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의 개교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 해 3월 제1강으로 욕지도를 출발했고 2022년 12월 제100강으로 자은도와 암태도에 도착합니다. 드디어 100강입니다.
그동안 섬학교를 이끌어오신 강 교장선생님의 뜨거운 열정과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뒷바라지에 바빴던 정도영·허경옥 스태프진과 이신배 기사님 등 애 많이 쓰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지난 10년 변함없는 성원과 참여로 섬학교를 이 세상 명문학교로 가꾸어주신 회원 여러분께 큰 절을 올립니다.
이제 섬학교는 제100강으로, 아쉽지만 마감하고 섬연구소(이사장 박재일, 소장 강제윤)가 섬학교의 뜻과 기운을 이어받은 데에 더하여 진화한 프로그램으로 여러분을 모실 것입니다. 끊임없는 성원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제100강을 맞는 교장선생님의 감회를 들어봅니다.
2012년 3월에 개교한 <섬학교>가 2022년 12월, 제100강을 맞이합니다. 인문학습원 역사상 첫 번째 100강이자 섬학교 <시즌1>의 마감이기도 합니다. 코로나의 창궐로 100강이 예정보다 늦어졌습니다. 섬 답사나 섬 여행, 섬 공부의 불모지에서 시작됐던 섬학교. 지금은 섬으로의 여행이 대세가 됐습니다. 섬의 가치를 알리고 키우는데 섬학교가 큰 역할을 해왔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우리 섬학교 회원들은 그저 섬을 관광한 것이 아니라 섬의 역사와 문화와 사람들의 삶까지 공부하며 섬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습니다. 그 결과 섬학교 회원들을 주축으로 2015년에는 사단법인 섬연구소가 설립됐습니다. 어느새 섬연구소는 대한민국 섬 정책의 산실이자 소외받는 섬주민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섬연구소의 제안으로 정부 ‘섬정책 컨트롤타워’로서 국립한국섬진흥원이 설립됐고 여객선공영제가 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됐습니다. 섬연구소의 도움으로 섬에서 쫓겨날 뻔한 거제 지심도와 완도 부도의 주민들이 섬에서 살 수 있게 됐습니다. 태풍 피해를 입었던 울릉도가 긴급히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됐고, 또 울릉도의 전천후 여객선 취항에 일조해 해상교통불편 해소에도 일조했습니다. 완도 여서도의 3백 년 돌담들이 지켜졌고, 진도 관매도의 폐교가 지켜졌습니다.
모두 섬학교가 바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가 섬이 되었습니다. 섬학교는 10년 동안 100개의 섬길을 답사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섬연구소에서는 전국 각 섬에 흩어져 있는 섬길들을 하나로 연결해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도록 만드는 <백섬백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100번째 섬학교의 의미는 남다릅니다. 섬학교 <시즌2>는 백섬백길을 통해 이어질 것입니다. 머지않아 새로운 이름, 새로운 형태로 섬 답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어떠한 모습이든 다시 함께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섬학교 <제100강 특집>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섬들이 있는 신안군의 자은도와 암태도에서 열립니다. 2022년 12월 3(토)-4(일)일, 1박2일 일정입니다. 섬학교 <제100강 특집>에 함께 하실 분들을 초대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2월의 답사지인 신안 자은도와 암태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자은도는 백사장이 아름다운 모래섬입니다. 섬 전체가 온통 모래땅이라 대파로 고소득을 올리는 대파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자은도에서는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어 해넘이 길을 걷습니다. 한운리 갯벌에서는 전통 방식인 지주식 김양식장의 모습을, 둔장해변에서는 원시 어로인 독살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암태도는 일제강점기 농민항쟁의 본산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소금 굽는 섬 주민 20명이 왜구 해적선 9척, 수백 명의 왜구들과 맞써 싸워 물리친 전설 같은 섬이기도 합니다.
속절없이 그리운 날에는 섬으로 갔다
-강제윤
바람 부는 날에는 섬으로 갔다.
바람 잔잔한 날에도 섬으로 갔다.
슬픔이 목울대까지 차오른 날에도 섬으로 갔다.
기쁨이 물결처럼 너울져오던 날에도 섬으로 갔다.
속절없이 그리운 날에도 섬으로 갔다.
오갈 데 없는 날에도 섬으로 갔다.
해 다 저문 저녁에도 섬으로 갔다.
술이 덜 깨 숙취에 시달리던 날에도 섬으로 갔다.
칼바람이 온몸에 칼자국을 내던 겨울 한낮에도 섬으로 갔다.
먹구름이 밀물처럼 몰려오던 날에도 섬으로 갔다.
싱그럽고 뜨겁고 헛헛하던 봄, 여름에도, 가을에도 섬으로 갔다.
실연의 상처가 덧나 심장이 뻥 뚫린 날에도
상처에 새살이 차올라 심장이 간질간질하던 날에도 섬으로 갔다.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날에도 섬으로 갔다.
내가 다시 나를 용서하기로 한 날에도 섬으로 갔다.
인생이 나를 저버린 날에도 섬으로 갔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날에도 섬으로 갔다.
한 달 동안이나 아무도 나를 불러주는 이 없던 날에도 섬으로 갔다.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 상현달처럼 다시 사랑이 차오르던 날에도 섬으로 갔다.
그 수많은 생애의 날에 나는 섬으로 갔다.
섬은 나를 비난하지 않았던 것처럼 애써 위로하려 들지도 않았다.
말없이 묵묵히 같이 있어주던 섬.
그래서 나는 또 남은 생애의 날들에도 더 자주 섬으로 갈 것이다.
당신 또한 섬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그 섬이 주저앉은 당신에게 새로운 ‘일어 섬’이 되어주기를.
[자은도]
‘자비롭고 은혜로운’ 생명의 땅
자은도 분계리 양파밭,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거두지 않고 버려진 양파들이 많다. 왜일까? 멀쩡한 양파를 수확하지 않는 것은. 궁금증이 일어 길 가던 마을 노인에게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 “양파 숫놈은 가운데 심이 박혀 있고 누린내가 나서 먹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버려진 숫컷들이다. 양파에도 암수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다 같이 꼿꼿이 서 있던 양파들이 익을 대로 익으면 암양파는 흙 위로 튀어 올라와 알아서 자빠진다. 눈치 없는 숫양파는 그대로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서 있다
농부들은 알아서 자빠진 암양파들만 수확하고 건방지게 서있는 숫양파들은 버린다. 숫양파에는 심이 들어 있어 상품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실속 없이 ‘헛심’만 들어있는 숫양파.
추수철이 끝나면 쓸모없이 버려지는 수컷의 비애.
자은도는 면적 52.790㎢로 신안군의 면 단위 섬들 중에서 가장 큰 섬이다. 1970년대는 인구가 2만 명이 넘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2,400여 명이 살아간다. 신안의 많은 섬들이 그렇듯이 자은도는 섬이지만 대부분 농사가 주업이다. 양파와 대파, 마늘 등으로 소득을 올린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소득을 주는 것은 대파다. 자은도에서 재배중인 대파밭만 397ha, 무려 120만 평이다. 양파밭이 160ha, 마늘밭은 153ha 정도다. 땅콩 농사도 31ha나 된다. 대파 농경지는 모래땅이 많은 자은도 서부지역에 몰려 있다. 모래땅이 겨울 대파농사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모래땅이 양분이 많아서 유리한 것은 아니다.
자은도를 비롯한 남쪽 섬지역의 대파 가격 결정권자는 상인이 아니다. 날씨다. 겨울이 추우면 대파 소득이 높아지고 따뜻하면 값이 떨어진다. 날씨가 따뜻하면 어떤 땅이든 대파를 수확할 수 있다. 하지만 땅이 얼 정도로 추위가 계속되면 흙땅의 대파는 수확하지 못한다. ‘대가리’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독한 추위에도 모래땅은 얼지 않는다. 그래서 대파 수확이 가능하다. 다른 땅에서 대파가 수확되지 않으니 모래땅에서 생산되는 대파 가격이 높아질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섬 지역의 대파 농가들은 겨울이 춥기만을 고대한다.
사랑과 은혜의 섬, 자은도(慈恩島). 이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섬이 또 있을까? 자은도란 이름은 두사충(杜師忠, 杜思忠. 일명 두사춘 斗四春, 杜四春) 이란 인물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 이여송 장군과 함께 참전했던 중국인인데 반역자로 몰려 자은도로 피신 오게 됐다. 그때 자신을 잘 보살펴준 섬 주민들의 은혜에 감격하여 섬의 이름을 자은도로 지어줬다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다.
자은도 중에서도 송산리(松山里)가 두사충이 숨어 살던 마을이라 전해진다. 송산리는 소나무가 많아 ‘송산’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송산리에는 송산마을, 다산마을, 두모마을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당시 두사충은 자은도에 들어와 송산리 두모에 숨어 살았다. 어느 날 두사충이 자은도 서쪽 끝에 위치한 분계리(分界里) 응암산(鷹岩山)을 바라보며 영산(靈山)이라 감탄하고 춤을 추었다 하여 그가 살던 곳을 ‘두무동(斗舞洞)’이라 부르게 됐다 한다. 두무가 이후 ‘두모’로 변했다는 것이다.
두사충은 역사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다. 실존 인물 두사충이 자은도에 전해지는 두사충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건너왔다는 점에서는 같은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역사 인물 두사충은 명나라 장수였다. 명나라 기주자사(冀州刺史) 교림(喬林)의 아들이었다. 두사충은 명나라 두릉 출신인데 당나라 때 시인 두보의 21대 손이다. 두사충은 명나라에서부터 풍수지리 전문가로 유명했다. 명나라에서 상서(尙書) 벼슬을 지내다가 1592년(선조25) 이여송(李如松), 이여송의 사위였던 진린(陳隣) 장군과 함께 임진왜란에 참전해 왜군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두사충은 명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조선에 귀화해 대구에 정착한 뒤 두릉두씨의 시조가 됐다. 이순신 장군과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진린 장군 때문에 이순신 장군과도 인연이 깊었다 한다. 그래서 아산 금성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묘자리를 두사충이 잡아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두사충은 대구에 자리 잡았는데 두릉두씨 대구파의 시조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한음 이덕형의 묫자리도 두사충이 점지했다고 전한다. 선조와 광해군 시대 한음 이덕형은 두 번이나 영의정 자리에 올랐을 정도로 유력한 정치가였다. 명나라로 가서 명의 군대를 구원군으로 불러온 것도 한음이었다. 광해군 시절 한음은 당쟁에 휘말려 관직을 박탈당한 뒤 양평으로 낙향했다가 한 달 뒤에 죽었다. 이때 양평 목왕리에 그의 묫자리를 잡아준 이가 지관인 두사충이었다고 전한다.
역사에서 장군인 두사충은 양평에서는 명군을 따라온 지관으로 등장한다. 그의 신분이 무엇이든 그가 명에 원병을 청하러 갔던 한음과 인연이 있으리란 것은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 그렇다면 두사충이 명나라 출신으로 조선에 귀화한 장군이고 지관으로서의 능력도 있었던 까닭에 친분이 있던 한음의 묫자리를 잡아 줬을 것이다. 묫자리를 잡아준 까닭에 양평에서는 지관으로만 알려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은도의 이름을 두사충이 지어줬다는 이야기는 또 다르다. 고려시대부터 이미 자은도란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사> 공민왕 22년(1373년) 11월 5일 기사에는 “명에 보낸 사신들의 배가 파선해 주영찬 등이 자은도 앞바다에서 모두 익사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 세종 시대 기사에도 자은도가 등장한다. “자은도 목장(慈恩島牧場)은 다경포 만호(多慶浦萬戶)가 겸하게 하고 감목관은 혁파하게 했다.”(세종실록 74권, 1436년, 세종 18년 7월 25일 무오 2번째 기사)
무안의 다경포에 있던 만호가 인근 섬 자은도의 감목관까지 겸직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두사충이 자은도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두사충이 지관으로도 살았다면 임란 중이든 후든 조선의 땅을 떠돌며 자은도에도 들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고운 최치원의 전설처럼 이 땅 곳곳에 수두룩하게 전하는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양평과 자은도에만 두사충의 이름이 전하는 것은 그 땅과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두사충, 그는 대체 어떤 인연의 끈으로 머나먼 남방의 섬까지 흘러왔던 것일까.
분계리 가는 길목 백산마을 북쪽에는 섬 지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제법 큰 규모의 자연 호수가 있다. 섬 지역의 호수는 대부분 농사를 위해 만든 인공 저수지나 방죽들이다. 그런데 이 호수는 1만 평이나 되는 자연 호수이다. 자은도에서는 용소라 부른다. 용이 만든 호수라는 전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오랜 옛날 승천을 앞둔 용 한 쌍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칠산 앞바다에서 바람에 날아온 모래들이 쌓이면서 점차 소가 좁아졌다. 암용은 다른 장소로 옮기자고 숫용에게 사정했지만 숫용은 거절했다.
곧 승천할 텐데 번거롭게 옮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분이 상한 암용은 근처의 비수 용소로 날아가 버렸다. 드디어 승천하는 날 숫용은 암용을 부르며 거세게 꼬리질을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맥이 뚫려 많은 물이 솟아났고 지금의 크나큰 소가 만들어졌다. 아무리 가물어도 이 용소는 마른 적이 없다 한다.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해 양수기로 물을 퍼내도 용소의 등이 보일 정도로 바닥이 드러날 만하면 꼭 비가 와서 가뭄이 해갈되곤 했다. 섬사람들은 승천한 용이 자기가 만든 용소에 물이 마르지 않게 비를 내려 주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지금도 대파 농사의 급수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은도는 한국 민중신학의 개척자 서남동(1918~1984) 목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장로교 목사였던 서남동은 1957년 캐나다 이매뉴얼신학대학원 졸업 후 1961년 연세대 교수로 부임한 뒤 1970년대에 신학자들과 <한국그리스도인선언>을 발표하며 적극적 반독재투쟁 대열에 앞장섰다. 1975년 6월 유신독재 하에서 이른바 '학원사태'로 해직되었고, 이듬해 ‘3·1민주구국선언’을 주도하며 김대중 대통령, 함석헌 등과 함께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병무·서광선·주재용 등과 '민중신학'을 탄생시켰다. 민중신학은 제3세계 신학의 모델이 됐다. <전환시대의 신학>(1976) <민중과 한국신학> <민중신학의 탐구>(1984) 등의 저서를 남겼다. 아직 자은도에 그를 기리는 비석 하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새천년대교가 개통된 뒤 이웃 섬 암태, 팔금, 안좌와 함께 자은도 또한 뭍으로 편입됐다. 자은도로 가는 길이 한결 쉬워졌다. 연도교로 연결된 주변 섬들 중 자은도만 유달리 모래 해변이 많다. 무려 9개나 된다. 사람들은 백길이나 둔장해변을 많이 찾는 편이지만 나그네는 유달리 분계해변에 애착이 간다. 여인송이란 소나무 때문이다. 오늘 분계리 마을로 들어선 것도 여인송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다. 분계리 해변은 무성한 해송숲이 방풍림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들은 거친 바닷바람을 막아 주는 분계리 마을의 수호신이다. 이 솔숲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가 바로 여인송이다. 여인의 자태를 그대로 빼닮았다 해서 여인송이다. 이토록 미려한 소나무에 깃든 사연은 비극적이다.
옛날 분계마을에 어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부부는 더없이 금슬이 좋았다. 그런 어느 날 부부 사이에 작은 말다툼이 벌어졌다. 남편은 홧김에 배를 타고 떠나버렸다. 남편은 집에 있으면 더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화를 풀려고 바다에 나간 것이다. 그 속을 알 길 없는 아내는 남편을 원망했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아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부부싸움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래서 날마다 분계해변 솔숲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남편은 돌아올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아내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아내가 소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바다를 바라보자 남편이 탄 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 다음 날부터 아내는 솔숲의 가장 큰 소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남편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소나무에 거꾸로 매달리면 남편의 배가 귀항하는 것이 보였다. 아내는 점차 미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아내는 소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남편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좋아서 기뻐하다 그대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얼마 후 남편이 무사히 분계마을로 돌아왔다. 남편은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아내를 그 소나무 아래 묻어주었다. 아내를 묻고 난 뒤 소나무는 점차 거꾸로 선 여인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부의 아내가 묻힌 소나무가 바로 여인송이다. 소나무는 어부 아내의 환생으로 믿어지고 있다. 오늘도 여인송의 자태에서는 그리움이 가득 묻어난다. 생의 터전인 동시에 생의 무덤이 되기도 하는 바다. 언제나 생사를 넘나드는 삶을 살아야 했던 섬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소나무. 나그네도 누군가를 죽도록 그리워하던 때가 있었겠지. 그저 전생처럼 아득하다.
[암태도]
20명의 주민들이 왜구 해적선 9척을 물리쳤던 전설의 섬
1만 2천 년 만에 섬은 다시 육지와 하나가 됐다. 2019년 4월 4일 신안의 섬 암태도에서 일어난 경천동지할 사태다. 천사대교의 개통으로 목포에서 28km나 떨어진 섬이 육지와 연결된 것이니 어찌 아니겠는가, 섬이 뭍으로 되는 것은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섬사람들에게는 놀랄만한 사건임은 분명하다. 한국의 서해(황해)는 마지막 빙하기까지 대부분 육지였다. 당연히 현재 서해의 섬들도 육지였다. 대략 1만 2천 년 전부터 빙하가 녹으면서 육지는 바다가 되었다. 그때 물에 잠긴 육지는 바다가 되었고 수면에 남은 육지는 모두 섬이 되었다. 암태도 또한 육지에서 섬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암태도는 천사대교 개통으로 다시 1만 2천 년 만에 육지로 편입된 것이다. 어찌 섬사람들의 감회가 새롭지 않겠는가.
천사대교가 개통 되면서 암태도에도 새로운 명소가 몇 군데 생겼다. ‘동백 빠마’ 벽화도 그 중 하나다. 통영의 동피랑 벽화마을이 유명세를 탄 뒤 전국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벽화마을들. 예산만 낭비하고 거의 망했다. 그래서 특색도 없고 맥락도 없이 그려진 벽화들을 보면 거부감이 먼저 들었었다. 그런데 이 벽화를 보고는 반했다. 이 정도 창의적이고 즐거움을 주는 벽화라면 몇 개가 더 생긴들 반갑지 않겠는가?
‘동백 빠마’ 벽화는 기동 삼거리 손석심(78) 할머니와 문병일(78) 할아버지 댁 담장에 있다. 단순한 벽화가 아니라 설치 작품이다. 파마를 한 듯한 머리 부분은 그림이 아니다. 실제 애기 동백나무다. 얼굴 부분만 벽에 그려진 그림이다. 꽃이 피는 시절이면 영락없이 ‘동백꽃 빠마’다. 외국의 경우 거리예술(Street Art)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지만 우리 섬에서 보니 새롭다.
‘빠마 머리’를 한 노부부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즐거워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유쾌함을 선물해 주는 벽화, 아름답지 않은가? 그림과 실제 동백나무를 결합해서 완성한 이 특별한 벽화는 신안군의 요청으로 화가들이 협업해 완성한 것이다. 벽화의 주인공이 집주인 부부가 된 것은 박우량 신안군수의 아이디어였다. 신안군 공무원이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벽화로 그리자고 제안하니 박 군수가 집 주인 할머니로 하자고 역제안해서 제작됐다 한다.
하지만 막상 벽화 작업이 시작되고 담장 벽에 대문짝만한 할머니 얼굴이 그려지자 손 할머니는 ‘남사스럽다’며 지우고 싶다 했다. 하지만 동백나무를 머리로 한 벽화는 끝내 완성됐고 주변의 반응이 좋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편인 문 할아버지가 박 군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의 얼굴도 그려달라고 요구했다. 군수는 그러자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할머니 빠마 머리와 같은 크기의 애기 동백을 구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결국 제주도까지 가서 동백을 구해왔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벽화가 천사대교 개통과 함께 암태도 최고의 뷰포인트가 된 것이다. 벽화 하나가 섬마을을 환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예술의 힘이다. 벽화 건너편 운동기구들이 설치된 체육공원에는 서재봉(85세) 서명균(86세) 두 어르신이 나란히 앉아 봄날의 햇볕을 즐기고 있다. 다리가 놓이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느냐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 “한동안 사정없이 많이 다녀부렀어요.” “저 동백나무 벽화도 사진 찍으러 많이 오죠?” “거그도 아주 사정없이 와 부러요.” 주인 부부는 밭에 일하러 나가신 참이라 만날 수 없었다.
암태도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농민항쟁인 ‘암태도 소작쟁의’로 유명한 섬이다. “육이오 때 목포경찰서에서 암태도를 모스크바라 불렀어요.” 어르신 말씀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일제 강점기 때 소안도가 ‘남해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것은 익히 잘 알고 있었는데 암태도 또한 ‘모스크바’로 불린 것은 처음 알았다. 서태석 선생 등 사회주의 계열의 지도자가 소작인 항쟁을 주도했던 까닭이다.
“일제 때 세무서 직원들이 밀주 단속 나왔다가 뚜드려 맞고 간 동네요. 여가.” 그만큼 쎈 동네였다는 말씀. “면민 축구대회 같은 거 열려서 기동리 하고 붙으면 다들 벌벌 떨었어.” 서명균 어르신도 거드신다. “다른 데 사람들보다 나았어요. 아는 것도 많고 경우 바르고.” 어르신들의 마을에 대한 자긍심이 남다르다. 암태도는 일제 강점기 무안군에 속했었다. 무안에서 신안군이 분리된 것은 1969년이다. “서태석씨 집안이 무안군을 들었다 놨다 했지. 서태석씨가 모스크바에서 대학 나왔어. 면에서는 유명해요.”
암태도의 면적은 36.27㎢. 여의도(2.9㎢)의 열두 배쯤 된다. 암태도의 전답은 11.75㎢나 된다. 여의도의 4배쯤 되는 땅이 암태도의 논과 밭이다. 예나 지금이나 섬이지만 농사가 주업이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암태도의 소작농들이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해 약 1년간 암태도의 지주 문재철(文在喆)과 이를 비호하는 일제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다. 들불처럼 번져 나간 일제하 소작쟁의 운동의 도화선이었다. 암태도의 대지주 문재철은 1910년대에는 지세(地稅)와 제반 경비를 공동부담으로 하는 반분타조제(半分打租制)로 소작료를 징수했는데 1920년대 들어 무려 7할 내지 8할의 소작료를 징수해 갔다.
약탈적 소작료 징수를 참을 수 없었던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3년 8월 추수기를 앞두고 소작쟁의를 개시했다. 암태도 오상리 출신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가 조직되었고 문재철에게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요구는 거절되었고 소작인들은 추수거부·소작료불납동맹으로 문재철에 대항했다. 일제경찰은 농민대표들을 구속시켰다.
암태도 주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차로 400명이 또 2차로 600명이 목포로 나가 목포경찰서 앞에서 단식투쟁으로 저항했다. 언론에서는 아사동맹이라 보도했다. 암태도 주민들의 투쟁은 수많은 언론에 보도됐고 한반도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응원이 답지했다. 암태도 주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은 마침내 소작료를 4할로 내리게 했고 농민대표들도 풀려났다. 일제 강점기 외딴 섬에서 이루어낸 항일운동의 값진 승리였다. 하지만 1998년이 돼서야 면소재지인 단고리에 ‘암태도 소작인 항쟁기념탑’이 세워졌다.
일제시대 뿐일까? 그 옛날부터 암태도 사람들은 참 대단했었다. 친일 지주와 일제 경찰에 맞서 싸우던 기개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미 선례가 있었다. 조선 태종8년(1408년)에 불과 20여 명의 암태도 주민들이 노략질을 하러온 왜선 9척과 맞서 싸워 물리쳤다. 이들은 염간 김나진과 갈금 등이다. 염간은 소금막에서 자염(煮鹽)을 만들던 염부들이었다. 진짜 영웅들이 아닌가. 게다가 불과 20여 명으로 9척이나 되는 왜구들과 맞서 싸워 승리하다니. 신안군에서는, 아니 정부에서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라도 세워야 마땅하지 않을까? 양반 영웅들만 기리지 말고.
“왜선(倭船) 9척이 연일(連日) 암태도(巖泰島)를 도둑질하니, 염간(鹽干) 김나진(金羅進)과 갈금(葛金) 등이 쳐서 쫓아버렸다. 나진(羅進) 등 20여 인이 혈전(血戰)을 벌여 적의 머리 3급(級)을 베고, 잡혀 갔던 사람 2명을 빼앗으니, 적(賊)이 곧 물러갔다.”(태종실록 8년 1408년 2월 03일 기사)
소작쟁의의 핵심적인 인물은 암태도 출신의 서태석(1885-1958)과 박복영(1890-1973)이었다. 서태석은 1913년부터 7년간이나 암태면장을 지낸 바 있다. 3.1운동을 계기로 서태석은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3.1운동 1주기 때 유인물을 배포하다 1년간 수감생활을 했고 신간회 사건 관련자로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군자금 확보를 위해서 국내외에서 활동했는데 1922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23년에는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해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러시아에 다녀온 것이 고향에서는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졸업했다”고 와전된 듯하다.
1924년 9월에는 암태도소작쟁의 배후 조종자로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28년 4월에는 다시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서태석의 말년은 불행했다. 수차례 투옥되며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서태석은 거리를 전전하다 1958년 압해도의 어느 논에서 벼 포기를 움켜쥐고 죽음을 맞이했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었다는 이유로 해방 후에도 서태석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일가친척은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친일파의 나라가 만든 비극이었다. 서태석은 2003년에야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었다. 서태석의 며느리는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났던 광주학생의거의 주역 박기옥이었다.
또 다른 주도자인 암태도 단고리 출신의 박복영(1890-1973)은 1919년 목포지역 3.1운동으로 목포형무소에서, 또 1920년 상해로 망명 중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3년에는 임시정부의 비밀문서를 가지고 들어오다 체포돼 1년 6개월을 살았다. 암태도에 돌아온 뒤 1923년 암태청년회 회장에, 1924년에는 암태도 소작쟁의 주동자들이 투옥 당하자 소작인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고, 1926년 자은도 소작쟁의도 도왔다. 이후 <동아일보> 목포 지국장을 역임했고 해방 후에는 무안군 건국준비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1977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고, 1990년에야 비로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촉발시킨 대지주 문재철(1882-1955)은 암태도 수곡리 출신으로 일제의 식민수탈정책에 편승해 토지 소유를 확대한 전형적인 식민성 지주였다. 1920년대 당시 암태도·자은도 등의 도서 지역과 전라남북도 등지에 755정보(226만 5천 평)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암태도에는 약 140정보(42만 평)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940년 문재철이 소유한 토지는 무려 1,666정보(500만 평)로 늘어났다. 1941년에는 목포에 문태중학교를 설립했고 1941년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응원하던 친일단체인 흥아보국단 및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문재철은 199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받았다. 친일지주였던 문재철은 소작쟁의 후 박복영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한 것으로도 알려져 그에 대한 평가는 간단치 않은 측면이 있다. 그래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지역유력자 분야에 등재되었지만 <친일인명사전>에서는 빠졌다. 자본가로서 민족을 위한 교육사업, 상해임시정부의 자금조달과 같은 공로를 세운 점을 인정받아 친일 명단에서 제외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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