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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00강! 우리는 모두가 ‘고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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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드디어 100강! 우리는 모두가 ‘고을’이 되었다

[2023년 8월 고을학교는 <제100강 특집 : 강원도 북단 고성고을>]

‘전국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의 기치를 내걸고 2013년 10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가 개교했습니다. 제1강으로 <경상우도 으뜸고을 상주>를 출발했고, 2023년 8월 제100강으로 <강원도 북단 고성고을>에 도착합니다. 드디어 100강입니다.

그동안 고을학교를 이끌어오신 최 교장선생님의 뜨거운 열정과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교장선생님의 원활한 답사를 도와주신 김순태·이지범 교감선생님, 항상 안전 등하교 해주신 이신배 기사님, 뒷바라지에 바빴던 허경옥 스태프, 애 많이 쓰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지난 10년 변함없는 성원과 참여로 고을학교를 이 세상 명문학교로 가꾸어주신 회원 여러분께 큰 인사를 올립니다.

▲고성고을에 들어서면 <고성8경>의 하나인 설악산 울산바위가 수문장처럼 서서 이 고을을 찾는 이들을 맞아준다.Ⓒ손호철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00강은 2023년 8월 2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00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화암사-청간정-천학정-왕곡마을-간성향교-육송정홍교-건봉사(일주문/능파교/등롱석/십바라밀석주/적멸보궁)-화진포호(이승만별장/이기붕별장/김일성별장)-서울의 순입니다.

*답사 도중에 점심식사 겸 뒤풀이가 있습니다.

▲<고성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100강 특집 : 강원도 북단 고성고을>을 준비하시는 최연 교장선생님의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뒤편엔 설악산·금강산이 에워싸고, 앞에는 망망대해 동해가 넘실거립니다.

고을학교 제100강은 분단의 아픔을 안아온 대한민국의 최북단 <고성고을>로 갑니다. 한국전쟁의 격전지로 많은 문화재가 전쟁의 와중에서 소실, 훼철되었으며 읍치구역에는 한국전쟁 이후 복원한 향교만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해안의 절경에 아름다운 정자들이 있고 집성촌인 전통마을도 남아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곳이 수복지역이기에 당시 남과 북 정상들의 별장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풍광 좋은 화진포엔 분단 당시 남과 북 정상들의 별장이 공존하고 있다.Ⓒ고성군

고성고을은 한국의 최북단에 있으며 북쪽에도 같은 이름의 고을이 있습니다.

고성은 대한민국의 최북단에 있는 고을로, 동쪽으로는 동해, 남쪽으로는 속초시, 서남쪽으로는 미시령 사이로 인제군, 북쪽으로는 휴전선을 경계로 북한 고성군과 접하고 있으며 옹진군, 철원군과 함께 남한과 북한에 모두 존재하는 고을이기도 합니다.

▲건봉사는 한때 전국 4대 사찰 중 한 곳으로, 설악산 신흥사, 백담사 등 9개 말사를 거느렸으나 한국전쟁 중 치열한 전투가 이 일대에서 벌어지면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었다.Ⓒ고성군

고성의 역사는 고구려의 달홀에서 시작합니다.

고성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여 지금의 북강원도 고성군의 고성읍, 장전읍, 외금강면, 서면과 현내면 일부 지역은 달홀(達忽)이라 부르고, 옛 간성군 지역이었던 지금의 고성군 대부분은 수성군이라 불렀습니다. 신라는 568년(진흥왕 29) 비열홀주(북강원도 안변)에 두었던 주의 치소를 달홀로 옮겼으며, 658년(무열왕 5) 이후 일시적으로 고구려가 탈환하였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673년(문무왕 13) 달홀에 주잠성을 쌓았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757년(경덕왕 16)에 지방 행정구역이 9주 5소경으로 개편되면서 고성지역은 고성군과 수성군으로 분리되어 명주에 속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에 지방 행정구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삭방도에 편입되었고 이후 1018년(현종 9) 전국이 4도호부 8목 체제로 재편되면서 고성군과 수성군은 각각 고성현과 간성현으로 바뀌었으며, 고성현은 풍암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고려 전기에 고성현과 간성현은 간성군으로 통합 편제되었다가 고려 말기인 1389년(공양왕 1)에 다시 간성군과 고성현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고성현도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629년(인조 7) 고성군에서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일이 발생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38년(인조 16)에 회복되었고 1895년(고종 32)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면서 강릉부에 속하였다가 이듬해에 13도제로 개편되면서 강원도 고성군과 간성군으로 복귀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고성군이 간성군에 통합되어 9개 면을 관할하였고 1919년 간성군이 고성군으로 개칭되고 1935년 오대면이 거진면으로 개칭되었습니다. 1937년 신북면의 장전리와 성북리가 분리되어 장전읍이 신설되고, 신북면이 외금강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41년에는 고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2읍(고성읍, 장전읍) 6면(거진면, 수동면, 외금강면, 서면, 현내면, 간성면)으로 재편되었습니다.

광복 후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군 전역이 북한에 속하였다가 한국전쟁 후 간성면, 거진면, 현내면, 수동면만 수복되어 1954년 4개 면으로 고성군을 구성하였습니다. 1963년 양양군의 죽왕면과 토성면이 편입되어 6개 면으로 재편되었고, 1973년에는 거진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토성면의 사진리와 장천리가 속초시로 편입되었습니다. 이어 1979년 간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지금의 2읍 4면 체제로 개편되었습니다.

▲읍치구역에 남아 있는 간성향교Ⓒ고성군

읍치구역에는 간성향교만 남아 있습니다.

간성향교는 1420년(세종 2)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1546년에 군수 성헌이 용연동에서 교동리로 이전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40년에 군수 신일원이 명륜당을 중건하였고 1850년에는 현재의 위치인 규봉산 아래로 이건하였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1954∼1956년에 대성전과 동재, 서재, 대성문을 1960년에 명륜당, 1966년에 동무, 서무를, 1982년에는 외삼문을 다시 지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 10철, 송조 6현, 동국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은 세월이 흐르면서 불타거나 낡아서 다시 짓거나 고쳤지만, 처음 지을 당시의 위패는 지금까지도 잘 모시고 있습니다.

▲육송정 홍교는 조선 중기에 세워진 아름다운 홍예교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고성군

조선 중기에 세운 아름다운 홍예교가 있습니다.

육송정 홍교는 간성읍 해상리와 탑현리의 경계 지점을 흐르는 하천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에 석축을 쌓고 길이 10.6m의 다리를 놓았는데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다리가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8세기 중엽 이전에는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건봉사에는 이와 비슷한 홍예교인 능파교가 1704년에 세워져 있었는데 두 다리가 모두 1745년에 밀어닥친 대홍수로 무너졌으니 이 다리는 건봉사의 능파교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쪽은 높이 1.7m의 암벽을 그대로 이용하여 받침돌로 삼고 그 위에 비슷한 크기의 길쭉한 돌로 1단의 댓돌을 마련하였고 서쪽에는 거대한 3단의 댓돌을 쌓았으며 양쪽의 댓돌 위로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 밑을 꾸며 올렸는데, 1단에 2개씩의 길고 큰 돌을 이어 맞추기식으로 축조하였습니다. 다리 밑의 구조는 21단의 석재로 꾸며졌으며, 각 단은 2∼3개씩의 길고 큰 돌을 이어서 축조하였습니다.

이 홍교는 단칸 무지개 돌다리로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합니다. 특히, 다리 밑 부분에 조립된 무지개 모양과 그 위로 축조된 자연스럽게 쌓아 올린 냇돌[川石]의 아름다움이 돋보여 무지개 돌다리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곡마을은 여말선초에 조성된 전통 마을이다.Ⓒ고성군

왕곡마을은 방주형 길지에 여말선초에 조성된 전통 마을입니다.

왕곡마을은 백두대간 지류에 안긴 마을로 뒷산인 오음산이 병풍처럼 뒤를 받치고 좌청룡 공모산, 우백호 두백산이 감싸고, 순방산, 제공산이 호위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을 앞쪽으로 안산인 호근산이 포진해 있습니다. 마을로 들어오는 진입로는 정면이 아닌 왼쪽에 치우쳐있어 좋은 기운을 밖으로 뺏기지 않고 나쁜 기운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며 마을 앞 송지호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고 왕곡천의 물을 그대로 받아들여 나쁜 기운을 녹여낸다고 합니다.

마을의 동쪽은 골무산, 남동쪽은 송지호, 남쪽은 호근산과 제공산, 서쪽은 진방산, 북쪽은 오음산으로 막혀 있고 마을 북쪽에 있는 오음산에서 남서 방향으로 마을을 관통하며 흐르는 왕곡천 좌우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송지호에서 왕곡마을을 바라보면 유선형의 배가 동해와 송지호를 거쳐 마을로 들어오는 모습의 길지 형상입니다. 이러한 방주형의 길지는 물에 떠 있는 배 형국이어서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가라앉기 때문에 한때 마을에는 우물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물이 없었던 시기에는 샘물을 이용하였고, 근대에 와서 우물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과 풍수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지난 수백 년간 전란과 화마의 피해가 없었던 길지 중의 길지로서 한국전쟁과 근래 고성지역에서 발생했던 대형산불 때에도 왕곡마을은 전혀 화를 입지 않았습니다.

▲왕곡마을 배치도Ⓒ왕곡마을

왕곡마을은 양근 함씨, 강릉 최씨, 경주 김씨의 집성촌입니다.

왕곡마을의 형성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인 함부열이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간성에 낙향, 은거한데서 연유하며 그의 손자 함영근이 이곳 왕곡마을에 정착한 이후 함씨 후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생활해 왔습니다. 특히 19세기 전후에 건립된 북방식 전통 한옥과 초가집 군락이 원형을 유지한 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왕곡마을은 여말선초 이래 양근 함씨, 강릉 최씨, 경주 김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600년 세월을 정주해온 전통 있는 마을입니다.

가옥구조는 안방, 도장방, 사랑방, 마루, 부엌이 한 건물 내에 수용되어 있으며 부엌에 가축우리가 붙어 있는 겹집 구조입니다. 마을 안길과 바로 연결되는 앞마당은 가족의 공동작업 공간 역할을 하면서 타인에게 개방적이었던 반면에 비교적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뒷마당은 여인들의 공간으로 비개방적입니다.

‘동학의 빛 왕곡마을’ 비문에는 1887년 동학이 이 마을에 전파됐고 접주 김명숙을 중심으로 함희연, 함희용, 함영인, 김응숙 등이 주동이 돼 활동했으며 1889년 2월부터 천도교 제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이 이 마을 김하도의 집에 숨어있으면서 포교하며 제자들을 교화했다고 합니다. 1894년 9월 해월의 총동원령이 내려졌을 때 양양, 거진지역까지 동학군이 궐기했으며 당시 동학군들은 왕곡마을 함일순의 집에서 10여 일간 머물며 전력을 가다듬었다고 합니다.

마을 오른쪽 산기슭에 있는 양근 함씨 ‘4세 5효자각’은 4세에 걸쳐 다섯 명의 효자가 모두 단지(斷指)해 부친의 생명을 연장하는 효행을 실천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1820년 효자비 건립이 이뤄졌으며 현재의 효자각과 5기의 비석은 1984년에 새로 만든 것입니다.

효자 함희석은 부친이 병환으로 눕자 바다에 헤엄쳐 나가 귀한 물고기를 잡아 봉양했고 하루는 집 안에 큰불이 났는데 부모가 화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지성으로 보살폈습니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3년간 범이 호위하는 가운데 시묘살이를 했습니다. 효자비는 1869년에 건립되었습니다.

함정균 가옥은 1849년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집으로 마을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연대가 오래된 건물로 입향조 함부열의 21세손인 함정균의 고조부인 효자 함희석이 건축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본채 건물 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구성돼 있고 좌측으로 외양간이 돌출돼 ‘ㄱ자형’ 평면을 구성하는 왕곡마을의 전형적인 가옥구조를 보여줍니다.

현재 왕곡마을 내 전통 한옥은 51채로 기와집은 교회 1채를 포함해 31채이며, 초가집은 20채입니다. 이 가운데 주민이 기거하는 가옥은 25채이고 거주 주민은 48명입니다.

▲어명기 고택은 특이한 구조의 조선시대 고택이다.Ⓒ고성군

특이한 구조의 조선시대 고택이 있습니다.

어명기 고택은 조선 중기에 처음 만들어져 1750년대에 소실된 것을 현재의 주인인 어명기 씨의 할아버지가 1860년에 매입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지은 것입니다.

추위를 막기 위한 함경도, 강원특별자치도 지방의 주택 건축양식인 ‘田’자 형태의 세줄 겹집은 여러 곳에 남아 있지만, 이곳처럼 완전한 형태의 3칸 가옥은 유일합니다. 부엌과 마루, 외양간까지 하나의 건물 내부로 담겨 있는 본채는 여느 곳과는 다른 건축법으로 사람들에게 그 차이점을 찾아보는 ‘숨은그림찾기’의 장소입니다.

천장과 지붕 사이를 종이로 바르는 일반적인 모습과 달리 보온을 위하여 두꺼운 나무를 대고 흙을 발라 완벽한 차단을 한 ‘더그매’라는 공간은 수납공간으로의 구실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환기 시설이 없는 부엌의 연기와 열기가 집안을 따뜻하게 덥힌 후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도록 하는 지붕 기와 사이의 까치집은 강원 특별자치도 산간 지역 너와집의 환기 구멍이 발전된 형태입니다. 옛날 귀틀집이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 이만한 더그매를 형성하려면 귀틀집에 큰 집 하나를 덮어씌워야 했는데, 작은 집에 큰 집을 씌워 퇴를 구성한 합병형 구조로, 이 유형이 기둥을 세우는 집에도 채택되면 이런 모습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집이 지닌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세줄 겹집이면서도 까치구멍집은 폐쇄성이 강한 산곡간형이고, 강릉지역부터 해안을 따라 분포되는 이러한 집은 개방성이 짙은 해안성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세줄 겹집 중에서 이 집은 규모가 당당하며 건축한 기법이 능숙하고 고식을 비교적 충실히 지니고 있습니다.

이덕균 가옥은 현 소유자의 고조부가 150년 전에 세웠다고 전하고 현재 3대손이 살고 있으며 1879년 구성리에 건축되었다가 20세기 초에 지금의 자리로 이축하였습니다. 대패를 사용하지 않고 자귀로 지은 것이 특징으로 ㄱ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으며 앞면 2칸은 마루로 되어 있고 옆면에 사랑방과 골방이 있으며 부엌 앞에는 지형을 이용하여 본채보다 한 단 낮게 덧댄 외양간이 있습니다. 본채는 앞면에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부엌과 사랑방을 두고 마루 뒤로는 안방과 도장방을 두었으며, 뒤편에 헛간과 고방을 별채로 배치하였습니다.

▲화진포에 남아 있는 김일성 별장Ⓒ고성군

풍광이 수려한 화진포에는 김일성,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이 있습니다.

화진포호는 석호로서 호숫가에 해당화가 만발해 붙여진 이름으로, 둘레 16km의 동해안 최대의 자연 호수입니다. 넓은 갈대밭 위에 수천 마리의 철새와 고니가 날아들고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주변 경관이 빼어나 예로부터 주변에 유명한 별장들이 많았던 곳으로 지금도 이승만, 이기붕, 김일성의 별장이 있습니다.

초도리 앞 500m 해상에 있는 ‘금구도’라 이름 붙여진 섬은 신라 시대 수군의 기지로 사용하던 곳으로 섬의 북쪽에 석축 일부가 남아 있고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섬의 중심부에서 와편과 주춧돌이 1997년 4월 문화재연구소 학술 조사반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김일성 별장은 외국인 선교사 셔우드 홀이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건물입니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50년까지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 가족과 함께 하계휴양지로 이 별장을 찾았습니다. 48년 8월 당시 6살이던 김정일이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제프 소장의 아들과 별장 입구에서 어깨동무하고 찍은 사진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김일성 별장은 지상 2층 석조 건물로 지어져 당시 건축물로는 제법 화려합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훼손돼 방치되다가 2005년 3월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일성 별장의 절경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마주 보이는 금구도라 불리는 바위섬으로, 거북 모양을 닮았으며 가을철이면 이 섬에서 자라는 대나무 숲이 노랗게 변해 섬 전체가 황금빛을 띱니다. 여름에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너가 해초, 전복 등을 따며 해수욕을 즐길 수 있습니다. 김일성 별장이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해안 언덕에 있는 것과 달리 이승만 별장은 바다는 보이지 않고 화진포 호수만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서로 1km 정도 떨어져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진포는 동해와 연접해 자연풍광이 수려하고 면적 72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호수 주위에 울창한 송림이 병풍처럼 펼쳐진 국내 최고의 석호이다.Ⓒ화진포

이승만 별장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머물렀던 곳으로 1954년에 신축된 뒤 1961년에 폐허가 되었다가 1997년 7월 육군이 재건축하여 1999년 전시관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별장 내부는 침실과 집무실로 쓰이던 방 두 개와 거실로 구분되어 있으며 유족들에게 기증받은 물품들을 전시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기거하던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였습니다. 단출한 가구와 소박한 물건들 그리고 생전의 사진들로 그 당시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 별장은 소박하고 단출하지만, 별장 안에서 밖을 바라보면 주변의 울창한 송림과 한데 어우러진 화진포 좌우의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까닭에 화진포의 세 별장 중 가장 경치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기붕 별장은 192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어 현재까지 보존된 건물로 이승만과 김일성 별장 사이 호숫가에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 북한의 간부 휴양소로 사용하였고 휴전 후에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가 개인 별장으로 사용하다가 1999년 7월 전시관으로 개수 운용하고 있습니다. 박마리아는 생전에 인근 고성군 대진읍에 대진교회를 세우고 자주 이곳을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별장 내 집무실과 응접실 등이 갖춰져 있으며, 주전자, 촛대, 문갑 등이 보관돼 있습니다.

▲송림에 둘러싸인 기암절벽 위에 자리한 천학정Ⓒ고성군

바닷가 풍광 좋은 곳에 천학정과 청간정이 있습니다.

천학정은 <고성8경>의 하나로 천혜의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 위에 있어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며 남쪽으로 청간정과 백도를 마주 바라보고 북으로는 능파대가 가까이 있어 한층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는데 상하 천광 거울 속에 정자가 있어 천학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1931년 지방유지 한치응, 최순문, 김성운 등이 발의하여 건립하였습니다.

청간정은 설악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청간천과 만경창파가 넘실거리는 기암절벽 위에 팔작지붕의 중층 누정으로 아담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1560년 최초의 중수기록이 있으며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쓴 현판이 정자 내에 걸려 있습니다. 아름다운 주위 풍광으로 <관동8경>의 하나로 손꼽혀 예부터 시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며 노송 숲 사이로 뚫린 오솔길을 지나, 탁 트인 동해를 굽어보는 정취가 그윽하기만 합니다.

▲<관동8경>의 하나인 청간정Ⓒ고성군

신라 시대 고찰 건봉사와 화암사가 있습니다.

건봉사(乾鳳寺)는 520년(법흥왕 7)에 아도(阿道)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당시 사찰명은 원각사입니다. 창건연대에 대하여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나 창건 시기가 역사적으로 신라의 불교 공인(527년) 이전이고, 이때 고성은 고구려 영토였습니다. 눌지왕(417∼458) 때 고구려를 거쳐 온 묵호자, 아도 화상이 신라 땅 모례(毛禮)의 집에서 처음 법을 전했다는 설에 비추어 볼 때 창건연대가 신빙성을 갖기도 합니다. 937년 도선국사가 중건하면서 서봉사(西鳳寺)라 했으며 1358년(공민왕 7)에 나옹이 중수하면서 건봉사라 개명했고 그 사명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건봉사 서쪽 산에 봉황을 닮은 바위가 있어 ‘서봉사’로 했는데 훗날 주역 상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건(乾)’으로 대체된 듯합니다.

1464년(세조 10)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願堂)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조선 왕실의 원찰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 신숙주, 한명회,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와 소금을 하사하고 사방 10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한때 전국 4대 사찰 중 한 곳으로 융성기에는 3,183칸의 대가람으로 설악산 신흥사, 백담사 등 9개 말사를 거느렸으나 1878년 화재로 대부분 전각이 소실됐고, 한국전쟁 당시 아군 3개 사단, 미군 10군단과 북한군 5개 사단 간의 치열한 전투가 이 일대에서 벌어지면서 완전히 폐허로 변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모아 훈련시켰으며 승병 공양을 위해 쌀 씻은 물이 개천을 따라 10리를 넘게 흘러갔다고 하는데, 이를 방증이라도 하듯 엄청난 크기의 돌절구통이 사명대사 의승병기념관 옆에 줄줄이 전시돼 있습니다.

▲건봉사 일주문은 기둥이 4개인 이형 일주문으로, 건봉사 중 한국전쟁 당시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며 돌기둥에는 금강저가 새겨져 있다.Ⓒ고성군

건봉사는 ‘염불만일회’의 염불 도량이었습니다.

건봉사는 염불만일회를 주도한 사찰입니다. 신라 시대의 발징(發徵) 화상은 ‘나무아미타불’ 염불로 열반에 이르려고 758년 1만일 동안 염불 수행에 매진하는 ‘염불만일회’를 개설했습니다. 31명의 스님과 신도 1,820명이 참여하여 신도 120명은 의복을, 1,700명은 음식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명 스님들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했고, 그 후로도 만일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극락왕생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웅전 뒤편 산 중턱에 큰 바위가 있는데 염불 수행한 사람들이 열반의 세계로 올라갔다는 등공대(騰空臺)로 알려져 있습니다. 등공대는 해탈의 길이 끝나는 지점입니다. ‘등공(騰空)’이란 살아있는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오르면서 몸은 벗어버리고 마음만 부처의 연화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발징의 1차 만일염불 이후에도 네 번이나 더 이뤄졌는데 19세기에만 세 번(1802, 1851, 1881) 봉행됐습니다. 한 세기에 세 번의 만일 염불이면 건봉사 염불 소리가 100년 동안 거의 끊이지 않고 금강산에 울려 퍼졌다는 사실입니다.

건봉사 옛터에는 불치사리, 능파교, 불이문, 십바라밀 석주, 등롱석 등이 남아 있습니다.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후 사리 100과를 얻어 신라로 이운하여 통도사, 월정사, 정암사, 법흥사, 봉정암 등에 봉안했습니다. 훗날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통도사 금강계단을 침탈해 사리를 탈취해 갔는데,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 포로들을 송환시키려 도일했을 때 통도사 사리도 되찾아와 파헤쳐진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해 이를 봉안하고, 그 중 불치사리 12과를 건봉사 사리탑에 안치했습니다. 1986년 도굴꾼이 건봉사 사리탑의 사리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이후 주범은 거의 매일 같은 꿈을 꾸었는데 부처님께서 “사리를 돌려주어라”라고 꾸짖는 꿈이었습니다. 주범은 결국 공범에게 시켜 서울 봉천동 모 호텔에 사리를 맡겨 놓고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찾은 건 8과. 4과는 끝내 공범이 들고 달아났습니다. 현재 불치사리 8과 중 3과는 적멸보궁에 안치돼 있고, 5과는 불자들의 친견을 위해 염불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능파교(凌波橋)는 건봉사의 대웅전 구역과 극락전 구역 사이에 흐르는 계곡을 건너기 위하여 놓인 다리로 “속세의 파도를 헤치고 부처님 세상으로 이르는 다리”라는 뜻이며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1704년(숙종 30)부터 1707년 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고 하며 1745년(영조 21)에 홍수로 무너진 것을 1749년에 고쳐 세웠고, 1880년(고종 17)에 다시 무너진 것을 고치면서 석재 일부를 대웅전의 돌계단과 산영루 수축에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축조방식은 양쪽에 2단의 바닥 돌을 놓고 그 위로 29개의 긴 돌을 차곡차곡 맞추어 둥그렇게 배열한 것으로 밑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돌의 규격이 작습니다. 다리의 윗부분은 여러 장의 석재를 짜 맞추어 판판하게 닦여져 있으며 양 끝에는 다리 폭보다 더 넓게 경계석이 놓여 있습니다. 능파교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한 단칸 무지개 돌다리로 축조 시기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능파교신창기비’가 세워져 있어 무지개다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일주문은 1920년에 지은 건물로 기둥이 4개인 이형 일주문으로 한국전쟁 속에서도 유일하게 보존된 건물이며 돌기둥에는 금강저가 새겨져 있습니다.

십바라밀 석주는 십바라밀을 형상화한 상징기호로 두 기둥에 5개씩 10개가 새겨져 있습니다. 번뇌를 깨고 해탈로, 사바세계에서 열반의 세계로 들어서는 10단계 수행을 말함이니, 돌에 새겨진 문양은 열반의 문을 여는 ‘암호’인 셈입니다.

등롱석(燈籠石)은 담과 계곡을 낀 사찰 입구의 어두운 길을 밝히고자 석유 등롱을 놓아두려고 설치했던 유물로 일종의 조명시설입니다.

▲화암사는 진표율사가 금강산의 남쪽에 창건한 사찰이다.Ⓒ고성군

화암사는 가순궁(嘉順宮, 수빈박씨)의 원찰이었습니다.

화암사(禾巖寺)는 769년(혜공왕 5)에 법상종의 개조 진표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진표율사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를, 서쪽에는 장안사를, 그리고 남쪽에 화암사를 창건해 금강산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자 했습니다. 남쪽에서 보면 금강산이 시작되는 신선봉 바로 아래에 세워져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어 ‘금강산 화암사’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수많은 대중에게 <화엄경>을 설했는데, 이를 배운 제자 1백 명 중 31명이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가고 나머지 69명도 무상 대도를 얻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때 사찰 이름은 화엄사(華嚴寺)였는데 진표율사가 화엄경을 설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화엄사가 공식적으로 화암사(禾巖寺)로 바뀐 시기는 1912년 3월 1일 본산 체제로 접어들면서부터입니다.

화암사는 진표율사 이래로 여러 번 중창하였는데 특히 1794년(정조 18)의 중창은 화암사의 사격을 증명해 주는 큰 불사로 도한 스님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도한 스님이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3, 7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에 정조는 제조상궁 최씨를 이 절에 보내 스님을 궁궐로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스님으로부터 경위를 들은 정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암사를 가순궁의 원당으로 삼고 요사채를 크게 지어주었습니다.

2년 뒤에는 미타암의 화응전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병풍 8폭 등을 하사하고 사방 금표를 정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한때는 왕의 원당으로 지정될 만큼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이후 거듭된 화마와 수마,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사찰은 파손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되어 오다가 90년대 들어서 오늘날의 규모로 중창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대웅전, 명부전, 금강루, 일주문, 미타암, 요사채, 선원, 비림(부도군)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극락암은 건봉사에서 서북쪽으로 2km 지점에 있었던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였습니다. 945년(혜종 2) 묘적동에 창건하였으나 1878년 산불로 인해 건봉사와 함께 소실되었으며 다음 해에 중건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까지 산신각을 포함하여 총 49칸의 규모였습니다. 50여 명의 비구니 수행처이자, 봉명학교에 다니는 유학 온 여학생들의 기숙사로도 사용했습니다. 해방 후 38선 이북에 위치하여 정상적인 종교 활동이 불가능하자 극락암 비구니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극락암에 살았던 법선 스님이 1956년 간성면 광산3리에 극락암을 신축하였다가 1962년 현재의 간성읍 교동리 함박동으로 이전하여 오늘의 극락암이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고을학교 기사(8월) <고성고을>을 확인 바랍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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