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언론이 지난 3월 21일 윤석열 대통령의 국무회의석상 발언을 두고 팩트체크를 하고 있다. 언론이 고생이 많다. 이 글에선 윤 대통령의 심리 상태와 정세 인식을 살펴보겠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꼬여있는지 추적해 봐야겠다.
"저는 우리 정부가 이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3월 21일 국무회의 모두발언)
확신한다는 표현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여론보다는 본인의 확신이 먼저다. 그런데 순서가 바뀌었다. 확신한다면 국무위원들을 상대로(국민들이 아닌) 한 발언을 국민들에게 먼저 직접 했어야 했다.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다"던 1300자 3.1절 기념사는 전조였다. 닷새 후인 3월 6일 윤 대통령은 갑작스럽게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가해자를 쏙 뺀 '제3자 변제안'을 발표했다. 9일만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사이 국민들을 설득하려는 시도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 흔한 '대국민 소통'이라든지, 기자회견이라든지 하는 것도 없었다. 도어스테핑을 폐기한 마당에 그런 자리를 만들 이유조차 느끼지 못했을지 모른다. 대신 일본 최대 일간지 <요미우리> 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해 '일본인'들에게 먼저 설명을 했다. 한국의 시민들은 어리둥절했다.
"지지율 0%, 1%가 나와도 바로잡아야 할 건 바로잡고 싶다", "어차피 할 것 아니냐. 그러면 미리 매를 맞는 게 낫지, 내년 총선 앞두고 할 것인가."
매를 맞을 줄 알고 있었고, 지지율 0%, 1%로 떨어질 것까지 각오했다고 한다. 이걸 모두 예상했다면 '제3자 변제안'에 대해 미리 국민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저는 현명하신 우리 국민을 믿습니다."(3월 21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 스스로 내린 결단을 '역사적 결단'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그동안 고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뒷북 고뇌'다. 한국 시민들의 평가는 박할 수밖에.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은 이번 사안을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 하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일본 야당과 한국 야당을 비교해 '국익 앞에 정파가 없는' 일본 야당을 보며 부끄럽다고 했다. (대통령실은 '부끄럽다'가 아니라 '부럽다'는 말을 한 것 같다고 했지만, 일본 야당을 보며 부끄러워하든, 일본 야당이 부럽든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도 틀렸다. 일본 야당이 윤 대통령의 결단을 받아들인 여당의 기시다 총리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일본 국익'에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익의 문제를 '정파'의 문제로 치환했다. 이것은 여당과 야당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문제다.
만약 기시다 총리가 육성으로 통절한 반성을 언급하고, 강제징용 가해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반성과 성의를 표했다면, 한국 야당이 일본으로 건너가 궁지에 몰린 기시다 총리를 위해 기꺼이 일본 야당을 설득했을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면 윤 대통령의 외교 레버리지는 강해졌을 것이고, 매를 미리 맞을 일도 없었을 것이며, 지지율 0% 가 될 걸 걱정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윤 대통령이 '일본의 야당'을 언급했다니 하는 말이다. 지금 한국 정가와 일본 정가는 분위기와 상황 자체가 180도 다르다.
정확히 하자. 일본 야당은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고, 한국 야당은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부끄러운" 한국 야당은 이번 대일 외교에 대해 10명 중 6명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여론을 따라간다. 어떤 야당이 집권 세력의 실정에 동조하겠는가. 이건 윤 대통령이 미워서가 아니다. 윤 대통령의 '확신'에 동조하자마자 지지율 하락을 각오해야 할 일이란 걸 아는, 정치적 생존 본능 같은 것이다.
일본의 경우를 보자. <요미우리> 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강제징용 해법안에 대한 긍정 평가는 58%를 기록했다. 대략 60% 정도가 기시다 후미오의 이번 대한국 외교를 긍정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야당이 여기에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이 당연한 사실을 대통령은 갑자기 '발견'이라도 한 모양이다. 그런데 양국 정당의 정치적 생존 본능을 두고 '일본은 여야 한목소리로 환영하는데, 한국 야당만 반대하고 있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먼저 주면 나중에 받을 것이다'라는, 외교 초짜의 '나이브'한 생각은 그렇다치더라도, 이건 정치마저 지나치게 '나이브'하게 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 한국 야당이 문제라 치자. 그런데 대통령은 이번 사안을 두고 '한국 야당'을 설득하려고 직접 만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나? 없었다. 엉뚱하게 일본 야당만 만났다. '한국 언론'을 설득하려고 직접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나? 없었다. 그런 기회가 될 수 있었을 도어스테핑은 자체 폐지했다. '한국 국민'의 마음을 열기 위해 대국민 담화 한번이라도 발표했었나? 없었다. 그리고나서 일본인의 마음을 열었다고 자찬하고 '일본 야당'을 보며 스스로 우리 정치가 부끄럽다고 한다. 혹은 일본 야당이 '부럽다'고 한다. 다 걷어내고 나면 '한국 야당 설득'마저 일본 야당에 '외주'를 주고 있는 초라하고 기묘한 골자만 남는다.
윤 대통령은 <요미우리> 신문과 인터뷰를 통해 "일본인은 정직하다"고 했다. <NHK>는 관방부장관의 말을 빌어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과 회담에서 독도 문제와 위안부 문제를 언급했다고 흘리고, <마이니치> 신문은 일한의원연맹 누카가 회장이 윤 대통령에게 일본산 멍게 수입 재개를 요청했다고 보도하고, <산케이> 신문은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에게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제한 철폐를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기시다 총리나 일본의 기자들, 그리고 일본의 정치인들도 '정직한 일본인'일진대, 왜 대통령실은 일본 언론의 보도를 두고 "독도는 언급되지 않았다", "멍게라는 말은 안 나왔다"고 해명하기에 급급한가. 왜 일본의 언론과 정치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도 윤 대통령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이를테면 일본인은 정직하다. 한국인도 정직하다. 그런데 정치의 영역에서 '정직'은 국익 앞에서 멈춘다. 상식이다. 윤 대통령은 정말 나이브한 것인가?
윤 대통령의 말처럼 '국내 정치'에 이번 일을 활용하고 있는 세력은 분명히 있다. 극우파를 달래기 위해 말해봐야 택도 없는 '독도' 이야기를 꺼내고, '위안부 합의' 이야기를 꺼냈다고 언론을 통해 흘린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영향으로 한국의 수입 금지 지역에 포함된 이바라키현이 지역구인 일본 의원은 안될 걸 알면서도 '멍게 수입 재개'를 윤 대통령에게 요구하고 이걸 언론에 흘린다. 아마 누카가 후쿠시로 의원은 <마이니치> 신문 칼럼에 실린 '멍게 스토리'를 지역구 주민들에게 뿌릴 것이다. 윤 대통령이 말한 '한일 관계'를 '국내 정치'에 활용한다는 건 바로 이런 걸 말한다. 일본 자민당은 4월에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내 정치'에 활용할 선물을 일본 집권당에 안겨주고 있다. 일본 정치인들의 온갖 민원이 한국 대통령에게 쏟아진다.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을 보면, 정치를 마치 국익의 걸림돌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마치 출구가 없는 미로 속에 갇힌 기분" 속에서 내린 고독한 '결단'은 정치보다 우위에 있는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편한 길을 선택해서, 역대 최악의 한일관계를 방치하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지만, 정치적 이익을 포기하고 일본이 깜짝 놀랄만한(한국도 다른 의미로 깜짝 놀라긴 했다.)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정치적 이득'은 선거를 앞둔 일본 자민당 내각이 고스란히 주워가고 있다.
국민도 언론도 없었던 윤 대통령의 국무회의 독백은, 시점도 방식도 내용도 모두 다 틀렸다. 슬픈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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