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중국 사신 맞느라 조선, 등골이 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중국 사신 맞느라 조선, 등골이 휘다

[2023년 1월 서울학교는 <한양의 사신맞이 현장>]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87강, 2023년 1월의 답사는 중국을 ‘큰 나라’로 모신 조선이 중국 사신을 극진히 맞이하며 치러진 의식과 베푼 접대의 내용, 그리고 그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갑니다. 비록 역사적 장소의 대부분이 소멸되어 표지석과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계묘년 새해를 맞이하여 ‘작은 나라’ 조선의 사신맞이 실상을 살펴보며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경회(慶會)는 '경사스런 연회'란 뜻. 경회루는 태종대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지었는데 차츰 중국 사신 접대는 물론 왕실 잔치, 군신 간의 회합 등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문화재청

서울학교 제87강(제5기 제9강)은 2023년 1월 8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홍제역 2번출구 지하 역구내에 모입니다.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홍제원-사신당-무악재-모화관-영은문-서지-경기감영-돈의문-태평관-남별궁-광화문월대-광화문-근정전-경회루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함께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합니다.

▲1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양의 사신맞이 현장>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칙사대접

조칙(詔勑)은 천자가 내리는 명령, 또는 그 명령을 적은 문서입니다. 조(詔)는 비춘다는 뜻으로 우매하여 일의 마땅함을 알지 못하여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밝혀 보여주기 위해 천하에 반포하는 것이고 칙(勅)은 관리가 태만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명령입니다. 제후의 나라에서 조칙의 봉영 의식은 조정에서 문무백관이 도열하여 거행되었습니다. 또한 조칙을 지니고 온 사신은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 맞이하고 머무는 동안 여러 차례의 향응을 베풀고 돌아갈 때는 많은 품목의 선물을 챙겨줍니다. 그야말로 ‘칙사(勅使)대접’입니다.

조선이 사대한 중국은 건국 초기에는 명나라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청나라였는데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명나라와 한낱 오랑캐로만 여겼던 청나라에 대한 사신맞이의 내용은 양과 질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명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첫째 황제나 황태자의 즉위, 책봉, 부고를 전하거나 둘째 중국과의 외교문서인 예부자문(禮部咨文)을 전달하고 셋째 조선 국왕이나 왕세자에 대한 책봉 의식을 주관하거나 넷째 공물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명의 사신은 유독 환관이 많았는데 이들은 탐욕스럽고 제멋대로 굴었으며 또 갖가지 무리한 요구를 하여 조선 조정은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사신단이 한 차례 쓸고 가면 국고는 거덜 났고 특히 사신단이 쓸고 지나가는 평안도 일대는 접대비 확충을 위해 세금을 중앙에 납부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써야 할 정도였습니다.

청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초기에는 조선이 변심할까 견제하려는 목적에서였고, 청이 중원 대륙을 장악하고 내부의 반청 세력을 제거한 뒤부터는 책봉이나 부고와 같은 의례적인 것과 조선인이 청의 국경을 넘는 월경문제 해결과 국경선 획정을 위해서였습니다.

청에서도 빈번하게 사신들이 조선에 왔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과거 명나라 사신들과는 달리 청 사신에게는 접대가 많이 소박해졌기 때문에 상세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접대가 소박했던 이유는 먼저 조선에서 청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오랑캐였고 이미 망한 명에 대한 일편단심이 여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명의 퇴폐한 황실에 비해 청의 군주들은 상당히 절제할 줄 알았고 이는 관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청은 조선 사신으로 반드시 만주인을 임명했는데 과거 명 사신들의 만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접사와 선위사 그리고 반송사

원접사(遠接使)는 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관직 또는 그 관원이며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반송사(伴送使)라 개칭하여 다시 의주까지 환송하게 하였습니다. 조선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하여 중국에 가는 사신뿐 아니라, 조선으로 오는 중국 사신의 접대에도 정성을 들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중국 사신 접대 장소는 한양 밖과 안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전자는 원접사 또는 접반사가, 후자는 영접도감의 관반이 지휘하였습니다.

원접사는 국경에서 처음으로 칙사를 맞이하는 접대 관원으로서, 체류 기간이나 돌아가는 여정에도 간여하므로 신중하게 선발했습니다. 태종대 이후 조선말까지 정2품 이상으로 임명되었는데, 병자호란 이후의 대청 관계에서는 대명 관계에서보다 덜 중시되었습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태조 대까지는 접반사로 부르다가, 태종 초에 원접사로 바꾸었고, 점차 칙서를 가져오는 칙사는 정2품 이상의 원접사가, 그 밖의 사신은 종2품의 접반사가 맞이하도록 하였습니다.

중국의 공식문서인 패문(牌文)이나,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또는 풍문에 의해 칙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당일로 원접사가 선발되어 종사관 등 수행원을 거느리고 국경인 의주로 파견되어 칙사를 맞이하였습니다. 이후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에서 각 지역 선위사, 영위사와 지방관들을 지휘하며 사신 일행을 대접하며 호송하였고 사신이 한양에 머무는 동안 각종 연회와 행사에 사신 일행과 함께 참석하였으며 대부분 사신이 돌아갈 때 국경까지 반송사로 전송하였습니다. 이때 원접사는 사신에 대한 정보를 조정에 보고하고, 한편으로 사신과 조선 정부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환관 출신 사신이 대부분이어서 그들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풍채와 위엄을 갖춘 인물을 임명하였으나, 문관 출신 사신이 주로 왔던 성종 대 이후에는 사신과의 문학적 교류가 중시되어 대제학 등 문장력이 있는 원접사를 파견하였고, 수행원도 시문을 잘 짓는 관원을 스스로 뽑아가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연이은 사신과 그에 대한 접대 행렬로 국고에 부담이 가고 백성들이 곤궁에 처하자, 원접사의 수행원을 줄이고 폐단을 방지하려는 조처가 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정의 반청 감정으로 인하여 원접사는 점차 관직에서 물러나 있거나 왕에게 미움을 받는 관원들이 임명되기 시작하였고 사신을 접대하는 각종 연회도 정지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개항 이후인 1890년(고종 27)까지도 원접사는 계속 임명되었습니다.

선위사(宣慰使)는 조선 시대에 여러 나라의 사신이 입국하였을 때 그 노고를 위문하기 위하여 파견한 관리로 중국 사신에 대해서는 원접사와 더불어 의주, 안주, 평양, 황주, 개성부의 5개 처에 선위사를 파견하였고, 일본 및 유구 사신에 대해서는 선위사만을 보내어 영송하였습니다. 중국 사신에 대한 선위사는 2품 이상의 조관을, 요동 도사의 선위사와 일본, 유구의 사신의 선위사는 정3품 이상의 조관을 임명하였습니다.

▲독립문(오른쪽) 옆에 남아 있는 영은문(迎恩門) 주초석(주춧돌).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인데 청에 대한 사대 굴욕외교의 상징으로 철거되고 주초석만 남아 있다.Ⓒ문화재청

중국 사신에게 베푸는 향응

중국 사신이 체류하는 동안 먼저 영접도감(迎接都監)을 설치하고 여러 종류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도착 축하연인 하마연(下馬宴), 도착 다음 날까지 1박 2일간 베푸는 익일연(翌日宴), 왕이 대전에서 직접 베푸는 청연(請宴),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위연(慰宴), 사신이 떠나는 날이 정해진 후 베푸는 상마연(上馬宴), 사신이 떠날 때 베푸는 전별연(餞別宴) 등이 있었습니다.

조선이 이처럼 사신들에 대하여 저자세를 이어간 것은 고질적인 사대주의 탓도 있지만, 중국에 아쉬운 소리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조선 전기 195년간은 창업 군주 이성계를 고려시대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왜곡한 <대명회통> 기록을 고치려고 명나라에 끌려다녔으며 중종, 선조, 광해군, 인조처럼 정통성에 자신이 없는 왕들도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절차

1.사신이 온다는 통보가 오면 먼저 길부터 닦아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도로 사정이 상당히 열악했기 때문에 사신이 올 때마다 도로를 정비해야 했는데 이러는 과정에 백성의 경작지를 많이 훼손하였습니다.

2.사신의 원활한 통행과 접대를 위해 칙사 영접 전담 기구인 영접도감을 설치했습니다.

3.사신이 국경을 넘으면 의주까지 원접사가 파견되어 그들을 맞아 서울까지 인도하였습니다.

4.사신이 지나는 안주, 평양, 황주, 개성 등 주요 도시에 선위사를 보냈으며 평양에서는 단군묘, 기자묘, 동명왕묘에 참배도 하였습니다.

5.사신은 홍제원에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6.무악재를 넘으면 왕이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모화루까지 나와 사신을 맞이했는데 이때 사신이 조칙을 대청에 내놓으면 길복을 갖춰 입은 왕이 대청 앞의 행각에 올라 사배례의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7.사신이 지나가는 길가에는 환영하는 뜻으로 색실, 색천, 색종이를 매달았습니다.

8.왕이 사신을 영접하여 궁궐에 이르면 사신이 먼저 입궁하고 조선왕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9.사신이 황제의 칙서를 조선왕에게 전하면 왕은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예[叩頭禮]를 행하였고 사신이 칙서를 낭독하면 왕은 꿇어앉아 듣습니다.

10.의식이 끝나면 태평관으로 자리를 옮겨 다례를 행하고 환영 만찬인 하마연을 왕과 사신이 동서로 나눠 앉아 즐겼는데 익일연으로 이튿날까지 계속됐습니다.

11.사신이 머무는 동안 재상이나 승지들이 매일 태평관으로 문안 인사를 가고 수시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12.사신이 떠나기 전날 왕이 경회루에서 다례를 행한 후 태평관에서 전별연을 베풀었습니다.

13.떠나는 당일 왕은 모화관까지 나가 전송하고 영의정 등 재상들은 벽제역까지 전송하였습니다.

14.특히 왕은 남면(南面)하는 게 원칙이지만 중국 사신을 만났을 때는 동쪽을 보고 맞절을 했습니다. 조선의 왕이 남면으로 대하지 못한 대상은 고종황제 때의 이토 히로부미를 제 외하면 중국 사신뿐이었습니다.

▲광해군 즉위년(1609년)에 선조의 국상과 광해군의 책봉을 위해 조선에 온 사신 행렬. 그 중 명나라 사신 행렬도 부분(<영접도감사제청의궤> 중 천사반차도)Ⓒ서울대규장각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홍제원

홍제원(弘濟院)은 985년(고려 성종 4)에 승려 정현이 창설하였다고 전하는데 원에는 누각이 있어 중국 사신이 서울로 들어오기 전에 이곳에 머물러 옷을 갈아입었다고 합니다. 중종 때 제릉행행시에 세자가 이곳에서 진연을 청하기도 한 것을 보면 다른 원에 비하여 그 규모가 컸을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1538년(중종 33)에 막대한 풍재를 입고 난 홍제원에 대하여 왕에게 그 실태를 보고한 것에 따르면 “홍제원은 대청 두 칸의 기와가 바람에 날려 깨졌고 뒤편 마루판 두 쪽이 솟구쳐서 앞 뜨락에 떨어져 있고, 앞쪽 난간이 모두 울려 밀려났습니다. 동서 행랑채는 지붕의 북쪽 모서리 판자가 다 걷혔고 기와가 깨졌고, 뒤편 대청의 동쪽 모서리 판자도 다 걷혔습니다”고 밝히고 있어서 당시 홍제원은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초에는 한성부 안에 여자를 두고 술을 파는 색주가를 허가하지 않았는데, 전해오는 바로는 세종 때 홍제원에 처음으로 색주가 촌을 두게 했습니다. 그 내용인즉 조선시대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 일행 수백 명은 1년에 대 여섯 번 무악재를 넘어 수석과 계곡이 좋은 홍제원에서 쉬게 됩니다. 이곳에는 환송 나온 사람들이 미리 차일을 치고 음식을 마련하여 기생을 부르는 등 사신과 부사 등에게 요란한 환송연을 베풀어 줍니다. 그러나 사신을 수행하는 하속들은 그들끼리 술잔만 들게 되어 불평이 많았습니다.

이를 목격한 정승 허조가 “홍제원에 노래하는 여자를 배치하여 사신을 수행하는 하속들도 위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진언하자, 세종이 곧 한성부에 영을 내려 홍제원에 색주가를 두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홍제원에 색주가가 생긴 뒤로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행인에게는 떡을 팔려는 떡집도 생겨났는데 떡 중에서도 인절미를 잘 만들었으므로 ‘홍제원 인절미’가 특히 유명하였다고 합니다.

홍제원 안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볼모로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생명과 같은 정조를 잃은 부녀자들을 마냥 환대할 수 없었던 조정은 '과거를 씻는다'는 의미로 이들에게 연못에서 몸을 씻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인조반정 때에는 김류, 이귀, 최명길, 김자점, 이서, 이괄, 김경징 등 문무 장사 200여 명을 포함한 병력 1천여 명이 홍제원 터에 총집결하여 반정의 기치를 들고 도성으로 진격하여 광해군을 축출하였습니다. 1648년(인조 26) 청인이 홍제원에 역참의 설치를 요구하여 인경궁의 자재를 철거하여 홍제원에 관우를 지었는데 이로 인해 인근 백성의 곤폐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한편 홍제원은 홍제원 건물을 포함한 그 일대의 터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며 넓고 평평한 땅이었기 때문에 여러 용도로 활용되었습니다. 세종대에는 보제원과 이태원 외에 홍제원에도 진제장(賑濟場)을 추가로 설치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으며 세조, 성종, 중종, 현종, 숙종, 정조대에도 홍제원 진제장을 확대하여 기민을 구휼하였습니다.

또, 외방과 통하는 길목이므로 표류민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 전 홍제원으로 올려보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현종 대에는 제주도에 표류해 온 중국인을 홍제원으로 압송해 왔으며 정조대에는 전라도에서 올려보낸 유구 표류민을 홍제원에서 접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홍제원 접대가 너무 간소하다고 여겨 새로 지은 경기감영으로 옮겨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홍제원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어 한동안 홍제원에는 건물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대신 홍제원 터에 민충단을 세워 임진왜란 때 죽은 명나라 장수들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홍제원 건물이 복구된 것은 청과 화의를 맺은 후 양국이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면서부터입니다.

1895년 갑오년에 역원제가 폐지되면서 홍제원도 그 기능을 상실하고, 홍제원 일대 약 2,000평에 경성목장이 들어섰습니다. 본래 넓고 평평한 지대로서 하천을 끼고 있어서 목장으로 사용하기 적합했습니다.

▲위와 같은 사신 행렬도 중 주선 관리들의 행렬도 부분(<영접도감사제청의궤> 중 천사반차도)Ⓒ서울대규장각

한양도성의 들머리 무악재

무악재(毋岳峴)는 인왕산과 안산 사이의 안부를 넘는 고개로, 그 명칭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전해져 옵니다.

첫째는 삼각산 인수봉이 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負兒岳]이므로 아이가 뛰쳐나오지 못하도록 지명으로 비보책을 썼는데 아이에게 떡으로 달래고[餠市峴], ‘하지 말라[毋岳]’ 하고 ‘혼내준다[伐兒峴]’며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이때 안산을 달리 무악이라고 하였고 그 고개 이름을 무악재라고 하였답니다. 둘째는 조선의 도읍지를 정할 때 하륜이 안산 남쪽 자락을 강력히 주장하므로 태조가 무학대사를 동반하여 답사에 나섰는데 이런 연유로 무학재라고 했다가 무악재로 바뀐 것이라 하고 셋째는 산적과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여러 사람이 모여서 고개를 넘어갔다고 모아재로 불리다가 모악재, 무악재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영조가 숙종의 명릉 역사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서 부왕을 그리워하며 추모했다고 추모현, 모화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 모화현, 고개 북쪽에 신라시대 사찰인 사현사(沙峴寺)가 있어 모래재로, 두 개의 봉우리로 돼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말안장같이 생겼다고 해서 길마재로도 불렸다고 합니다.

사신의 무운을 비는 사신당

사신당(使臣堂)은 조선시대의 굿당으로, 중국을 오가는 사신이 산적과 호랑이를 피해 무악재를 무사히 넘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렸던 곳입니다. 원래 서대문구 홍제동 옛 서울여상 부근(현재는 청구아파트)에 있었으나 1995년 은평구 진관내동 못자리골로 옮겨갔는데, 이곳에 ‘중국사신도’ ‘최영장군도’ ‘뒤주대왕도(사도세자)’ ‘삼불제석도’ 등 무속도 4점과 봉축 현판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최영 장군은 태조 이성계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 고양시 대자동에 묻힌 이유로 고양과 구파발 일대 무당들이 신으로 받들고 있고, 뒤주대왕은 영조의 맏아들 사도세자로 반대당의 모함을 받아 뒤주에 갇혀 죽은 인물이며, 삼불제석은 도리천에 살면서 인간의 재복, 수명, 자손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봉축 현판에는 왕과 왕비, 세자와 대원군 부부의 안녕을 비는 발원문이 적혀 있어, 이곳이 왕실 인사들이 출입하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대의 상징 모화관, 영은문, 서지

모화관(慕華館)은 1407년(태종 7) 고려시대 개성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돈화문 밖 서북쪽에 건립하였습니다. 이곳은 중국으로 가는 조선 사신을 보내거나 조선에 오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장소로 편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석린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름을 중국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모화루라 하였습니다. 모화루 앞에는 영은문을 세우고 남쪽에 못을 파 연꽃을 심었습니다. 여기에는 낮은 담을 쌓고 버들을 심었습니다. 1429년(세종 11)에 규모를 확장하여 개수한 뒤 이듬해 모화관이라 개칭하였고 1502년(연산군 8)에는 중국 사신 영접에 여악(女樂)을 사용케 하였습니다.

모화관은 조선이 큰 나라를 섬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중국 사신이 올 때면 조선의 국왕은 모화관까지 나와서 중국 황제의 칙서를 맞이한 뒤 경복궁에서 칙서를 받았습니다. 또한 조선의 사신이 중국의 황제를 내린 칙서를 가지고 돌아올 때, 왕이 직접 모화관에 나가거나 세자가 나가 칙서를 받았는데 이는 충성을 맹서하는 의식의 일종입니다. 또한 중국사신이 떠날 때면 왕이 모화관에 나와 전송하였습니다.

모화관은 원래는 누각 형식으로 지어져 모화루라 불렀으나, 세종 때에 모화관으로 바꿔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무과시험이 열리거나 군사훈련이 있으면 왕이 참석하여 관람하기도 하였는데 왕은 군비의 상태를 확인하고 좋은 무관들을 뽑고자 했던 것입니다.

모화관은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난 뒤 청나라의 영향력이 떨어지자 중국에 대한 사대의 상징이라 하여 폐지되었고 영은문 역시 김홍집 내각에 의해 철거됨으로써 중국에 대한 사대 외교는 종지부를 찍습니다. 1896년 독립협회가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이라 고쳐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으며 정부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영은문(迎恩門)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입니다. 1407년(태종 7)에 송도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에 모화관으로 개칭하여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습니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 등 세 정승이 아뢰어 모화관 남쪽의 홍살문을 개축하여 청기와를 입히고 영조문(迎詔門)이라는 액자를 걸었습니다.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정총이 칙사가 올 때에는 조(詔), 칙(勅), 상사(賞賜)를 가지고 오는데, 영조문이라 함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고 영은문이라 써서 걸도록 하여 이에 따라 이름을 고쳤습니다. 임진왜란 후인 1606년(선조 39) 영은문을 재건한 뒤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와서 액자를 다시 써서 걸었습니다. 그 편액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입니다. 1884년 갑오개혁의 실패로 일본 세력과 개화파들이 일시적으로 물러나고, 개화파 김홍집 내각은 영은문을 청에 대한 사대 굴욕외교의 상징으로 보아 철거하고 주초만 남겼습니다. 1896년 7월에 독립협회가 조직되었고, 서재필은 자주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영은문 자리에 세울 것을 발의하였으며, 독립문은 1896년 11월에 준공되어 1897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서지(西池)는 모화관에 딸린 연못으로 지금의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습니다. 1407년(태종 7)에 만들어졌는데, 이 해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모화루를 세우고 그 남쪽에 연못을 파게 하였습니다. 연못이 완성된 뒤에는 개성 숭교사의 못에 있는 연뿌리를 배로 실어다 심었고, 연못에 많은 물고기를 키웠는데 그 먹이용 쌀이 매월 10두나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반송정 옆에 있었으므로 반송지라 하였으나, 서대문 밖에 있다 하여 흔히 서지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에는 천연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도 있었으나, 지금은 천연동이라는 행정동 이름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천연정은 <한경지략>에 “돈의문 밖에 서지가 있다. 본래 이해중의 별장이었는데, 지금은 경기감영의 중영 공청으로 되어 있다. 연꽃이 무성해서 여름철에 성안 사람들이 연꽃 구경하는 곳으로 여기가 제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한성에는 서지 외에 동대문 밖에 동지, 남대문 밖에 남지가 있었습니다. 세 연못 모두 연꽃이 피었는데, 그 가운데 서지의 연꽃 규모가 가장 크고 무성하였습니다. 서지의 연꽃 구경은 천연정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중국 사신이 한양도성에 드나들던 돈의문

돈의문(敦義門)은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西大門]이며 한양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제1 간선도로의 시발점으로, 중국 사신이 오면 이 문을 통하여 도성에 들어왔으며 국왕도 이 문을 통하여 모화관까지 나가 사신을 맞이하는 중요한 문이었습니다.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태조 5)에 건립되었으며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 중 의(義)를 넣어 돈의문이라 하였습니다. 축성 당시에는 사직동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건립되었는데 지금의 위치보다는 훨씬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413년(태종 13) 풍수 학생 최양선의 상소로 돈의문을 폐쇄하고 그 남쪽에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습니다. 서전문을 열면서 왕래를 편하게 하려면 권신이었던 이숙번의 집 앞길이 적당하였으나, 이숙번이 권세를 이용하여 보다 남쪽에 있는 길로 결정하게 하였습니다. 이숙번이 죽은 후 세종이 즉위하여 그런 사실을 알고 인덕궁 대문 때문에 굽은 길로 되었던 것을 인덕궁 문을 옮겨 곧은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인덕궁은 상왕으로서의 정종 거처로 경희궁이 있던 서쪽 언덕에 있었던 것으로 사직터널 위 우묵한 곳이 바로 서전문의 터로 추정됩니다.

1422년(세종 4)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세종이 세운 돈의문을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新門]'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1711년(숙종 37) 개축하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 지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1915년, 일제는 경성을 개발하며 전차 궤도를 복선화하면서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그냥 두고 문 양쪽 성벽만 없애 전차 노선을 유지하였고 돈의문만 철거했습니다. 철거 과정에서 돈의문의 편액만은 남았는데, 창덕궁의 행각에 보관해 오다가 1992년에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수장고,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을 거쳐 2014년부터 한양도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돈의문은 다른 대문과 달리 건립 사연도 구구하다 보니 여기서 일어난 일도 구구하였습니다. 하나는 인종반정 이후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도성을 침공하기 위해 이 문으로 들어왔다가 토벌군에 쫓겨 이 문으로 다시 나가려고 했지만 문이 굳게 잠겨 간신히 광희문으로 도망갔다가 이천에서 부하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1895년 8월 일본 낭인과 군인들이 명성왕후를 시해하기 위해 대원군을 만났던 곳이 이 문밖이었습니다. 이들 일행은 파루종이 울리면서 서대문이 열리자 곧바로 경복궁을 침범하여 명성왕후를 시해하였습니다.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이었던 돈의문은 사라지고 유일한 흔적인 현판만 남아 있다.Ⓒ국립고궁박물관

중국 사신이 머물던 태평관과 남별궁

태평관은 조선 전기에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설치한 숙소로 1393년(태조 2) 그동안 중국 사신의 숙소로 사용하던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명칭을 태평관으로 바꿨으며 한양으로 천도한 이듬해인 1395년(태조 4)에 여러 도의 인부 1000명을 징발해 건립하였습니다. 중앙에 전(殿)이 있고 전의 동서쪽으로 행랑채가 있었으며 전의 뒤쪽으로는 누각이 있었습니다, 중중 때의 문정왕후와 선조 때의 인목왕후가 이곳에서 성혼식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기간 중 많이 파괴돼 임란 후 복구 논의가 있었으나 국고 부족으로 수축하지 못하고 남아있던 일부 전각들만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이끌고 온 이여송이 남별궁을 숙소로 삼은 후부터 남별궁이 중국 사신이 머무는 주된 숙소로 사용되었고, 태평관은 주로 격이 떨어지는 중국의 차관(差官)을 접대하거나 간혹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로도 이용하였습니다.

남별궁은 태종이 둘째 딸인 경정공주의 남편 평양부원군 조대림에게 이 땅을 주면서 소공주댁으로 불렸으나 경정공주 사망 후 국가 소유였다가 1583년(선조 16) 선조가 이곳에 200여 칸의 별궁을 지어 셋째 아들인 의안군 이성에게 하사했으나, 그가 요절하면서 빈집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큰 저택은 소실되었으나 이곳만은 전란의 화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왜와 명의 장수들 숙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실록>에 따르면 1592년 5월 1일 임란 초기 한양을 점령한 왜장 우키다히다이에(宇喜平秀家)는 처음엔 종묘에 머물렀는데 밤중에 괴상한 일이 생기고 병사들이 이유 없이 죽으니 조선 종묘의 신령을 두렵게 생각하고 종묘를 태워버리고 남별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또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이여송, 양호 등의 숙소로도 사용하였습니다. 남별궁은 임란 후에도 복구되지 않은 태평관을 대신해 중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곳으로 사용되다 보니 조선 후기까지도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사신맞이 환영 공연장, 광화문 월대

광화문 월대에서는 왕실의 환궁과 장례와 같은 주요 행사, 임금이 친히 주재하는 무과 과거시험, 무관들의 갖가지 군사 시범과 체력 시험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백성들의 억울함을 전하는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이 이루어진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환영 행사의 장소이기도 했는데 이때는 광화문 앞에 산대(무대)를 설치하고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중국 사신을 위해 광화문 앞 월대에 마련된 산대에서 펼쳐진 공연과 관련하여 몇 가지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488년(성종 19)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동월은 <조선부>에 “광화문 앞에 비단을 둘러 꾸민 산대(무대)는 그 높이가 광화문과 같고, 지극히 교묘하게 조성됐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외줄타기 하는 사람은 두 명의 동자를 세우고 춤을 추며 줄을 탄다. 가볍기가 파도 위를 타는 신선 같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1539년(중종 34)에는 중국 황태자의 책봉 사실을 알리려고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이 중종이 경복궁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광화문 앞 산대놀이에 넋이 빠져 있다가 한참 뒤에야 궁궐로 들어갔다고 하며, 1545년(인종 1)에는 중국 사신을 위해 무대를 만들고 각종 공연을 펼치던 중 무대 모퉁이가 무너지는 바람에 구경꾼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경회루 2층 내부. 중앙으로부터 3단으로 차츰 높이가 낮아지고 각 단마다 문을 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문화재청

중국 사신맞이 행사가 치러진 근정전과 경회루

근정전(勤政殿)은 조선 시대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으로 조선왕조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건축물입니다. 정도전은 근정전의 이름을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된다”는 뜻인 ‘근정(勤政)’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근정전은 문무 관료와 왕세자가 국왕에게 올리는 조하의식을 행하거나, 국왕의 생일 등 큰 잔치가 열린 곳이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국가 의례가 행해지는 곳이기도 하며 교서의 반포, 관례와 혼례, 연회, 과거시험 등 각종 부정기적 행사도 여기에서 열렸습니다.

근정전은 1395년(태조 4)에 최초로 만들어졌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임진왜란까지 근정전에 관한 큰 정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창건 당시의 형태가 대체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존하는 근정전은 1867년(고종 4) 11월에 중건한 것으로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대대적인 지붕 부분 해체 수리공사가 있었습니다. 마당에 박석을 깔아 포장한 것은 세종대의 일이며, 마당에 놓인 품계석은 조선 전기에는 없던 것으로 1777년(정조 1)에 최초로 창덕궁 인정전에 품계석을 놓은 것을 계기로 고종 대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근정전 북측 벽 중앙부에는 어좌가 놓여 있으며 계자난간을 둘렀고 연잎 문양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어좌는 사각형으로 전후좌우에 계단을 설치하였고 국왕의 자리 뒤에는 일월오악을 그린 병풍을 세웠습니다. 하늘과 음양을 표상하는 해와 달, 그리고 땅을 표상하는 다섯 봉우리를 그려 넣은 병풍을 배경으로 만인지상의 국왕이 그 앞에 앉음으로써 우주를 구성하는 ‘천(天) 지(地) 인(人)’의 세 요소를 완성하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천정은 소란반자(小欄반자)로 장식하여 국왕의 자리를 둘러싼 모든 요소들이 일체화된 공간감을 줍니다. 소란반자의 한가운데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희롱하는 ‘쌍룡희주’의 모습을 새겨 놓았습니다.

근정전은 2중의 월대 위에 놓여 있습니다. 2중의 월대는 조선 궁궐 정전의 공통된 형태지만 근정전 월대는 특별히 석조 난간과 하엽동자를 사용해서 장식하였습니다. 근정전 월대의 모퉁이와 난간의 법수 머리에는 다양한 종류의 상서로운 짐승이 올라앉아 있는데 이들을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신’으로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이고, 둘째는 ‘십이지신’의 열두 동물이며, 마지막으로는 상서로운 짐승에 속하나 그 종류가 명확하지 않은 동물들입니다. 이들 중에서 사신은 근정전 월대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근정전 월대의 상층부에는 남쪽 계단의 법수 머리로 주작을, 북쪽에는 현무를 세웠고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두 개의 계단이 있는데, 그중 북편의 계단에 청룡과 백호가 자리 잡았고 아래층 월대 난간은 대부분 십이지의 동물로 채워져 있습니다.

전체 권역은 중심 건물인 근정전과 근정문 그리고 동, 서, 남쪽의 행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북행각은 중앙에 솟을대문으로 사정문이 있으며 행각은 사정전 영역에서 사용하도록 문이 사정전 쪽에 있고 근정전 쪽은 화방벽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행각은 마당을 향한 면에 벽이 없이 기둥만 있는 월랑으로 구성되었고 동, 서행각에는 관청과 창고가 배치되었는데 동행각에는 관광청, 양미고, 융문루가 있고 서행각에는 향실, 예문관, 내삼청, 충의청, 융무루 등이 위치하여 용도에 따라 방이나 마루, 창고로 짜여 있습니다.

▲독립관(가운데)과 독립문의 옛 모습.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축하고 독립문을 새로 세웠으며 영은문은 훼철되고 주초석만 남았다.Ⓒ국립중앙박물관

경회루(慶會樓)는 태종대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지었는데 차츰 중국 사신 접대는 물론 왕실 잔치, 군신 간의 회합,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등 국가행사 장소로도 사용했으며 이곳에서 활쏘기나 과거시험도 보았습니다.

경회루의 바깥 돌기둥은 모기둥, 안쪽 돌기둥은 원기둥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天圓地方]”라는 사상을 나타낸 것입니다. 2층 누마루의 외진, 내진, 내내진 공간도 각각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가장 안쪽인 내내진은 천지인 삼재를 상징하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여덟 개의 기둥은 천지만물이 생성되는 기본인 주역의 팔괘를 상징합니다. 내진은 모두 열두 칸인데, 1년 열두 달을 상징하고, 매 칸마다 네 짝씩 열여섯 칸에 달린 문짝 64개는 <주역>의 64괘를 상징하고 외진을 둘러싼 24칸은 1년 24절기와 24방(方)을 상징합니다. 이같이 경회루에 사용된 기둥 수, 칸 수, 창 수, 계단 수, 부재 길이에 이르기까지 계절과 시간 및 음양과 주역의 원리를 적용하여 당시 유가의 세계관을 건축 형식으로 담아낸 것이 경회루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1865년 정학순이 쓴 <경회루전도>, 즉 <경회루36궁지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경회루의 연혁을 살펴보면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하고 동서 128m, 남북 113m에 달하는 방지(方池)를 조성한 후 당시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이 건설을 맡아 8개월 만에 3층 높이 복층 지붕 전각인 경회루를 완공했습니다. 현판은 당시 세자이던 양녕대군에게 쓰도록 했으며 ‘경회(慶會)’라는 이름은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서 만난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1474년(성종 5) 경회루가 기울어 위태로워지자 다시 수리하였는데 이때 돌기둥에 용을 새기고 구리로 취두를 만드는 등 이전보다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 연산군 때 경회루 연못의 만세산에 갖가지 궁궐 모형을 만들어 놓고 금은보화로 장식하였으며, 연못에 황룡주(黃龍舟)라는 배를 띄우고 놀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중종이 반정 이후 모두 철거하였으며, 이로써 경회루는 다시 본모습을 찾아갔습니다. 돈이나 물건 따위를 함부로 마구 써버린다는 '흥청망청'이란 어원은 연산군이 '흥청'이라는 기생들을 모아놓고 경회루에서 술잔치를 벌이던 것에서 유래합니다.

1521년(중종 16) 경회루를 수리하고 청기와를 덮으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함께 소실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경복궁에는 근정전의 월대, 경회루의 연못과 돌기둥, 광화문의 육축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 지도에는 경복궁이 경회루의 연못과 돌기둥으로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한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연못에 청동용 2마리를 넣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1997년 연못 공사를 위해 연못의 물을 뺐을 때 하향정 근처에서 1마리가 발견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었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연못이 고여 있다고 생각되지만 여러 곳에서 물이 솟아 나오고, 빠져나가는 곳이 있어서 물이 썩지 않고, 배수 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서 호우에도 물이 범람하지 않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이처럼 돌기둥만 남아 있는 경회루 연못가에서 종종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약 300년 뒤인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경복궁이 재건되면서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때 경회루의 크기는 더 커졌지만, 단층 지붕으로 바꿔 높이가 낮아지고, 용 조각을 새겼던 돌기둥이 무늬 없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때 연못 주변에 담장을 둘러서 일반인들이 볼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양영대군이 쓴 현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지금의 경회루 현판은 고종 4년(1867)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서울학교 기사(1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실내 마스크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