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재난의 농업 현장, 켄터키
작년 겨울 토네이도가 켄터키 서부지역을 휩쓸었다. 작년 봄 그리고 올 여름 대홍수가 켄터키 동부지역을 강타했다. 농장들과 마을이 초토화되고 소중한 생명들을 앗아갔다. 켄터키 중부지역에 살고 있는 내 코앞까지 바싹 다가온 기후변화의 위력을 실감한 기회였다.
토네이도와 홍수 피해지역은 거의가 작은 농촌 커뮤니티들이다. 간혹 영화나 TV에 등장하는 드넓은 농장을 소유하고 여유로운 삶을 사는 미국 부자 농부들이 아닌,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소농들이 대부분인 그런 시골 마을들이다.
켄터키 토네이도와 홍수를 통해 내가 본 것은 로컬 커뮤니티와 소농들이 함께 뭉친 연대의식과 협동이었고 이러한 상생의 정신이 기후변화나 펜데믹과 같은 인류의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예방능력과 회복탄력성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이런 위기들이 커뮤니티의 재발견, 진정한 소농의 눈부신 성장, 궁극적으로 인류 의식의 대전환, 영적 신인류 호모스피리투스 탄생의 기회일 수도 있다는 기대도 가져본다.
미국 소농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희망찬 미래로 가는 길을 함께 찾아보자.
미국 소농의 시작, 홈스테드법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대학시절을 보낸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온 필자의 유년의 기억 속에는 추억의 외화들이 있다. <600만불의 사나이>, <소머즈>, <말괄량이 삐삐>, <월튼네 사람들>, <초원의 집> 등등.
특히 <초원의 집>을 좋아했다. <초원의 집>은 로라 잉걸스의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1970~1980년대 미국의 인기 TV 시리즈였다. 내 나이 또래였던 미국 소녀 로라 잉걸스가 좋았고 광활한 미국 서부의 초원을 배경으로 한 그 가족들의 스토리가 흥미로웠고 로라가 자매들과 뛰어놀던 그 초원의 삶을 동경했다.
<초원의 집>은 미국의 소규모 가족농의 시대를 열었던 '홈스테드법'(Homestead Act, 자영농지법)과 연관이 깊다. 홈스테드법의 수혜자였던 잉걸스 가족의 삶의 기록이며 미국 초기 소규모 가족농의 역사인 셈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법의 하나로 여겨지는 홈스테드법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제정되어 링컨 대통령이 서명한 법이다. 이 법을 통해 서부 개척시대부터 100년 넘게 30개 주에 걸쳐 미국 전체 땅의 10%에 해당하는 2억 7천만 에이커의 공유지가 개인소유의 자영농장이 되었다.
광활한 미국 서부지역의 개발이 목적이었으며 21세 이상의 성인으로 미국정부에 적대적 행동을 한 적이 없으면 누구에게나 무상으로 토지를 증여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신청서를 작성하고 소액의 등록비를 내고 정해진 160에이커(차후 640 에이커까지 허락됨)의 땅에 집을 짓고 농지로 개척하면서 5년을 거주하면 땅의 소유권이 주어졌다. 척박한 황무지를 농지로 개척하는 일이 말처럼 쉬울 리가 없었기에 홈스테드 신청자는 400만이 넘었지만 많은 이들이 중도 포기했고 실제 토지를 부여받은 자영농의 수는 160만에 그쳤다.
홈스테드법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백인 남성뿐 아니라 여성, 이민자,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들에게까지 평등한 기회를 약속했다.
현실은 어땠을까? 처음부터 이 법은 당시의 지리적, 환경적 여건과 사회구조적, 정치적 이유로 불법 편법으로 악용될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었다. 해방된 남부의 흑인 노예들도 홈스테드법이 약속하는 자영농의 꿈을 안고 서부로 대거 이주했으나 여전한 현실의 인종차별과 구조적 불평등, 관료들의 비협조로 극히 일부만이 홈스테드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사실은 홈스테드법에 사용된 공유지는 이 법을 위해 미국 원주민들을 살던 곳에서 쫓아내고 죽이고 빼앗은 땅이라는 점이다. 폭력과 탄압과 강제이주로 얼룩진 아픈 역사를 낳았다. 홈스테드법은 미국 자영농, 소규모 가족농의 탄생과 성장을 도운 공도 있지만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농업과 사회전반에 존재하는 인종차별과 불평등의 바탕이기도 하다.
미국 소농의 현실
미국 농무성 (USDA)의 2018년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농장수는 220만 개이며 98%가 가족농에 해당한다. 소규모 가족 농장의 비율은 약 90%로 미국의 전체 농경지 9억 에이커의 절반을 차지하며 전체 농업생산가치의 21%를 담당한다. 소규모라고 하니 농장 땅의 크기가 기준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토지규모가 아닌 수입에 따른 분류이다. 1천 달러이상의 농업생산가치를 내면 농장(farm)으로 간주되며 소농 (small family farm)은 연간 농장수입 35만 달러(이전 자료에는 25만 달러로 나오기도 함) 미만인 농장들이다.
이 통계만 놓고 보면 일년 농장수입이 3~4억 대인데 소농이라고? 미국 농민들은 부자구나 할 수도 있겠다. 이런 비현실적인 수치로 소농이 정의되어버린 이유는 미국 전체 농장의 5%도 되지 않지만 농업생산수입의 78% 이상을 차지하는 대규모 가족농 (연수입 백만 달러 이상)과 기업농이 포함되기 때문이리라.
2018 년 USDA 자료에 따르면 미국 총 농장의 25%가 농장수입이 전혀 없고(마이너스인 경우도 많음) 30%는 연수입이 1만 달러 미만이다. 따라서 미국 농장의 반 이상은 농장에서 얻는 수입이 일년에 1만 달러 미만인 극소농(very small farm)인 셈이다.
미국정부가 지급하는 농업보조금도 농장수입에 포함되는데 상위 10%가 78%를, 상위 1%가 26%를 가져간다. 정부보조금 수혜대상은 기업농도 포함하므로 카길, 몬산토 같은 거대 기업들이 사실상 보조금의 가장 큰 수혜자일 것이다. 가족농의 62%는 보조금을 전혀 받지 못한다. 이 62%는 거의 소농, 그 중에서도 극소농들일 것이다.
많은 소농들은 은퇴농, 취미농에 해당하며 농장수입 외에 다른 수입원이나 직업을 갖고 있다. 농업을 전업으로 하고 싶어도 생계유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일을 겸하는 농부들도 많다. 물려받은 농장이나 재산이 있거나 보유자산이 두둑하거나 하지 않으면서 순전히 몸으로 부닥치며 농업을 업으로 삼는 미국 소농들의 삶은 참으로 팍팍하고 힘겨운 것이 현실이다.
가뭄, 홍수 등 기후변화 여파로 미국 전역에서 많은 농장들이 문을 닫고 코로나로 인해 농민의 현실은 더 힘들어져 2019년 7월~2020년 6월의 1년 사이에만 580개 농장이 파산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2020년 미국 질병관리청(CDC) 자료에 의하면 농민은 미국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은 직업군으로 일반대중의 3.5배에 달한다.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미국 농민이 대농은 아닐 것이다.
미국 소농의 기후변화 대응
홈스테드법을 시작으로 19세기는 미국 가족농의 성장기였다. 1840년의 농장/목장 가족인구는 전체인구의 70%였다.(현재는 2% 미만) 지금은 200만 개 정도 미국의 농장수는 1935년만 해도 700만 개에 달했다. 20세기 이후 가속화된 미국 농업의 산업화, 공장화는 소규모 가족농의 수난시대와 함께 기후변화 위기 시대를 초래했다.
대농과 기업농 중심인 미국 정부의 농업정책이 효율적인 기후변화 대응방안을 제시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켄터키 소규모 가족농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는 비영리 단체인 켄터키 농민연맹(Community Farm Alliance)의 대표 마틴 리처드씨는 "농민들의 기후변화 관련 대비책에 관한한 현재로선 각자도생의 형국이지만 내년에 개정되는 농장법(Farm Bill)에는 기후변화 대응정책들이 포함될 것으로 예상"한다.
농장법은 5년에 한번 개정되는 미국의 농업 관련 가장 중요한 법으로 의회가 농업, 식품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일련의 주제들을 정하고 정책을 수립하고 예산을 책정한다. 기후변화 대응책이 이 중요한 법에 아직 정식으로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충격이지만 2023 농장법에는 기후변화 관련 정책들, 특히 소농들의 기후변화 대응 역량강화 정책이 수립되고 충분한 예산이 책정되기를 기대한다.
상위 10% 주머니 채워주기에 급급한 미국의 정부지원금 관련 정책도 바뀌어야 한다. 상위 1%가 기업당 매년 받는 174만불을 조금만 줄여도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소규모 가족농들이 숨쉴 구멍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필자 안정현은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후 오클라호마, 캘리포니아를 거쳐 켄터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캔터키에서 농사를 지으며 25년째 살고 있다. 농업과 먹거리를 통한 사회적, 문화적 네트워크와 소통을 위해 일하고 있다. 현재 '배나치'(배움, 나눔, 치유)라는 여행사를 설립, 농산어촌 삶의 도농 간, 문화 간, 국가 간 연결을 통한 창의적인 삶의 체험과 상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이 글은 웹진 <나비>의 '기후@나비'에 동시 게재됩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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