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윤석열 대통령은 연극을 보고 배우들과 뒷풀이를 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는 신중했다. 펠로시 의장은 대만·싱가포르·일본 등 동아시아 주요 국가를 돌면서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등 국가 정상들을 만났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 의전 서열 3위인 그를 패싱했다.
강단 있던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 스타일은 지금 완전히 바뀌었다. 미국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 줬다. 미국이 원하는 건 네 가지였다. 한국은 핵을 가져선 안되고, 한국은 미국에 투자해야 하며, 한국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양안 관계에서 우리 편을 들어야 한다. 네 가지 모두 실행됐다. 미국에 완벽한 외교적 승리를 안겨 주는 게 윤석열 정부의 목표였다면 이건 달성됐다.
일부 언론은 그러나 여전히 윤석열 대통령의 '워싱턴 선언'을 폄훼하고 있다. '일부 언론' 중 하나인 <조선일보>는 27일자 사설 '한미 핵 협의그룹 창설, '한 핵 족쇄'는 강화됐다'에서 "한국민의 불안을 근원적으로 해소할 조치는 이번에도 없었다. 나토식 핵 공유의 기본은 핵탄두가 나토국 공군 기지에 있다는 것으로, 이번 한미 협의와는 완전히 다르다. 한미 간에 어떤 문서나 약속이 나와도 미국이 워싱턴과 뉴욕이 핵 공격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을 보호해줄 것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되지 못한다"고 혹평하며 "결국 핵 협의 그룹 창설을, 한국 핵무장과 전술핵 재배치 포기와 맞바꾼 모양이 됐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나아가 "한미 동맹은 우리 안보의 초석으로 이는 앞으로도 바뀔 수 없다. 다만 우리를 지키는 쪽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는 묘한 말까지 던졌다. 한국 보수가 떠받드는 신화, 한미동맹이 만들어 내는 차가운 현실 앞에서 씁쓸한 입맛을 다시는 <조선일보>. 윤석열 대통령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오해하지 말자.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방미 외교의 '사실상' 유일한 성과는 '워싱턴 선언'이다.
애초 미국이라는 국가가 갖고 있는 제 1의 원칙은 '미국은 핵을 공유하지 않는다'이다. 그리고 1968년 전 세계 185개국이 핵무기 보유를 포기한 NPT(핵확산금지조약) 가입에 동의한 이후로 미국의 핵심 전략은 '미국 이외에 어떤 국가도 더 이상 핵을 가져선 안된다'이다. 그걸 깬 나라는 몇 개 없다. 북한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핵을 공유할 수 없다'는 제 1원칙이 불변하는 한 한국이 어떤 걸 요구한다고 해도 미국은 구색을 맞추면 되는 일이었다.
남북 화해 무드가 한창이던 2018년 10월 트럼프 행정부의 미 국무부는 갑자기 '한미 워킹 그룹'을 발족시킨다. 대북 제재 준수과 남북 협력 사업 문제 조율 등을 협의하기 위한 실무단인데, 당시 자유한국당(국민의힘의 전신)은 "한국 정부의 대북 과속을 시스템적으로 방지하기 위한 '단속반'의 성격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진보 진영에서도 같은 주장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는 부인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전망은 딱 들어 맞았다. 한국은 북한과 독자 사업을 미국과 협의해야만 했고,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보다 한발 더 나가려 하는 남북의 '통제되지 않는' 행보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한미 워킹 그룹'은 남북 관계 제동기 역할을 했다.
윤석열 정부가 합의했다는 한미 양국 간 핵협의그룹(NCG)은 비슷한 모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한국의 독자 핵무기 개발 욕망을 자신의 품 속에서 합법적으로 제어할 수단을 얻었다. 한국이 NPT에 잔류하는 선언도 받아냈다. 한국은 이제 핵 개발도, 전술핵 재배치도 '사실상' 포기했다. 윤석열 정부는 스스로 '우리의 핵개발 욕구를 제어해달라'고 요구한 것과 다름 없다. 애초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에도 대북 핵 억지력 소통을 위해 출범한 EDSCG(한미 외교·국방 고위급 협의체)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핵 문제'만을 콕 찝어 한미 '핵 협의 그룹'을 만들어 자승자박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매우 중요한 지점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의 원칙을 미국으로 하여금 재확인하도록 만들어줬다는 점이다.
'한반도 비핵화'의 재확인, 윤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는 이처럼 중요한 성과를 거두고도 정 반대 방향으로 확대 해석하느라 바쁘다. '사실상 핵공유'라는 희한한 조어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진짜 성과를 숨기고 '북한 종말' 과 같은 호전적인 용어를 동원해 단 한번도 변한 적 없는 미국의 '핵우산 정책'이 변했다고 힘주어 말한다.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부터 재확인한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원하는 걸 다 내 주고 말의 성찬을 대가로 받아 한국 내 정치적 선전 효과에 매달리는 한국 정부가 참으로 희한하고, 또 고마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이같은 빛나는 성과의 문제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단순한 원칙(소극적으로 보면 한국은 아무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재확인에 막대한 외교력과 비용을 투자했다는 것이고, '한반도 비핵화'라는 단순한 원칙(적극적으로 보면 북한의 핵 포기를 견인해야 하는)을 진전시키기 위한 '미래 플랜'이 단 하나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북한의 핵포기를 위한 노력의 장이 되여야 할 방미 외교 무대가 '한국의 핵포기'를 선언하는 장으로 변한 셈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걸 얻어내는 데 진력을 다 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은 놓쳐버렸다. 아니 애초에 '북핵 문제 해결'보다 '한미일 동맹'을 향해 내달려 오고 있던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을 위시한 윤 대통령의 외교 참모들에게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 외교'를 못마땅해 하던 보수 진영이 짜 낸 아이디어는 '북한도 하면 우리도 한다'는 '핵 무장'의 앙상하고, 실현 가능성 없는 플랜이었다. 한국 외교가 수십년 견지해 온 '한반도 비핵화'의 원칙을 간단히 허물고자 내놓은 '미래 아젠다'가 '핵무장' 수준이라면 이 정부의 외교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앞으로 남북간 긴장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중국과 러시아를 적대시하는 것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북한을 설득할 동력마저 꺼버리는 일이다. 미국을 향해 내달렸지만 미국은 '더 다가오지 말라'고 하고 주변 열강은 한국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한국 경제는 지금 내리막이다. 자원도 없구 수출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이 나라가 주변국들을 자극하는 대결적 외교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무역수지 적자는 14개월째 계속되고 있고,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국제기구는 한국의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1.5%로 잡았다. 한국은행 역시 전망치 하향 조정을 예고했다. 물가상승률은 둔화됐다고 하지만, 이미 오를대로 오른 물가에 서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1호 세일즈맨'은 미국의 '1호 바이어'가 되어 돌아왔다. 경제 성과는 불투명하고 미국 대통령의 재선 캠페인은 활기차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한반도 비핵화' 재확인은 환영하지만, 민심이 점점 가물어가고 있는 상황은 개선된 게 없어 보인다. 우린 과연 누굴 위해 외교를 하는가?
윤 대통령의 부른 노래 돈 맥클린의 '아메리칸 파이'는 미국의 황금기를 추억하는 '송가'다. "음악이 죽은 날, 바이 바이 아메리칸 파이" 가사에서 또 다른 무엇인가, 이를테면 '평화 외교'가 '죽은 날'을 씁쓸하게 회상하는 '페어웰 송(farewell song)'처럼 들리기도 한다. 음악은 듣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심성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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