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창간 때부터 내가 관여했던, '주변부'를 뜻하는 제3세계 전문 잡지 <페리페리, Peripherie> 가운데 리영희 선생의 글이 80년대 중반에 독일어로 번역되어 실렸던 해당 호를 책장에서 찾았다. 이 글이 우리의 인연을 복기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세계경제 위기를 특집으로 다루었던 1984년 7월에 발간된 초록색 표지의 15/16 합병호 속에서 '한반도 주변정세의 질적 변화와 우리의 과제'라는 리 선생의 글을 발견했다. 내 글 '남한: 일본의 궤적을 쫓는가'도 함께 실려 있었는데도 오랫동안 이를 잊고 지냈다. 이렇게 기억의 실마리를 찾은 후에 나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비통과 분노 속에서 보낸 지 겨우 일 년을 넘긴 시점인 1981년 가을, 남서독에 있는 바덴바덴시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나고야 대신 서울을 1988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했다. 국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에게는 당연히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이 양면성을 지녔듯이 올림픽의 개최로 말미암아 세계의 관심이 한반도로 향하는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과 복합성을 세계에 호소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뒷이야기
그래서 위에 말한 잡지의 편집기획 모임에서 당시 발전사회학의 논란이었던 이른바 '중진국'의 하나였던 남한 문제를 내가 다루기로 했다. 그런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적 역학관계를 분석하는 마땅한 필진을 독일어권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직전에 읽었던 리영희 선생의 글이 생각나 이를 번역해서 실었으면 했더니 편집기획팀이 모두 동의했다.
독일어 번역자의 이름은 당시 남한의 민주화투쟁을 지원하고 한반도의 실정을 알리기 위해서 설립된 '코리아 콤미티'(한국위원회)의 성원인 미하엘 데니스로 되어 있었다. 사실은 그러나 하이델베르크에서 정치학으로 학위를 마친 강정숙 박사가 수고했다. 당시의 국내 상황 때문에 번역자의 안전을 고려한 조치였다.
어떻든 이 논문은 독일어권에서 소개된 리영희 선생 최초의 글이었다. 그 다음해의 여름에 리 선생이 어렵사리 여권을 받아 도쿄대학에서의 연구차 일본에 체류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이 기회에 그분을 독일에도 모실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강정숙 박사와 당시 하이델베르크에 소재한 개신교 학제간 통합연구소(FEST)의 연구원이었던 크리스티네 리네만--후에 스위스 바젤대학의 선교학 교수가 되었다--이 적극 일을 추진해서 성사시켰다. 남편도 신학교수인 그녀의 교수자격 논문 주제가 남한과 남아프리카에서 교회의 정치적 책임문제였을 정도로, 한반도 문제에 깊은 관심을 둔 여성 신학자였다. 내가 이들 부부를 직접 만났던 때는 베를린 우리 집을 방문했던 90년대 초였다고 기억한다.
첫 번째 만남
이렇게 리 선생 내외분이 1985년 여름, 독일 땅을 밟았지만 우리가 만나서 나름대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던 때는 그 이듬해 봄이었다. 1986년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사고 직후였기 때문에 나는 그 시기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
리 선생이 함부르크에 있었던 학회에 참석한다는 기별을 받고 나도 함부르크에 갔다. 내가 받은 리 선생님의 첫인상은 내가 생각한 대로 예리하고 직선적이지만 풍부한 유머감각을 지닌 언론인이었다.
우리는 함부르크에서 송현숙 화가와 그녀의 남편, 함부르크 예술대학 힐트만 교수의 환대도 받았다. 당시 베를린에 유학, 귀국 후에 진보학계와 나의 구명운동 앞자리에 섰던 김세균 교수도 자리를 함께했다. 리 선생은 김 교수의 결혼 주례를 보았던 특별한 관계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이어서 우리는 가까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했다. 마침 화려한 튤립이 만발했던 계절이었다. 이 자리에는 마침 네덜란드에 연수차 체류하고 있던, 가톨릭농민회와 한살림운동을 오랫동안 이끌었던 박재일 선배도 함께할 수 있었다. 리 선생과 박재일 선배 모두 다시 만날 수 없는 길을 이미 떠났으나 내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두 번째 만남
두 번째 만남의 때는 그로부터 거의 십년이 지난 1995년 여름이었다. 그 사이에 한반도 안에서는 6월 항쟁, 서울 올림픽, 김일성 주석 사망 등 큰 사건이 있었고, 한반도 밖에서는 톈안먼사태, 베를린 장벽 붕괴, 걸프전쟁, 유고 내전, 소련의 붕괴, 9.11사건 등이 일어났다. 지구촌을 말 그대로 숨 가쁘게 만들었던 격동의 시간이었다.
분단된 강토에서 살면서 심신으로 오랫동안 너무 지친 우리 민족에게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독일 통일을 현장에서 보고 싶은 욕구를 누구나 가졌던 때였다. 나도 서울에서 통일 현장을 보러 오는 교수와 언론인들을 정말 많이 만났던 때였다.
1995년 여름에 <페리페리>를 발간하는 발전이론과 발전정책을 연구하는 학회(WVEE)는 당시 후진국 연구 주제로 큰 관심을 끌었던 산디니스타의 니카라과와 동서냉전의 종식에도 여전한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학술토론회를 열었다. 여기에 발표자로 초청된 리 교수는 처음으로 학회 간부와 편집 책임자들도 만날 수 있었다.
1985년 리 선생의 방독 때는 장벽으로 막혀 가볼 수 없었던 베를린의 이웃 도시 포츠담을 우리는 찾았다. 국제 로자 룩셈부르크 협회의 책임자로서 마침 베를린을 방문 중이었던 이토 나루히코 일본 주오대학 교수도 동행했다. 5년 전에 타계한 이토 교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적극 지원한 일본 지식인 가운데 국제적으로 활약했던, 대표적인 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의 수뇌부가 전후 세계질서를 논의했던 회담 장소였던 포츠담의 세칠리엔 궁, 프리드리히 2세가 건조했던 상수시 여름 궁과 공원,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이 묵으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투하를 결정했던 그레브니츠 호숫가에 있던 별장을 함께 둘러보았다.
독일 통일 이후, '작은 백악관'이라고 불렸던 이 별장을 유지하는 데 논란이 많았다. 이 건물을 역사의 중요한 유적으로 포츠담시에서 관리하느냐, 아니면 민영화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토론하는 공청회에 나도 초청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를 기억하는 기념관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당시 있었으나 이는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것이라고 반박했던 기억도 떠올렸다.
세 번째 만남
두 번째 만남이 있고 나서 5년이 지난 후인 2000년 5월에 리영희 선생을 다시 뵐 수 있었다. 뉴욕 근처 뉴저지 해변도시에서 열린 제1차 세계한민족포럼에서였다. 서울로부터 리 선생을 비롯해 이래저래 내가 아는 학자들이 참가했고, 이 가운데는 베를린에 유학했던 박호성 교수도 있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이미 확정되었던 시점이었기에 많은 참석자가 한반도의 긴장해소와 평화정착에 큰 기대를 하고 모였다. 그 후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도 발표되었다. 하지만 23년이 지나는 오늘의 시점에서 뒤돌아보니 너무나 안타까울 정도로 그때의 열정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해 겨울, 리 선생이 뇌출혈로 입원했다는 소식이 서울로부터 날아왔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심신이 혹사당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멀리서 쾌유만을 빌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만남
리 선생과 마지막 만남은 외국 땅에서가 아니라 서울에서였다. 정작 37년 만에 서울 땅을 밟았던 기쁨은 그러나 이내 며칠 만에 사라지고 나를 기다리는 곳은 국가정보원과 검찰청이었다. 외국보다 더 낯선 서울에서 그래도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나의 오랜 외국생활 중에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 가운데 리영희 선생이 계셨다.
그러나 나는 그 후 구치소에 9개월 동안 갇혀 있던 몸이었다. 리 선생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공판정을 찾았고, 남편의 구명을 위해 낯선 땅 서울에서 밤낮으로 동분서주했던 아내를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용기도 북돋아주셨다.
2004년 새해에 구치소에서 무엇보다 건강을 챙기라는, 그분의 연하장을 받았다. 내가 알던 그 이의 유려한 서체가 몹시 흔들린 상태여서 마음이 아팠다.
2004년 7월 21일, 2심 재판에서 '해방 이후 최대 간첩'이라고 불렸던 나는 국가보안법에 따른 모든 주요 기소 부분에서 무죄 판결이 나와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날 저녁 나의 석방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리 선생 내외분도 참석, 석방과 재회의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이로부터 6년 후, 2010년 말에 리 선생께서 저세상으로 가셨으니 이것이 생전 그분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다시 읽는 그의 글
지금 한반도는 무서운 격랑에 휩쓸리고 있다. 만약 이 상황을 리 선생이 접한다면 어떤 판단을 내릴지 하는 관심에서 처음 언급된 논문을 다시 읽었다. 물론 40년이라는 시간이 그 사이에 흘렀다. 하지만 이 시간이 마치 정지했던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을 곳곳에서 느꼈다.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윤석열 정부의 일련의 외교적 행보는 이미 80년대에 리 선생이 예견했던 미-일-한 삼각동맹의 완전한 실현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과 결과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지, 지금은 거의 상상의 영역에 속한다.
한편에서는 자유라는 가치를 지키는 공동체가 승리해서 한반도도 이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밝은 미래를 함께 맞을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는 것 같다. 반면 다른 편에서는 민족공멸을 앞당기는 도박판에 뛰어드는 엄청난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이렇게 어려운 갈림길 앞에 선 우리에게 독일어로 번역된, 리영희 선생이 40년 전에 남겼던 글--'한반도는 핵전쟁의 볼모가 되려는가'--이 던지는 물음은 우리의 깨달음을 위한 하나의 큰 화두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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