은 조심하셔야 해요."

그 말에 어머니는 분명히 '알겠다'고 했었는데. 동생의 울음 섞인 목소리 때문에, 저녁의 그 불길한 영상이 다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설마'가 맞았다. 엄마는 기어이 비를 뚫고 수문을 열러 나갔다. 그리고, 실종됐다.

엄마는 하천의 수문을 관리하는 감시원이다.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하천의 물이 넘쳐 농지를 침범하기 전에 엄마는 수문을 열려고 했을 터였다.

그 길로 서울에서 전남 함평까지 차를 몰았다. 엄마가 담당하는 엄다천 학야제수문 주변에는 경찰차, 소방차가 도착해 있었다. 웅성거리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아버지는 넋이 나가 있었다. 동생은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이틀 후 엄마가 발견됐다. 수문에서 1km 떨어진 하천에서, 시신으로.

"어머니가, 올해 폭우로 인한 첫 사망자래요. 동생과 저는, 엄마가 '처음 죽은 사람'이 아니었으면 그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긴 했을까, 종종 이야기합니다."

올해 장마가 앗아간 첫 생명. 그 사람이 바로 엄마였다.

수문은 엄마가 아닌 누구라도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날 밤, 엄마는 왜 사라졌을까. 무엇이 그를 다시는 형제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언제 다시 반복될지 모르는 폭우와 거센 물살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엄마가 마지막으로 서 있었던 수문 다리 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달리는 열차에서 편지를 쓴다. 어쩌면 전하지 못할 편지.

"지문철(가명, 75세) 선생님께. 우선, 이 편지를 받고 많이 놀라셨다면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제가 이렇게 펜을 든 이유는…."

지난 6월 말, 지문철 씨는 폭우에 아내 오혜선(가명, 67세) 씨를 잃었다. 여러 기자가 연락해왔지만 지 씨는 아내의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했다. 본지가 제3자를 통해 건넨 인터뷰 요청도 이미 거절한 뒤였다.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 용산역에서 출발한 KTX였다. 노랗게 익은 남도의 들판이 뒤쪽으로 빠르게 멀어져갔다. 다시 볼펜을 쥐고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열차는 어느새 광주 송정역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차로 전남 함평군으로 갈 예정이다. 최종 목적지는 함평군 엄다천 어딘가에 있다는 한 '수문'이다.

▲지난 6월 27일, 폭우가 내리던 밤에 전남 함평군 엄다천에 있는 학야 제수문을 살피러 나섰던 오혜선(가명) 씨가 실종됐다. 사진은 당시 수색대가 혜선 씨를 찾는 모습. ⓒ연합뉴스

농촌 지역에서는 논밭 주변 하천에서 수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농어촌공사는 수문을 관리하는 사람을 인근 마을 주민 중에서 선발한다. '수리시설 감시원(이하 수문 감시원)'이라 불리는 이들은 물 관리가 필요한 농번기에 농어촌공사와 도급계약을 맺고 수문 관리를 담당한다.

오혜선 씨는 농어촌공사와 도급계약을 맺고 엄다천에 있는 학야 제수문을 관리하는 감시원이었다. 지난 6월 27일, 함평엔 시간당 70mm가 넘는 폭우가 내렸다. 그날 밤 오혜선 씨는 하천이 넘쳐 논이 물에 잠기는 것을 막기 위해 수문을 살펴보러 나섰다가 실종됐다. 오혜선 씨는 이틀 후 약 1㎞ 떨어진 교각 아래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올해 장마 폭우 첫 사망자." 당시 언론에서는 혜선 씨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언론은 혜선 씨가 '수문 점검에 나섰다가 실종됐다'고 설명했다.

사고 발생 당시 농어촌공사는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수문 감시원을 근로자로 보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다. 때문에 혜선 씨의 죽음은 산업재해로 인정되지 못했다. 농어촌공사는 공식 사과도 하지 않았다. 안전 매뉴얼 개정 등 재발 방지 대책도 아직이다.

▲오혜선(가명) 씨의 장례식에 윤석열 대통령, 한국농어촌공사 사장 등은 근조 화환을 보냈다 ⓒ취재원 지현배(가명) 제공

여러 의문이 들었다. 혜선 씨는 어떤 순간에 급류에 휩쓸린 걸까. 수문에 추락방지 시설 등 안전장치는 없었던 걸까. 무엇보다 혜선 씨는 왜 '일하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까. 폭우는 올여름 한 번만 오고 마는 게 아니다. 앞으로도 이상 기후는 지속될 것이기에,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이 사건을 깊이 들여다봐야 했다.

현장에 가보고 싶었다. 언제나 진실의 단서는 현장에 있다. 그리고 지문철 씨를 만나고 싶었다. 지 씨는 오혜선 씨의 남편이자, 오혜선 씨가 사라지기 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다.

지난달 21일, 함평에 도착해서 든든한 지원군을 만났다. 지역활동가인 김영수 씨는 지문철 씨와 같은 동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고향 후배였다. 먼저 지문철 씨에게 인터뷰 요청을 전해준 이도 김영수 씨였다. 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는 호탕하고 구수했다.

"나(내)가 도와줄 수는 있지. 그 형님(지문철 씨)이, 인터뷰는 하기 싫다고 항께, 와서 현장이나 보소. 거까진 나가 데려가 줄 수 있응께."

김영수 씨의 안내를 따라 엄다천에 있는 학야제수문에 도착했다. 여섯 글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위험 접근금지."

농어촌공사는 수문 위 다리에 해당 팻말을 걸고 다가갈 수 없게 쇠사슬로 막아뒀다.

"수문이, 엄청 크네요." 기자가 말했다. 수문은 엄다천과 함평천이 합류해 물길이 확장되는 지점에 있어 규모가 컸다. 전체 길이가 20m는 돼 보였다. 적회색 돌로 이뤄진 교량이 하천을 가로질렀다. 교량을 따라 가로 폭 1.5m 이상의 수문 6개가 나란히 놓였다. 수문과 수문 사이는 위로 솟은 회색 벽이 연결했다.

▲ 한국농어촌공사는 사망 사고가 발생한 뒤에야 추락방지를 위해 난간을 설치하는 등 시설을 정비했다. 왼쪽은 구글 로드뷰로 확인할 수 있는 정비 전 모습이다. ⓒ셜록

팻말 다음으로 눈에 띄는 건 은빛 난간이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됐는지 반짝반짝 윤이 났다. 짙은 적녹색의 수문에는 세월의 흔적이 여실했기 때문에, 반짝거리는 난간은 더 눈에 띄었다.김영수 씨는 '오혜선 씨가 죽은 뒤에야' 농어촌공사에서 안전시설을 정비했다고 설명했다.

"이것(난간 등)들은 다 새로 생긴 것들이지. (사고) 전에는 이것이 다 없었다고. 다리만 있고, 이거 새로 다 한 거라고. 물이 다 넘어불잖어. 밤에 여길(다리를) 걸어간다고 생각해봐. 물은 찰랑찰랑 넘칠랑 말랑 하고 있는디, 응?"

'그날'의 오혜선 씨처럼 다리 한가운데 서보니 직감할 수 있었다. 여기는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걸.

바람이 많이 불어 머리카락이 얼굴을 휘감았다. 손수레 한 대 지나갈 정도 너비의 이 좁은 다리에서 넘어진다면, 바로 하천으로 고꾸라질 테다. 그때는 없던 난간이 지금은 있는데도 두려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몰아치는 비바람, 난간 없는 교량, 그리고 발밑에서 일렁이는 하천. 그날의 오혜선 씨는 이곳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오혜선(가명) 씨가 서 있었을 다리 위. 우측 아래에 수문이 있다. 사고 당일에 이 다리 위에는 난간이 없었다 ⓒ셜록

의문은 남았다. 혜선 씨를 물에 빠지게 한 결정적 요인은 무엇인가.

"선생님, 그런데 그때 여기서 (혜선 씨가) 발을 헛디딘 건가요?"

"헛디딘 게 아니고. 이제 여기 봐봐. 쓰레기가 걸려 있잖어."

김영수 씨가 가리킨 곳에는 수문 주변에 얽힌 수초 등 부유물이 보였다.

"수문을 열라 해도 저것들 때문에 문이 다 안 열린겨. 그래갖고 저런 것을 치다가(치우다가) 물이 확 덮치니까 넘어가서 뒤로 빠져버려 (돌아가신 것 같아)."

오혜선 씨가 수초를 치우려 한 까닭은 간단했다.

"수문이 완전히 열리지 않응께. 물이 확 (논을) 덮쳐불면 그해 농사 망치는 거지."

▲수초 등 부유물이 끼어 있는 학야 제수문의 모습 ⓒ셜록

수문 양 끝에는 2층으로 향하는 사다리가 보였다. 김영수 씨가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사고 이후 교체됐는지 새 것처럼 윤이 나는 사다리엔, 사람이 튕겨나가지 않도록 안전시설이 설치돼 있었다. 그래도 막상 오르려니 솔직히 무서웠다.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셨다 내뱉은 후, 기자도 사다리에 발을 올렸다.

발밑은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사다리 끝까지 올랐다. 제어장치 앞에 서 있는 김영수 씨가 보였다. 2층에는 수문 제어장치로 보이는 직사각형 형태의 알루미늄 상자가 6개가 있었다. 김 씨가 알루미늄 상자를 열었다. 손잡이가 달린 다홍색 제어장치에는 '자동', '중립', '수동'이라고 쓰여 있었다.

"수문을 조절하려면 늘 이렇게 사다리를 타야 하는 건가요?"

"그건 아녀. 근디 야(제어장치)를 '자동'으로 돌려놔야 버튼 하나로 수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제. 운전하듯이 이거(손잡이)를 돌려야 이게(수문이) 움직이는겨."

다시 지상으로 돌아와 수문을 좀 더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천천히 달려오던 파란 트럭이 멈추고 두 남자가 내렸다. 김영수 씨는 그 둘을 단번에 알아보고 악수를 나눴다. 김영수 씨가 두 남자에게 우리를 소개했다.

"서울서 온 기자들이여. 그 문철이 형님네 색시 얼마 전에 돌아갔잖어. 그거 취재하러 왔다네. 자네도 수문 감시원이지? 설명 좀 해줘 봐."

▲학야 제수문 2층에 있는 수문 제어기기 내부 ⓒ셜록

운전석에서 내린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남성이 말을 시작했다. 인근 지역에서 사는 그 역시 수문 감시원이었다.

"이게 평상시에는, 비 안 올 때는 농사지어야 되니까 수문을 닫아야 해. 물을 품어야 하니까. 근데 그때(사고 당시)처럼 비가 막 쏟아져갖고 여기가 막혔어, 그럼 그걸 빨리 물 나가게끔 할랑께(열려고 하니까) 그게 위험한 거야. 그때 주민들이 관리원한테 막 전화하는 거지. '비가 많이 오니까 얼른 수문을 열어라' 농민들이 막 군청에다도 전화하지."

비가 많이 오면 밤에도 수문을 열러 나와야 하냐고 물었다.

"그럼, 그러니까 위험하지. (사고 이후에) 이번에 농어촌공사에서 선물을 막 무지하게 주더라고. 여러 가지 줘부러. 하이바(안전모)에다 장화에다 구명조끼에다…. 뭐 안 준 것보다야는 낫지. 이번에 사고 나고, (농어촌공사에서) 비 올 때 나가지 말라대요? 근데 누가 하긴 해야 하잖아. (수문을 열러) 안 나가면 (주민들) 욕은 즈그들(농어촌공사)이 묵는 게 아닝께."

농어촌공사는 오혜선 씨의 사망 이후 인근 지역 수문 감시원들에게 안전 장비를 지급했다. 난간 설치와 안전모·구명조끼 지급, 이 같은 조치들이 지난 6월 전에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오혜선 씨가 죽고 나서야 그들의 눈에도 '위험'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교량을 따라 놓인 수문의 뒤편. 난간이 없을 때 교량에서 미끄러진다면 바로 하천으로 떨어질 수 있다. ⓒ셜록

취재진은 오혜선 씨가 살던 마을, 전남 함평군 엄다면 학야리로 향했다. 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들말'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문으로 '야리(野里)'라고 썼다. 이름처럼 마을은 온통 논밭이었다.

여기서 학야리 이장 지성옥(66세) 씨를 만났다. 그는 오혜선 씨의 실종을 최초로 신고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날 밤에, (지문철 씨가) 울면서 찾아왔더라고요. 아내랑 수문에 같이 나갔는데, (아내가) 없어졌다고. 그래서 제가 신고는 했냐고 물었더니, 얼마나 놀랐는지 (신고도) 못 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일단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사고 직후에는 (지문철 씨가) 기자들이 찾아와도 인터뷰 못 하겠다고 해서 제가 많이 했어요. 지금은 그때보다는 마음이 좀 누그러졌어요. 어제도 마을 사람들한테 아내 수색 도와주고 함께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음식을 대접했어요."

이장 지성옥 씨에게 박카스 한 상자와 아침에 열차에서 쓴 편지를 맡겼다.

"이장님, 지문철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시면 이것 좀 전해주세요."

지성옥 씨는 흔쾌히 편지를 전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이 말을 강조했다.

"너무 안타까워. (오혜선 씨는) 참 착하고 동네 으른들한테도 잘했어요."

지성옥 씨의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을회관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동네 주민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한 70대 여성은 꼭 쥔 주먹을 가슴에 대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혼자 사는 노인네들 한번씩 돌보러 오고. 찌개며 반찬이며 맨들어서 가져오고. 우리 집에도 자주 왔어. 나 챙기러. 사람이 얼마나 좋았는데요. 엄다면 사람들이 다 말해. 너무 짠하다고. 우덜(우리들)도 너무 안타까워서 아주 말도 못해. (오혜선 씨 전에) 우리 집안 시동생이 했어요. (수문) 감시 일을. 근데 우리 시동생이 할 때도 '거기 위험하니께 뭘(안전장치를) 해주라' 해도 잘 안 해줬어, 농어촌공사에서. 난간 새로 해주라고 해도 안 해주고 그랬다고, 우리 시동생이 그래."

TV 앞에 앉아 있던 다른 노인이 말을 거들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사람 죽고 나서 난간이며 조명이며 뭐며 새로 해놓으면 뭐대(뭐해)? 이미 사람은 죽었는디."

▲지성옥 이장이 사망 사고가 발생한 지난 6월 27일 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셜록

오혜선 씨가 숨지자 노동당국은 농어촌공사에 대해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대재해처벌법) 등을 적용할 수 있는지 검토에 들어갔다.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여부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은 '근로자 인정' 여부다.

이날 저녁 광주의 한 카페에서 만난 문길주 전남노동권익센터 센터장은 농어촌공사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문 감시원들이 누구의 통제를 받고, 누구의 지시를 받고 일하나요? 바로 농어촌공사입니다. 그러나 사고 이후 농어촌공사는 유가족에게 공식 사과도 하지 않고, 제대로 된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일하다 죽었으니 산재처리를 해야 되는데 그게 안 되고 있는 상황이죠. 전국에 수리시설 감시원이 7000명 정도 됩니다. 앞으로도 기후위기로 인해 폭우는 쏟아질 테고요. 농어촌공사는 앞으로도 그분들이 다치거나 돌아가시면 지금처럼 책임지지 않을 생각인지 묻고 싶습니다."

농어촌공사는 지난 7월 임직원을 대상으로 오혜선 씨 유가족에게 전달할 '성금'을 모금했다. 그러나 성금을 지급하기 전에 유가족 측에 합의안을 제시했다는 한국방송(KBS)의 보도가 나와 논란이 일었다. 합의안 내용은 "앞으로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 돈이 합의금이나 보상금이 아니라, '성금'의 형태로 지급됐는지도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농어촌공사 이름으로 된 정식 합의금 혹은 보상금이 아니잖아요. 한마디로 정식으론 책임지지 않겠다는 거죠."

KBS 보도가 있고 약 일주일 뒤 농어촌공사는 유가족에게 성금을 전달했다.

한국농어촌공사는 <진실탐사그룹 셜록>에 "돈을 통해 합의를 하려던 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농어촌공사 전남지역본부의 한 관계자는 지난 6일 <셜록>과의 통화에서 "성금은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모금한 것이고, 합의를 위해 전달을 미뤘다는 내용의 기사는 오보다. 굉장히 억울하다"고 말했다.

특히 공사 측은 '성금의 목적은 위로'라며 순수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공사가 성금을 전달하기에 앞서 "한국농어촌공사 및 공사임직원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며 향후 민·형사상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문구가 적힌 합의서(안)를 유가족에 전달한 것은 사실이다.

▲오혜선(가명) 씨의 사망 사고 이후 학야 제수문 옆에 긴급 구조 도구들이 마련됐다. ⓒ셜록

공사 측은 사고 현장인 학야제수문과 관련해 '난간, 구명조끼 등 안전시설이나 장비가 부족했다'는 지적은 인정했다. 농어촌공사 전남지역본부 관계자는 "일부 안전시설 등이 미비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시정조치를 진행했다"며 "매년 저수지, 양수장 등 농업 기반 시설을 대상으로 위험성 평가를 하지만 제수문까지는 구체적으로 (챙기지) 못한 게 사실이다"라고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책임' 문제가 남았다. 농어촌공사 측은 "경찰과 노동청의 조사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취지의 답만 내놨다. 관계자는 "공사의 책임에 관해서는 다양하게 해석이 될 수 있다"며 "현재 수사기관과 노동청에서 조사를 하고 있으므로 조사 결과에서 공사의 책임이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학야 제수문 전경 ⓒ셜록

다음 날 22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평소처럼 침대에 누운 채로 스마트폰을 통해 메일함부터 접속했다. 한 메일의 제목을 보고 순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안녕하세요, 주보배 기자님. 저는 함평 수문 관리원의 …."

함평에서 전하고 온 편지의 답장이 도착했다. 이야기는 이어진다.

※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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