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86강 12월 답사는, 정치·사회적으로 큰 사건들이 많았던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임인년을 마무리하며 지난 시기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친 안타까운 현장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서울학교 제86강(제5기 제8강)은 2022년 12월 11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50분까지 비전(碑殿,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앞에 모입니다(서울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4번출구. 세종로 교보빌딩 정문에서 세종로사거리쪽으로 바로 앞).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전(세종로)-성공회성당-양이재-영국대사관-원구단(삼문/황궁우/석고단)-덕수궁(대한문/석조전/즉조당/석어당/정관헌/함녕전/덕홍전)-배재학당-정동제일교회-중명전-미대사관저-돈덕전-고종의길-선원전터(흥덕전/흥복전터)-러시아공사관터-프랑스공사관터-이화학당-손탁호텔터-독립문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함께 점심식사를 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대한제국, 그 생존 갈구의 현장>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대한제국의 탄생
조선 말의 정치 상황은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씨의 세도정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왕권은 권위를 잃고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삶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분노는 잦은 민란으로 분출되다가 마침내 동학농민전쟁으로 폭발하였습니다.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틈타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서구 열강은 이권을 얻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조선 5백 년 동안 큰 나라로 모셔온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맙니다. 다시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인 건양을 사용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청나라와 손을 잡자 일본은 자국 낭인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킵니다. 일본군의 만행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그동안 머물렀던 경복궁 건청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치는 아관파천을 단행합니다.
1년 남짓 러시아 공사관에 머문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경운궁(후에 덕수궁)으로 환궁한 뒤,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의 지원으로 중국과 오랫동안 지속된 사대의 동아줄을 끊어버리려고 칭제건원을 추진합니다. 연호를 광무로 하고 황제가 하늘에 고하는 원구단을 세운 다음, 1897년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올립니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대한제국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강에게 핍박받는 국제정치 상황은 대한제국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열강은 대한제국을 회유하고 협박해 조선 영토에서 자국의 이권을 관철하려는 조약들을 다투어 체결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법궁인 경운궁은 서구 열강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숙소, 교회 등으로 잘려 나갔고,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일본은 경운궁을 아예 복원할 수 없도록 철저히 훼손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은 칭제건원의 황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종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렇게 탄생한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자주성을 잃어갔는지, 더하여 대한제국의 궁궐인 경운궁이 어떻게 훼손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고종, 황제에 즉위하고 하늘에 고하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기 위한 수순을 밟는데, 먼저 경운궁 동쪽에 있는 남별궁 터에 황제 즉위식과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원구단을 만듭니다. 고종은 1897년 그곳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라고 칭하였습니다.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드리는 제천단을 일컬으며, 천단 또는 원단이라고도 달리 부릅니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는 삼국시대부터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 그 시초인데, 제도화된 원구제는 고려 성종 때부터 거행되었습니다.
조선은 천자의 나라 중국의 제후국이므로 제천의례를 할 수 없어 세조 때 원구제가 폐지되었다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면서 비로소 천자로서 제천의식을 봉행할 수 있게 되어 원구단이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더불어 신위판을 봉안하는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와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을 세웠습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경성철도호텔을 지어 원구단의 원형을 심각하게 훼손하였습니다. 호텔은 지금까지 웨스틴조선호텔이란 이름으로 남아있지만, 원구단은 없어지고 황궁우와 정문인 삼문 그리고 석고단이 호텔 한 귀퉁이에 옹색하게 서 있을 뿐입니다.
고종의 보령 51세 때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칭송비를 만들어 기로소 앞에 세웠는데, 지금의 교보문고 앞에 자리한 비전이 그것입니다. 비의 정식 명칭은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로 황태자 순종이 전서체로 쓴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원구단에서 천지에 제사하고 황제의 큰 자리에 올랐으며,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고 연호를 광무라 했으며, 특히 올해 임인년(1902년)은 황제가 등극한 지 40년이 되며, 보령은 망육순이 되어 기로소 안 어첩 보관소인 영수각에 참배하고 기로소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비로소 기로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을 짓고 황태자 순종이 쓴 ‘기념비전’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일반적으로 비각이라 부르는 것과는 달리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전’자를 사용하였습니다. 기념비전 앞에는 도로원표가 세워져 있는데,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를 셈하는 도로의 기점입니다.
경운궁이 덕수궁 된 사연
경운궁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떠난 선조가 환도하고 보니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이 철저히 파괴되어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옛집을 임시 거처로 정하고 부근에 있던 성종의 손자 계림군의 집과 주변의 민가까지 편입시켜 만든 임금의 임시 거처인 시어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곁에 있던 청양군 심의겸의 집은 동궁, 영의정 심연원의 집은 종묘로 삼았습니다. 그 후 병조판서 이항복이 일대를 정비하여 남쪽 울타리를 큰길까지 넓히고, 동쪽과 서쪽에 담장을 둘러친 다음 북쪽에 별전을 새로 지음으로써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이때부터 이곳을 정릉동 행궁으로 불렀습니다. 선조는 정릉동 행궁에서 16년간 지내다가 승하하였으며,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3년 만에 전각들을 다시 세운 창덕궁으로 옮겼습니다. 이때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경운궁에 유폐되었을 때는 서궁이라 불렸습니다.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이곳에서 등극하였으나, 바로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선조가 거처하였던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기고 경운궁에 속했던 땅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궁궐로서의 격이 무너지게 됩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고종은 경운궁의 전각을 복구 증축하도록 명하고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합니다. 하지만 경운궁 터의 일부는 1880년대부터 이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서구 열강이 공사관 부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운궁은 각국 공사관에 포위된 형국이었습니다.
1904년 경운궁에서 경희궁으로 바로 건너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놓였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구름다리가 놓였던 위치를 지금의 경향신문 사옥 주변 능선쯤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인데, 이곳은 경희궁의 앞동산이자 경운궁의 뒷동산인 상림원이 있었던 곳입니다.
1904년(광무 8) 함녕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등 경운궁의 중심건물과 그곳에 있던 집기와 보물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고종은 화재 후에도 다른 궁으로 이어하지 않고 경운궁에 강한 애착을 보였습니다. 이에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흠경각이 급하게 복구되었으며, 현재 덕수궁의 정문으로 쓰이고 있는 동문의 이름이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바뀐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선조, 광해군, 인조의 악연이 펼쳐진 경운궁 옛 건물들
석어당(昔御堂)은 궁전에 지어진 목조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이층집입니다. 선조가 몽진에서 환도하여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어소(御所)로 사용했던 곳이며, 광해군이 자신의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독약으로 죽이고 영창대군의 친모이자 자신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장소이기도 합니다. 폭정을 일삼던 광해군이 결국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게 된 후 인목대비에게 끌려와 석고대죄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1904년의 화재로 원래 건물은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904년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1773년(영조 49) 선조의 환어 3주갑(180년)을 맞아 즉조당에 ‘예전[昔]에 임금[御]이 머물렀다[臨]는 뜻’의 '석어당(昔御堂)' 현판을 써서 걸었는데 기록상으로 석어당 명칭은 이때 처음 보입니다. 2층의 현판은 중건 후 궁내부 특진관(왕의 고문에 대비할만한 재상)이던 김성근이 썼고, 1층 내부에 있는 편액은 고종이 쓴 것입니다.
즉조당(卽祚堂)은 몽진에서 돌아온 선조가 1593년부터 석어당과 함께 임시 행궁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한 곳으로 광해군과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습니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한 뒤에는 다른 건물들은 모두 원주인에게 돌려주면서도 석어당과 즉조당 두 채만 남겨뒀을 만큼 중시했습니다. 또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1902년 중화전을 짓기 전까지 태극전 또는 중화전의 이름으로 정전이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선조 이후 수백 년 동안 서까래 하나 바꾸지 않았다가 1904년 덕수궁 대화재 후 석어당, 함녕전과 함께 맨 먼저 원형대로 복원하였습니다. 고종의 후비인 엄비가 1907년(융희 원년)부터 1911년 승하할 때까지 거처하였습니다. 즉조는 ‘조상들이 즉위[卽]한 집’이라는 뜻으로 1769년(영조 45) 영조가 즉조당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준명당(浚眀堂)은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부터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하여 많은 건물을 중건하였던 1897년에 새로 지었습니다. 내전의 하나로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이며 어린 덕혜옹주를 위해 유치원으로도 사용하였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904년 화재 이후 즉조당과 함께 지어진 것입니다.
대한제국의 궁궐을 세우다
함녕전(咸寧殿)은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하던 공간으로, 함녕은 <주역>에 나오는 “만물에서 으뜸으로 나오니, 만국이 모두 평안하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열강이 각축하던 시절에 국가 간에 평화롭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1897년(광무 1)에 건축되어 1904년(광무 8)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중건되었는데 경복궁의 만화당(萬和堂)을 옮겨 지은 것입니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함녕전의 온돌 수리공사를 하고 아궁이에서 불을 때다 대화재가 일어나 경운궁 주요 전각이 불타 사라졌고 화재의 발원지였던 함녕전도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그해 12월에 바로 복구공사에 들어가 2년 뒤인 1906년(광무 10)에 재건했습니다.
함녕전이 소실된 이후 고종은 중명전을 집무실 겸 침전으로 사용했으며 1906년(광무 10)에 다시 지었으나 그 무렵 있었던 여러 역사적 격변 때문에 함녕전으로 돌아갈 시기를 놓치고 중명전에서 거주했습니다. 1907년(융희 원년)에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함녕전에 잠시 머물긴 했지만, 곧바로 창덕궁으로 이어했습니다. 결국 고종이 공식적으로 돌아온 것은 이미 국권을 뺏긴 후인 1912년 10월이었습니다.
이후 이왕직에서 고종의 편의를 봐준답시고 행각들에다 대기실, 사무실을 설치하는 등 주변 모습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 후 함녕전을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했고 이후 전호를 효덕으로 정하여 약 1년간 함녕전을 '효덕전(孝德殿)'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덕홍전(德弘殿)은 함녕전 옆에 있으며 원래 이곳에는 한때 명성황후의 빈전과 혼전으로 쓰이던 경효전(景孝殿)이 있었습니다. 1904년 대화재 이후 경효전을 수옥헌(漱玉軒) 방면으로 옮긴 뒤 1906년 지금의 덕홍전을 짓고 1911년 개조하였습니다. 따라서 덕홍전은 덕수궁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나중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덕홍전의 용도는 주로 외국 사신들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덕홍전의 내부 전체는 넓게 터져 있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내부 모양 또한 접견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석조전(石造殿)은 대한제국 광무황제(고종)의 숙소와 사무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1898년 영국인 건축가 하딩에 의해 설계되어 1900년(광무 4) 착공돼 1910년(융희 3)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대한제국의 주도로 지어졌습니다. 건물은 열주형의 르네상스식 건물로서, 공사비 130만원(元)이 투입되었습니다. 조선의 궁궐이 침소인 침전과 업무공간인 편전으로 분리되어 있던 것과 달리 두 가지 기능이 모두 통합된 건물로 지어졌는데 지하층은 상궁 처소, 주방과 같은 시종들의 준비 공간, 1층은 접견실, 귀빈실, 홀 등 업무용 공간, 2층은 침실, 욕실 등 사적 공간입니다.
그러나 준공 당시는 이미 대한제국의 말기로서 황제국의 궁궐로 사용되지 못하고, 고종이 살아 있을 때 잠시 집무실과 알현실로만 사용했습니다. 한일합병 후 1933-1945년까지는 덕수궁 미술관과 이왕가 미술관으로 사용했으며 해방 직후인 1946~1947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이 설치됐었고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1973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1987년-2005년까지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됐습니다. 1930년대 이후에 여러 용도의 건물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된 석조전의 원형 복원 공사를 2009년 10월부터 시작하여 2014년 10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습니다.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이 비밀리에 시행한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퇴임을 강력하게 요구하자 이를 물리치지 못하고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황제에 즉위한 순종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고종은 일본에 의해 경운궁에 강제로 유폐되었습니다. 태상황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물러난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덕수궁’이라고 칭하였는데, 그때 바뀐 이름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돈덕전(惇德殿)은 석조전 뒤에 있는 건물로 원래 이곳에는 대한제국의 총 세무사였던 영국인 존 맥리비 브라운이 관장하던 해관의 한옥 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1901년(광무 5)에 경운궁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이며 1902년(광무 6) 10월에 있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을 치르기 위해 기존의 해관 건물을 철거한 뒤 건립되었습니다. 고종은 이 예식을 통해 근대국가 대한제국의 위용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해 대규모 행사를 계획했습니다. 바로 그 행사의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돈덕전을 지었습니다.
1904년(광무 8) 경운궁 대화재 때 다른 주요 건물들은 소실되었으나 돈덕전은 무사했으며 이후 수옥헌과 함께 황실과 정부에서 주로 사용하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황제와 황태자가 각국의 공사와 사절들을 만나고 연회도 열었으며, 신하들을 접견하기도 하고 1906년(광무 10)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가례 때 연회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외국의 국빈급 귀빈들이 묵는 일종의 영빈관으로도 활용되었는데 1905년(광무 9) 방한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일본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등이 여기서 머물렀고 1907년(융희 원년) 일본 요시히토 황태자(훗날 다이쇼 덴노)의 방한 때 상견례와 회식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1907년(융희 원년) 순종이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했으며 이후 순종이 즉조당으로 이어하자 돈덕전은 신하들과 일본 관리들이 황제를 배알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11월에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는 고종이 외부인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1910년에 석조전을 완공하고 서쪽 궁장을 확대하면서, 돈덕전은 비로소 덕수궁의 주요부 영역으로 들어왔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이태왕으로 강등당한 고종의 탄신연을 비롯하여 여러 행사가 열렸습니다. 1919년 고종 승하 후 덕수궁은 비었고, 돈덕전은 방치되었다가 없어졌습니다.
선원전(璿源殿)은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진전(眞殿)으로 덕수궁 서북쪽에 있었습니다. 1896년(건양 원년) 2월, 아관파천으로 고종은 경복궁을 떠났다가 환궁할 곳을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경운궁은 인조 때 건물 대부분을 원주인에게 돌려준 상태여서 경운궁에 머물기 위해 1896년부터 대규모의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897년(건양 2년) 2월 고종이 환궁할 당시에도 공사는 계속 진행 중이었고, 특히 중요한 건물 중 하나인, 선원전 역시 완공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당시 이미 경복궁 선원전에서 경운궁의 즉조당으로 옮겨와 모셨는데, 즉조당은 너무 좁은데다 다른 용도로 써야 했습니다. 이에 고종이 닦달 조령을 내려 그해 4월경에 마침내 공사를 끝내고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을 봉안했습니다.
이때 위치는 포덕문 안쪽, 지금의 태평로 큰길의 일부와 경운궁 연못 언저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1900년(광무 4년) 화재로 선원전 건물과 안에 모신 어진이 모두 불탔습니다. 1년 뒤 복구했는데 원래 자리에 다시 짓지 않고 경운궁 서북쪽에 있는 영성문 안쪽의 수어청 자리에 새로 건립했으며 어진은 각 지방에 흩어진 그림을 모사하여 봉안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이곳에서 꾸준히 제사를 지냈으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한 이후 일제가 1921년에 덕수궁의 선원전을 옮겨다 창덕궁 서북쪽 옛 대보단 자리에 짓고 새로운 선원전으로 사용하게 하면서 덕수궁의 선원전은 없어졌습니다.
이후 선원전 부지는 조선저축은행, 경성일보사 소유로 넘어가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이 들어섰습니다. 광복 후에는 경기여자고등학교가 들어섰다가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소유했는데 2003년 미국대사관 기숙사 건립을 위해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던 중 선원전 터를 확인하고 이 터를 용산구 미군기지 내 부지와 맞교환하기로 합의하여 2011년 다시 한국이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나 왕비가 승하한 후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은 침전으로 사용하던 전각을 전용했으며, 장례 후에 3년간 신주를 모시는 혼전은 주로 편전을 사용하여 흉례를 치르는 것이 상례였는데 고종 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궁궐에 흉례를 위한 전각을 별도로 마련하였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을 중건하면서 경운궁 내에도 빈전과 혼전의 역할을 담당할 건물을 건립하였으나 경운궁 영역이 주위 각국의 외교관에 둘러싸여 좁다 보니 이들 건물은 중요 건물이 들어선 중심 공간에 세워지지 못하고 따로 경운궁 서북쪽에 조성되었는데 빈전인 흥덕전, 혼전인 흥복전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 나타나는 흥덕전의 사용 예를 보면 1900년에 태조의 준원전 본 어진을 모사한 경우를 제외하면 명헌태후 홍씨, 순명황후 민씨의 빈전으로, 순헌귀비 엄씨의 빈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정관헌(靜觀軒)은 1900년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다과를 들거나 외교사절단을 맞아 연회를 여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경운궁 안에 지은 회랑 건축물로 궁 내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러시아 건축기사인 사바틴이 설계하고 다양한 건축재를 사용하여 지은 건축물로 서양풍의 건축 양식에 전통 목조 건축 요소가 가미된 독특한 모습으로 한때 태조, 고종, 순종의 영정과 어진을 모시기도 하였습니다. '정관헌'이란 ‘솔밭과 어우러진 궁궐의 건축물을 고요하게[靜] 내다보는[觀] 곳‘이라는 뜻입니다. 사바틴은 1895년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에 머물던 중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목격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 인물이기도 합니다.
양이재(養怡齋)는 대한제국 시기 황족과 귀족의 자제 교육을 전담하던 수학원으로 쓰였던 곳으로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공립 건물 중 하나입니다. 초기에는 함희당(咸喜堂)이란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함희당은 1960년에 헐렸고 현재는 양이재만 남아있으며 양이재 뒤편에 복도가 일부 남아있어 함희당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1905년 처음 지어졌을 때만 해도 경운궁에 속했으나 1912년 대한성공회 서울교구가 현재 북쪽 수녀원 자리에 있었던 이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합니다. 이후 1919년 덕수궁의 주인인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1920년 조선총독부가 덕수궁 궐내 전각들을 무단으로 매각하였고, 이 시기에 경운궁 양이재의 대지와 건물을 대한성공회에 팔았던 것입니다. 1927년부터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무실로 사용되었습니다.
정동 이름의 유래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에는 근대화라는 역사적인 전환 시대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대부분 경운궁의 일부가 훼손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공사관과 정동제일교회, 성공회 성당, 구세군 본관 등 종교시설, 그리고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개화기의 교육 시설들입니다.
이 지역을 정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이 있던 곳이라서 그렇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은 태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살아서는 왕비가 되지 못하고, 태조가 즉위한 후에 신의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둘째 왕비인 신덕왕후를 끔찍이 사랑한 태조는 왕후가 죽자 도성 안에 왕비의 능을 조성하고, 가까운 곳에 왕비의 영혼을 달래줄 흥천사라는 사찰을 170칸 규모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태조가 죽자 신덕왕후의 묘를 도성 밖 외진 곳인 지금의 정릉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제사도 지내지 않고 방치하여 이내 일반인의 묘와 다름없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왕후의 묘가 옮겨갔으니 흥천사도 함께 옮겼는데, 170여 칸의 사찰 목재들은 중국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의 부속 건물을 짓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흥천사 동종은 영조 때 경복궁 광화문으로 옮겼다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면서 창경궁을 거쳐 고종 때 다시 덕수궁 광명문에 있다가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존처리 중입니다. 흥천사 터는 덕수초등학교 일대로 추정됩니다.
왕후의 묘에 세운 석물들도 훼손하여 병풍석은 광교를 중건하는 석재로 사용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옛 정릉 자리인 미국 대사관저가 옮겨졌을 때 그곳을 파보면 석물들이 나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덕왕후의 묘는 옮겨 갔으나, 그 이후 이 지역을 정릉이 있던 곳이라 해서 정동이라 불렀으며, 지금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
중명전(重眀殿)은 1901년 지은 황실도서관으로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습니다. 1904년 경운궁이 불타자 고종은 이곳을 편전 및 침전과 외국 사절의 알현실로 사용하였는데 1907년(광무 11)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할 때까지 만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실상 대한제국 황궁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꾼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중명전 이름이 공식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시기가 1906년(광무 10) 11월 이후인 것을 보아 그 무렵에 바꾼 것 같습니다. ‘중명(重眀)’이란 본디 “일월이 함께 하늘에 있어 광명이 겹친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가 각각 제자리에 나란히 서서 직분을 다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곳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던 비운의 장소이며 1906년에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가례가 거행된 곳이고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폐위되는 원인을 제공한 헤이그 밀사를 임명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덕수궁을 축소시키면서 1915년에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1960년대까지 경성구락부로 사용되었고 이토 히로부미의 소실이면서 일본의 밀정 노릇을 한 사교계의 여왕 배정자가 한동안 살았다고도 합니다.
손탁호텔, 서구 열강의 외교 각축장이 되다
손탁호텔은 대한제국 시기의 서구식 호텔로 1902년(고종 39) 독일 여성 손탁이 건립하였습니다. 손탁은 1885년 10월 초대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를 따라 내한하여 25년간(1885-1909) 한국에서 생활하였는데 독일 국적으로 러시아 공사관의 보호를 받으며 활약하였습니다.
손탁은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각국 언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재빨리 습득하여 개항 초기 대외교섭에 외국어에 능통한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던 조선 정부에 웨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발탁되어 궁내부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담당하면서 고종황제 및 명성황후와 친밀하게 되었습니다.
원세개의 대한속방책(對韓屬邦策) 강화를 위한 내정간섭이 극심해지자, 손탁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제3세력인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정책을 추진할 때 궁내부와 러시아 공사관의 연결책을 담당하여, ‘한러밀약’을 추진하는 등 ‘친러거청(親露拒淸)’ 정책을 수립, 반청 운동을 통해 조선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녀의 독립운동 공로가 인정되어 조선 정부는 1895년 서울 정동 29번지 소재 1,184평 대지의 한옥 한 채를 하사하였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한국 최초의 배일 정치단체인 정동구락부가 친미파 이완용에 의해 발족되었습니다. 이 단체는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토역(復讐討逆), 친일 내각 타도, 경복궁에 갇혀있던 고종 구출 등을 정치적 투쟁목표로 표방하고 정동 소재 손탁 사저에 모여 항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손탁 사저는 친러 반일 운동의 책원지가 되었고 손탁은 국왕 구출 작전의 막후 인물로 활약하였습니다.
알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제1차 국왕구출사건(춘생문사건, 1895)을 일으켰지만, 한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였고 웨베르 공사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거사한 제2차 국왕구출사건(아관파천, 1896)은 성공하여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에 이어함으로써 정동구락부의 정치적 투쟁목표가 달성되었습니다. 1896년에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게 되자 커피를 진상하였고 이 일로 인해 손탁은 고종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손탁은 국왕구출작전을 성사시키면서 시종 정동구락부와 왕실의 연락업무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정동 손탁 사저를 정동구락부의 항일운동 본거지로 제공함에 따라 고종황제는 한국독립을 위한 손탁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1898년 구 한옥을 헐고 양관을 지어서 하사하였습니다.
이때 손탁은 실내장식을 서구풍으로 꾸며서 손탁빈관을 경영하였는데, 객실 5개의 양관은 호텔 영업으로는 너무 협소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대외관계가 점차 다변화되고 외국 귀빈들의 방한이 빈번해짐에 따라 이들을 접대하고 숙박시킬 영빈관이 절대 필요하였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 서울에는 외국인 전용 호텔이 몇 개 없었기에 정부는 1902년 10월, 구 양관을 헐고 2층 양관을 신축하여 손탁이 영빈관을 경영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손탁호텔’이 탄생하였습니다.
거액의 내탕금으로 신축했기에 사실상 한국 정부 직영 ‘영빈관 호텔’과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호텔 2층은 국빈용 객실로 이용하였고, 아래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 또는 주방, 식당, 커피숍으로 이용했습니다. 미국을 주축으로 결성된 정동구락부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구한말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이 외교 각축을 펼친 곳으로 유명합니다.
1909년 손탁이 귀국한 뒤, 1917년 이화학당은 미국 감리교회에서 모금한 성금(23,060달러)으로 손탁호텔을 매입하여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2년 손탁호텔 건물을 철거하고 프라이홀을 건축하였지만, 1975년 소실되었고 현재는 이화100주년기념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들 조선에 신교육을 펼치다
정동제일교회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하여 창설되었는데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여 그해 10월 11일 정동 사저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교회 옆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있어 학생들이 교회의 중요 회원이 되어 개화운동의 한 중심지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장까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청년회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서재필이 오랫동안의 미국 망명생활로부터 귀국하여 배재학당에서 강의하면서 정동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노병선, 이승만, 신흥우 등이 주도하는 협성회를 조직하여 독립협회의 전위대를 만들었습니다.
1894년에는 교인 수가 200명을 넘어섰기 때문에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1895년 9월에 착공하여 1897년 12월 26일에 봉헌식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이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인 벧엘 예배당으로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19세기 교회 건물입니다.
이 건물에서 수많은 토론회와 음악회, 성극 등이 열려 민주주의 훈련과 신문화 수용,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특히, 남녀평등과 여권신장 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1918년에는 한국에서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성가대가 운영되었고, 이곳을 통하여 김인식, 이흥렬 등의 음악가들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에는 전 교인이 참가하여 일제로부터 무서운 핍박을 받았는데 이때의 담임목사는 이필주로서 33인 중 한 사람이며 이 교회의 장로였던 박동완도 이필주과 함께 33인 민족대표로 참가하여 정동교회는 두 사람의 민족대표를 냈습니다.
배재학당은 1885년(고종 22) 아펜젤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인이 설립한 근대적 사학입니다. 아펜젤러는 서울에 들어와서 1개월 먼저 와 있던 의사 스크랜튼의 집 한 채를 산 다음 방 두 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고 그해 8월 3일에 이겸라, 고영필이라는 두 학생을 구해 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폴크 공사는 고종에게 아펜젤러에 관하여 그가 영어학교를 설립할 생각이 있다고 아뢰었습니다. 그 당시 고종은 아펜젤러가 열심히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또 앞으로 여러 학생을 교육할 학교를 세울 뜻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학교 사업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1886년 6월 8일 인재를 배양하는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액(額)을 내려 주었습니다.
당대의 명필 정학교에게 학교 간판을 쓰게 하고, 외무아문의 김윤식에게 이 간판을 하사하도록 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종이 배재학당에 대해 무척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출발한 배재학당은 그 후 나날이 늘어가는 학생을 수용하기 위한 큰 교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하여 1887년에는 르네상스식 벽돌집이 완성되었습니다.
교과목은 한문·영어·천문·지리·생리·수학·수공·성경 등이었는데 이러한 교과목 외에도 체육 시간에 서양식 운동인 야구·축구·정구·농구 등도 소개하였으며 특별활동 시간에는 연설회, 토론회 등도 장려하였는데 교내 변론회를 조직하고 시국 문제를 토론하는 것이 마치 어른들이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던 양상과도 같았습니다.
이화학당은 한국의 여성 교육의 효시이자 여성 지도자를 많이 길러낸 곳으로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1886년 5월경에 여학생 한 명을 상대로 학교를 시작한 것이 바로 한국 여학교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1885년 10월, 여 선교부 용지로 선교부(남자)가 소유하고 있는 언덕 위의 초가집 열아홉 채와 그 옆에 있는 버려둔 빈터를 사들였습니다. 초가집들을 고쳐 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짓기 시작하여 1886년에 완공되고, 그해 11월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학생을 모집하였는데 남자들은 많았으나 여자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886년 5월 31일 드디어 한 사람의 여성을 학생으로 맞이했습니다. 그것도 학생의 어머니에게 학생의 신변을 보증한다는 서약서까지 주고 입학시킨 것입니다.
“미국인 야소교 선교사 스크랜튼은 조선인 박 씨와 다음과 같이 계약하고 이 계약을 위반하는 때는 어떠한 벌이든지 어떠한 요구든지 받기로 함. 나는 당신의 딸 복순이를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의 허락이 없이는 서방은 물론 조선 안에서라도 단 십리라도 데리고 나가지 않기를 서약함. 1886年 스크랜튼.”
1887년 학생이 7명으로 늘어났을 때, 고종황제는 스크랜튼 부인의 노고를 알고 친히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지어주고 외무독판 김윤식을 통해 편액을 보내와 그 앞날을 격려했습니다. 당초에 스크랜튼 부인은 교명을 전신학교(專信學校)로 지으려 했으나, 고종황제의 은총에 화답하는 마음으로 ‘이화’로 택했습니다. 그 후, 1888년에 학생 수가 18명으로, 1893년에는 3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1890년 박영효의 딸이 이화학당에 와서 스크랜튼 부인과 함께 기거하며 공부했다는 것을 보면, 이화학당의 학생 구성은 소수의 상류계급 출신과 서민 자녀 등 양극의 층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국 성공회, 조선에 한옥 성당을 세우다
성공회 성당은 서울교구 주교좌성당으로, 성공회는 기독교의 한 유파로 영국의 국교입니다. 영국 성공회는 1890년 9월 인천 제물포에 상륙해 우리나라에 처음 전교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러시아의 연합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성공회는 동맹국 일본의 묵인 아래 어렵지 않게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성공회 초대 주교인 코프는 영국 해군함대 전속 목사 출신으로 1891년 서울의 영국 공사관(현 대사관)에 인접한 서학 현의 수학원 터에 있던 한옥을 매입하여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원래 영국 공사관과 수학원이 있던 곳은 모두 옛 경운궁 영역이었습니다. 수학원은 왕족과 명문가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곳이며, 영국 공사관 터는 1880년대 조선 정부가 서구 열강의 공사관 부지로 경운궁 터 일부를 떼어준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듬해인 1892년 성공회는 현재의 위치에 30여 평의 한옥을 사들여 한옥식 ‘강림성당’을 세웠습니다. 이 성당이 이후 강화·청주·음성에 세워지는 초기 성공회 한옥 성당의 기틀을 이룹니다.
성당의 신축은 마크 트롤로프 3대 주교 때인 1922년에 착공, 1926년에 준공되었습니다. 건물의 설계는 영국 왕립건축학회 회원인 건축가 아서 딕슨, 감독은 영국인 브로크였습니다.
건물은 비잔틴식으로 외벽의 기초부와 뒷면 일부에는 화강석을 쓰고 나머지는 붉은 벽돌을 사용했는데, 처마와 창문과 지붕에 남아있는 한옥 양식이 서양 건축양식과 어우러져 묵직하고 중후한 외형감을 보여줍니다. 지금의 건물은 1996년에 미완성이었던 건물을 완공한 것입니다.
러시아 공사관은 원래 왕실의 정원인 상림원이 있던 곳으로, 정동에서 가장 높은 지대입니다. 1896년 2월에 고종이 왕태자와 함께 경복궁을 떠나 이곳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의 현장입니다. 1895년 11월 28일에 미국 공사관으로 가려 했으나 실패한 적이 있었으며, 이를 거울삼아 아관파천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했고 결국 성사시켰습니다.
이후 고종은 여기에 머물면서 김홍집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박정양 친러 내각을 조직했으며 러시아는 이를 기회로 조선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갔으며 1년여 뒤인 1897년에 고종은 환궁하였는데 경복궁이 아닌 러시아 공사관 근처에 있는 경운궁으로 갔습니다.
대한제국 수립 후 1904년 2월에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을 시작했고, 곧장 러시아 외교관들은 한국에서 철수했고 일본이 압력을 넣어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국교는 끊겨 러시아 공사관은 빈 건물이 되었다가 1906년에 러시아 외교관들이 다시 한성에 오긴 했지만 이미 1905년 11월에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을 체결시켰기 때문에, 국가 대 국가로 주요 외교업무를 상대하는 공사가 아닌, 정치성이 없는 업무를 담당하는 영사로 왔기에 옛 러시아 공사관 건물도 영사관이 되었습니다.
1910년에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도 러시아 영사관은 명맥을 유지했다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자 운영이 어려워 1921년에 스스로 폐쇄했습니다. 1922년에 새로운 국가 소련이 세워졌고,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은 후인 1925년 9월에 소련의 영사들이 다시 경성으로 와 옛 러시아 공사관을 영사관으로 사용했습니다.
한국전쟁 때에는 탑과 외벽 일부를 제외한 건물 전체가 폭격을 맞아 사라졌는데 폐허가 된 공사관 건물 주위에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서는 등 한동안 방치 상태로 있었습니다. 1973년에 남은 건물들을 보수했고, 1981년에는 유적 발굴 및 공사관 터 일대를 정비하였습니다.
중국에 대한 사대의 멍에를 털고 독립을 외쳤지만...
독립문(獨立門)은 청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로 독립협회가 세운 건축물로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1896년부터 1897년에 걸쳐 완공된 것으로, 양식은 유럽식 개선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문의 기능을 수행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기념비로 만든 것입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고 이듬해에 청일 간의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조선 내부에서도 청과의 관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조선 국왕이 직접 나가 칙사를 맞이하던 영은문이 철거되었습니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친일 인사들은 모두 복권되고, 박영효는 같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한때의 동지인 서재필에게 조선으로 건너올 것을 권유했습니다.
마침내 서재필이 1896년 1월에 조선으로 와서 중추원의 고문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진행한 것이 독립문 건립 운동이었으나 2월에 아관파천이 벌어져 상당수 친일 관료들이 입지를 잃거나 숙청되었는데, 서재필은 미국인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입지를 보존할 수 있었으며, 이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되었습니다. <독립신문>은 정부의 재정 지원금 4400원이 들어간 만큼 친정부적 어용신문이었고, 이 와중에 생성된 단체가 독립문 건립추진위원회이고 이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가 바로 이후의 독립협회의 모체가 됩니다. 즉,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설립한 것이 아니라, 독립문을 쌓기 위해서 독립협회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1896년 7월에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를 기반으로 해서 독립협회를 창설했고 회장에는 안경수, 위원장 이완용, 서재필은 고문이었고, 김가진, 이상재 등의 고위 관료와 명사들이 참여했습니다. 서재필이 파리의 개선문을 토대로 기본 스케치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사바틴이 설계를 했으며, 건설 비용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왕실의 기부금으로 충당했습니다. 1896년 11월 21일 조선인 건축사 심의석이 건축을 맡아 영은문 부지에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고종이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해 그 해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했고,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충실하게 이를 지지했으며 1897년 11월에 완공된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문이 되었습니다. 한글과 한문으로 적힌 현판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이 새겨졌고 태극기 또한 새겨져 있는데, 3.1만세운동 당시 민중들이 태극기의 정확한 모습을 몰라서 경성 주민들은 독립문으로 가서 조각된 태극기를 보고 도안을 그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후 국권을 침탈한 일본은 독립문 건설의 배경을 눈여겨보고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인들을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켜 주었다”라는 정치적 선전의 근거로 이용하려고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문을 철거하지 않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서울학교 기사(12월)를 확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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