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낙동강변, 화왕산 자락에 자리 잡은 신라 시대 군사요충지였던 경남 창녕고을에서 즐비하게 펼쳐 있는 국보와 보물을 감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91강은 2022년 11월 2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창녕IC-대지면(물계서원/성씨고가)-창녕읍(교동송현동고분군/창녕객사/진흥왕척경비/창녕향교/창녕석빙고/술정리서삼층석탑/술정리동삼층석탑)-점심식사-영산면(영산읍성지/영산향교/신씨고가/영산석빙고/영산만년교)-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91강 답사지인 <창녕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고려 태조 때 처음으로 창녕이란 이름 불려
창녕고을은 가야시대에는 불사국 또는 비화가야로 존립하여 오다가 일찍이 신라에 병합되어 비자화군 또는 비사벌, 비자벌이라 하였습니다. 신라시대는 555년(진흥왕 16)에 하주의 치소를 두고 군대 주둔지인 정(停)을 두었다가 565년(진흥왕 26)에 폐지하고, 757년(경덕왕 16)에 화왕군으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이때 영산현은 본래 서화현이라 불렀으나 상약으로 고쳐서 밀양군의 현으로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940년(태조 23) 화왕군을 지금의 이름인 창녕(昌寧)으로 고쳤고 그 후 현종이 밀성군에 소속시켰으며, 1172년(명종 2) 감무를 두었으며 영산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밀성군에 소속시켰는데. 1274년(원종 15)에 감무를 두었습니다. 또 계성은 1018년(현종 9)에 밀성군에 속했다가 1366년(공민왕 15)에 영산현에 속하였으나 곧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밀성에 속하게 되는 등 변화가 많았습니다. 조선시대는 1394년(태조 3) 창녕과 영산에 현감을 두었으나 1631년(인조 9)에 창녕현은 지도의 역변으로 현이 혁파되고 강등되어 영산현에 소속되는 수난을 당했습니다.
1637년(인조 15) 어영군의 상언에 의하여 복현되어 다시 창녕과 영산 양현으로 나누어졌으며 1895년(고종 32)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의 실시로 밀양과 함께 대구부에 속하게 되었고,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자 창녕, 영산군은 경상남도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1897년(고종 34) 행정의 말단조직인 방이 면으로 개칭되었으며, 순종 융희원년에 통폐합을 거쳐 1910년 면제가 시행되었습니다.
낙동강변 신라의 군사요충지
창녕은 경상남도의 중앙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산악을 경계로 밀양과 청도, 북쪽은 청도와 대구, 서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합천과 의령, 남으로는 남강과 낙동강을 끼고 함안, 창원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지형은 동부는 산악지대, 서부는 낙동강 강변의 비옥한 농토로 형성되어 있고,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여러 개의 국도가 관통하여 사통팔달의 교통망을 이루고 있으며 부곡온천, 화왕산, 우포늪, 각종 문화재 등 관광자원이 풍부합니다.
창녕 지방은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시작된 곳으로 지석묘 등의 유적과 각종 유물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며, 삼한시대에는 부사국이 있었고 이는 비화가야(非火伽倻)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창녕읍의 송현동, 교동과 계성면 등의 고분 규모나 발굴 유물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이곳이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 데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는 것도 많은 산성과 진흥왕의 척경비가 이곳에 세워졌다는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화왕산 서쪽 기슭의 대형 고분군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화왕산 서쪽 기슭의 목마산성 아래 창녕읍 교리와 송현리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대형고분군으로, 1911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타다시(關野貞)에 의해 처음 알려졌습니다. 1917년의 분포조사를 시작으로 1918년, 1919년에 걸쳐 11기의 고분이 발굴조사 되었으나 제21, 31호분을 제외하고는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조사를 통해 마차 20대와 화차 2량 분의 토기와 금 공예품들이 출토되었으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부 유물을 제외하고는 보관처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후 1992년 1~4호분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횡구식 석실구조와 봉토의 구획 성토 과정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였으며, 토기류, 각종 금속유물 등이 출토되어 창녕지역의 고분문화 및 편년 연구를 위한 기초적인 학술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 한편 2004년에는 1917년 일본인에 의해 교동 고분군의 분포 조사가 실시된 이래 처음 정밀지표조사가 이루어져 이미 복원된 36기 외에 65기의 고분을 추가로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2002년부터 실시된 송현동 고분군 6.7호분의 발굴조사에는 국내 최초로 배 모양의 녹나무 관과 함께 280여 점의 토기를 비롯한 장신구, 마구, 무구, 농공구 등 90여 점 이상의 철기와 100여 점이 넘는 목기가 출토되었습니다. 2006~2008년 실시된 발굴조사에서는 대형 봉토분인 15, 16호분과 중형 봉토분으로 추정되는 17호분, 7기의 소형석곽 등의 유구가 조사되었습니다. 15, 16, 17호분의 경우 이미 도굴이 상당히 이루어진 상태이기는 하였으나 봉토의 축조수법과 관련된 자료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특히 15호분에서 확인된 4구의 순장 인골에 대한 학제 간 융합연구를 통한 복원 연구는 고고학계에 큰 이슈를 남겼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를 통해 보면 금동관, 금·은 장신구, 은관 장식, 금동관모, 금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각종 마구류, 장식무기류, 비늘갑옷을 비롯한 각종 철제무기류, U자형 삽날을 비롯한 각종 농공구류와 금속용기류, 각종 토기류와 목기류가 교동, 송현동 고분군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일부 토기류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물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그 양상과 형태가 거의 흡사하며, 고분의 구조로 볼 때 5~6세기 전반의 중심연대가 되는 고분군으로 추정됩니다.
계성고분군은 계성면 소재지 남쪽 계성천을 낀 주위 야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군으로 일명 계남고분군이라 합니다. 196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첫 조사 이후 1976년, 1995년, 1999년에 실시되었는데 발굴조사 결과 시체를 위에서 안치하고 덮어 만든 수혈식석곽묘와 시체를 한쪽 벽으로 넣고 막음하는 횡구식석실묘, 항아리에 넣어 안치한 옹관묘 등이 밝혀져 여러 가지 묘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출토유물에 의해 6세기경의 무덤들로 추정되고 있으며 특히 현실을 냇돌로 쌓은 횡구식 고분이었고, 그 위의 봉토는 냇돌과 흙으로 덮었는데 여러 방향에서 다른 토양을 이용하여 봉분을 축조한 분할 성토 방식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경북 성주와 대구 화원 등지에서도 보이고 있으며 봉토를 사방에서 동시에 쌓아 올리기 위하여 사용한 방법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군사요충지답게 많은 산성과 척경비
화왕산성은 화왕산(757m) 정상부의 험준한 바위산과 배바위가 있는 남봉 사이의 분지를 둘러싸고 쌓은 산성입니다. 전체적으로 가운데 허리 부분이 말안장 같은 형태이며, 절벽부를 따라 체성이 축조되어 있는 산정식 석성입니다. 성곽의 둘레는 약 2.7km이며, 성벽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쌓았습니다. 성내 구조물로는 문지, 집수시설, 추정 건물지, 축대시설 등이 있습니다. 문지는 동서남북에서 모두 확인되는데, 동문과 남문은 복원해 놓았습니다. 집수시설은 못이 3곳, 샘이 9곳 있었다고 하는데 창녕조씨 득성 설화가 전해지는 연지 1기를 복원해 놓았습니다.
산성을 처음 쌓은 시기는 대체로 5~6세기로 보며,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새로이 사용되는 등 비교적 오랜 기간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산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태종실록>에서 찾을 수 있는데, 태종 10년 2월에 화왕산성을 비롯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의 주요 산성을 고쳐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성종 때에 그 기능을 상실하여 폐성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임진왜란 때 창녕뿐 아니라 영산, 현풍을 아우르는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곽재우 장군이 의병 활동의 본거지로 활용하면서 크게 고쳤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도 한두 차례 중수해 지금까지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목마산성은 화왕산의 북쪽 봉우리로부터 서쪽으로 뻗은 지맥의 끝부분에 하나의 계곡을 포옹하여 축조한 포곡식 산성입니다. 축성연대에 대해서는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불명확하나, 그 아래의 송현동, 교동 고분군에 연결되어 있고 위쪽으로 화왕산성이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화왕산성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화왕산성을 방비하기 위한 외성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목마산에는 수림이 울창한데 그 서남쪽 경사면의 계곡을 이용하여 능선을 따라 석재로써 쌓은 석성이나 대부분 좌우로 무너져 내려 확실한 구조는 알 수 없습니다. 외벽의 경우는 비교적 정교하게 쌓았으나 내벽은 조잡하게 층단식으로 점차 안쪽으로 낮아지는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영축산성은 영축산 능선의 병풍처럼 생긴 자연 암반을 북벽으로 하고, 서남쪽의 계곡을 성내로 하는 포곡식 산성입니다. 신라 지마왕(112-134) 때 신라와 가야의 국경에서 전쟁이 자주 발생하여 가야가 신라의 침범을 막으려고 축성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왜적과 접전한 곳으로 1875년에 현감 김봉수가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성은 남쪽의 좁은 계곡을 성문으로 삼고 좌우 낮은 지역에는 자연석으로 쌓되 높은 암벽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능선을 따라 축조하였으므로 정면이 마치 2등변 삼각형처럼 보입니다.
성산산성은 낙동강을 바라보는 원형의 산성으로 창녕~합천선 지방도로 옆에 있습니다. 둘레 1.2㎞이며 면적 39,669㎡인 작은 석성으로 562년(진흥왕 23)에 신라가 창녕 지방을 점령하던 당시 초계, 의령 방면의 왜적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대부분이 무너지고 성터만 남아 있습니다. 조선 시대는 곽재우 장군이 인솔한 의병이 이곳에서 유격전으로 왜군을 격퇴했다고 합니다.
신당산성은 고분군이 산재해 있는 신당마을 뒷산 소구릉 위에 서향으로 축조한 원형의 테뫼식 산성으로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전체적인 형태는 남아 있습니다. 성의 둘레는 내성이 450m, 외성이 650m이며, 면적은 21,818㎡입니다. 내외면 모두 경사 아랫부분을 흙과 돌로 쌓은 혼축성이나 경사가 가파른 곳은 냇돌과 반듯하게 다듬은 화강석을 받쳐서 쌓았습니다.
국보 제33호 신라진흥왕척경비
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제33호)는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말이 없고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고 부릅니다. 이 비는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개석이나 대석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시대 비문의 일반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한 면을 간 다음 바깥 면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의 줄을 돌렸는데 오른쪽 상부는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어 한 행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순수의 연시(신사년 2월), 사적, 수가인물(수행원)의 3부분으로 되어 있고 인물의 기록 순서는 속부, 인명, 직관, 직위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 비문의 일반적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서체는 해서체이고 글자 간격은 4㎝이며 앞부분이 마멸되어 자획이 불분명한 것도 있습니다. 원래 화왕산 기슭에 있던 것이 소풍 갔던 학생에게 발견되어 알려졌는데 1914년 창녕초등학교 일본인 교장 하시모토(橋本良臧)에 의해 학계에 보고되었습니다. 그 후 1924년 지금의 만옥정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습니다.
창녕과 영산에 읍치구역
창녕객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의 익공계 건물로 수차례 해체와 이전으로 인해 벽체는 없어졌고 나무로 된 뼈대만이 남아 있습니다. 나무기둥 14개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용마루와 서까래, 이음부분 등 건물 전체에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300~400년 전의 건축물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축조연대는 알 수 없고,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본래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주사와 양익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주사로만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4년 당시 군수 이장희가 시장이설계획에 따라 시장용 건물로 쓰기 위하여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 이곳 만옥정에 이전, 보수하였습니다.
영산읍성지는 석축 읍성 터로 태자봉을 중심으로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본래 흙으로 쌓은 성을 조선 시대에 돌로 개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읍성의 둘레는 3,810척이고, 성벽의 높이가 12척 5촌으로 1573∼1618년에 축조하였으나 피폐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시가지와 경작지가 들어서 대부분 붕괴, 멸실되었고 성안에 있던 연못도 메워져 버렸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석축 부분은 마을에 있는데 높이 약 3m, 너비 약 1.5m, 길이 약 100m 정도입니다. 성루 자리의 직각형 석벽은 자연석으로 축조되었고 성안 밭 가운데 성벽은 조형석과 자연석으로 축조되었는데, 이 부분은 신라 이전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안에는 건물들이 1930년대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창녕향교는 외삼문, 동재, 서재, 명륜당, 동무, 서무, 대성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그 뒤에 인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외삼문은 솟을삼문 형태로 높은 석축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석축에 사용된 석재 가운데는 연화문이 양각된 사찰의 기단 면석 등이 혼용되어 있습니다.
영산향교는 경내에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이 남아 있습니다. 전학후묘의 배치 방식을 따랐으며,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재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의 석빙고와 홍예교
창녕석빙고(보물 제310호)는 구조양식과 장빙(藏氷)의 풍속이 그 당시에 제도화되어 성행하였던 점을 미루어 보아서 조선시대에 중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빙고는 봉토도 거의 완전하며, 외부의 모양은 마치 거대한 고분처럼 보이고 뒤에 흐르는 개천에 직각 되게 남북으로 길게 구축되었습니다. 빙실의 입구는 좌우에 장대석을 옆으로 건너지르며 쌓아 올려서 천정을 구성하였으며 사이의 천정에는 외부로 통하는 환기공이 두 곳 설치되었습니다.
벽은 잡석으로 쌓았으나 평평한 방벽이 되게 표면을 치석하였습니다. 구조양식은 석빙고의 전형인 경주나 안동의 석빙고와 동일한데 규모에 있어 약간 작을 뿐입니다. 빙고 우측에 남아 있는 비에 의하면 ‘崇禎紀元後再壬戌二月初一日女四月初十日畢’이라 새겨져 있으며 1742년(영조 18)에 현감 신서 등이 축조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빙실 길이는13.05m, 홍예 높이는 약 4.75m, 너비는 4.65m입니다.
영산석빙고(보물 제1739호)는 화강석으로 쌓은 조선 중기의 얼음 창고로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여지도서>와 조선 후기의 읍지에 따르면 현감 윤이일이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들어가는 입구가 높고 뒤로 갈수록 낮은,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는 거칠게 다듬은 큰 돌로 쌓은 네모진 형태입니다. 창고가 있는 곳에서 바라다보면 빙고 뒤쪽 끝으로 개울이 있는데 지금은 개울에 물이 말랐지만, 이는 상류에 제방을 쌓았기 때문이며 옛날에는 수량이 풍부했다고 합니다.
영산만년교(보물 제564호)는 다리의 경계에 세워진 남천석교비에 1780년(정조 4) 석수 백진기가 축조하였고, 1892년(고종 29) 현감 신관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서 중수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전체 길이가 13.5m, 폭이 3m입니다. 자연 암반 위에 대석을 설치하고 편단석을 올려 반원의 홍예를 구축하였으며 외형은 무지개 모양입니다. 홍예의 재료는 화강암이며, 전후 양측의 다리 벽은 자연 잡석을 쌓아 메꾸었으나 홍예 머릿돌 위에는 비교적 규격이 큰 각이 진 돌을 배열하였습니다. 홍예 석축 위는 상승 각도가 완만한 흙으로 되어 있고 난적 석벽은 더욱 길게 전후로 연장되어 양 개울가의 도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원과 고택도 많이 남아 있어
물계서원은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의 아들 성송국을 비롯하여 성씨 문중 21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1710년(숙종 26) 창효사로 창건하였고 1719년 세덕사로 개칭하였다가 1729년(영조 5) 지역 유림의 건의로 물계서원으로 편액 하였습니다. 1866년(고종 3) 조령에 따라 철거되었으나 1995년 복원하였습니다. 숭덕사, 현도문, 신삼문, 강당, 중부당, 동재, 서재, 전곡청, 영보각, 무변루, 원정비각, 고직사 등 14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구니서당은 약 500년 전에 고암면에 자리 잡은 김굉필의 둘째 아들인 김언상의 후손들이 약 300년 전에 봉선소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그 후 묘각 또는 서당으로 이용되어 오다가 1866년(고종 3) 사림에서 김언상을 비롯한 4현을 모시고 서원을 건립하였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16년 규모를 넓혀 지금의 정당을 중수하였고, 지금은 정당을 비롯하여 사당, 동재, 서재, 문루, 관리사 등이 있습니다.
광산서당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창녕 일대의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나라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종군한 의병장 양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8세손 전환과 9세손 정규 등의 후손들이 1935년에 세운 건물입니다. 건물은 방 3칸, 마루 2칸, 대청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5량집으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서고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경모당은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200여 년 전 세워진 건물로 추정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영묘 임술년에 문중의 후손들이 지붕을 수리하고 영귀재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합니다. 건물은 관청에서만 사용하였던 둥근 기둥을 사용한 점이 특색으로 꼽힙니다. 이곳에는 중국 원나라 출신으로 공민왕의 비가 된 노국대장공주를 수행하였던 청주양씨의 시조 충헌공 양기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영산신씨 고가는 200여 년 전 영산신씨 일족이 살던 집으로 마을에서 만석군의 집으로 불렸습니다. 위치는 영산향교 및 영산읍성지와 인접해 있습니다. 건물은 모두 8동으로, 안채를 비롯해 사당, 아래채, 문간채, 중사랑채, 창고, 대문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옥의 배치는 전형적인 부농 민가의 구조인데, 안채와 사랑채가 앞뒤로 나란히 서 있고 각각 ‘ㅁ’자, ‘ㄷ’자 모양의 독립된 공간으로 분할되어 남녀의 공간 분화가 뚜렷하게 나타나 보입니다.
개방적인 사랑 마당은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랑채의 좌우에 곳간과 별당이 배치되어 있고 별당의 마루는 사랑 마당과 반대편에 놓여져 별당 공간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폐쇄적인 여성들의 공간인 안마당은 사랑채 좌우의 좁은 중문을 통하여 연결되고 남자는 주로 동쪽 중문, 여자는 서쪽 중문을 사용하였습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3량 구조 팔작지붕이며 대청은 2칸을 차지하고 건넌방의 툇마루는 누마루 형식으로 높게 되어 있으나 난간은 없습니다.
석리 성씨고가는 ‘튼ㅁ자형’ 형태로 안채, 사랑채, 곳간 2동, 대문채, 화장실 등 건물 6채가 있으며 안채의 앞쪽으로 사랑채와 중문채가 있고 안마당 양옆에는 곳간 2동이 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는 1929년에 지어졌거나 이전되어 온 것이며 공간 구성 또는 가구 기법 등에 근대한옥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씨고가는 ‘노스페이스’ 상표로 잘 알려진 영원무역의 성기학 회장이 실소유주로서 한때 37개 동 130칸의 대규모 한옥 고대광실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됐다가 2000년대 들어 성 회장이 대부분 복원했는데 크게 구연정, 경근당, 아석헌, 석운재 등 4개 영역으로 나뉩니다.
구연정 영역은 안채의 위풍당당한 누마루가 있으며 누마루 앞엔 S자 형태의 연못이 조성돼 있습니다. 이곳 터가 지네의 입에 해당하는 자리여서 지네가 좋아하는 지렁이를 형상화했다고 합니다. 누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연못은 영락없는 한반도 모양이라서 ‘반도지’로도 불립니다. 일제강점기 때 집 주인 성재경이 고가 앞에 ‘지양강습소’를 세워 교육에 힘쓴 만큼 독립정신이 투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안채 바로 앞 큰 바위에 ‘石門洞’이란 글귀가 음각돼 있는데 석동 또는 석리라는 지명의 유래를 짐작게 합니다. 경근당은 성기상 푸드웰 회장과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형제의 생가이자, 이 집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곳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정면 6칸의 안채는 시멘트를 사용했고 대청마루 등에 유리 창문을 달아 근대에서 현대로의 시대 변천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민족주의자의 ‘적선지가’에서 ‘빨갱이’ 집안으로
석리는 창녕성씨 집성촌으로 1850년대 아석헌 성규호가 유원면 회룡에서 이곳으로 터전을 옮긴 이후 150여 년째 일가들이 세거해 오고 있습니다. 성규호는 ㄷ자의 안채와 한일(一)자의 사랑채를 짓고 “나 또한 돌처럼 살리라”라는 뜻의 아호 아석(我石)을 당호로 삼았다. 성규호의 장남 성찬영 슬하엔 낙문, 낙교, 낙안, 삼 형제가 있었는데 장손 낙문은 가산을 크게 일으켜 가택을 중심으로 반경 6㎞의 드넓은 전답을 경영했습니다. 가문의 법도는 엄격하여 적선을 가훈으로, 근검과 청렴을 가풍으로 삼았습니다. 석민 성낙안과 사촌 성낙성은 사회사업에 치중했하여 1920년 고가 앞 신작로 건너편에 지양강습소를 지어 교육에 힘썼습니다.
낙안의 아들 우석 성재경(성기상, 성기학 회장의 아버지)은 선친의 뜻에 따라 광복 후 경근당 앞에 지포중학교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성재경의 할아버지 성찬영은 1909년 전국에서 처음 양파 재배에 성공했고, 손자 성재경은 채종에 성공해 대량 보급의 길을 열었습니다. 성재경은 인근 경작지에 보리 대신 환금성이 높은 양파를 재배토록 해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왔으며 이후 창녕은 양파 시배지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민족주의자였던 우석 성재경은 ‘적선지가(積善之家)’로 성씨 집안의 기반을 다진 분이었으나 적선지가 전통에도 이 집안의 일부 가족이 좌익 활동을 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빨갱이 집안’으로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습니다. 성재경의 사촌 성유경(성낙교의 양자)은 좌익 성향의 인텔리로 남로당원이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 두 딸 혜랑과 혜림 등 가족들을 데리고 월북을 하였습니다. ‘김정일의 여자’로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성혜림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성혜림 일대기는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성혜림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방학 때면 할아버지 집인 성씨 고가를 찾아 마을 또래들과 어울렸다고 합니다. 성혜림은 평양예술학교 졸업 후 월북 작가 리기영의 장남 리평과 결혼해 딸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뛰어난 미모와 발군의 연기로 북한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도 자리를 굳혔습니다. 그러나 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김정일의 눈에 띄었고, 김정일은 리평과 결혼생활을 중지시키고 1967년 성혜림과 동거에 들어갔으며 두 사람 사이에 김정남이 태어났습니다. 이들의 동거는 당시 김일성 주석의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여서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이때부터 성혜림은 배우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폐쇄된 생활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언니 혜랑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나야 했습니다. 혜림 곁을 지키던 혜랑과 그의 아들 이한영은 망명했고 지병인 신경쇠약과 심장병으로 오랜 투병 끝에 성혜림은 2002년 5월 숨졌습니다.
관룡사의 보물 6점
관룡사 대웅전(보물 제212호)은 1965년 해체,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조선 태종 원년에 창건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9년에 중창하였고, 그 후 영조 25년에 다시 중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룡사사적기>에는 1704년(숙종 30) 가을의 대홍수로 금당 부도가 유실되고 승려 20여 명이 익사하는 참변을 당한 후 1712년(숙종 38)에 대웅전과 기타 전각은 재건한 것으로 되어 있어 상량문과는 일치되지 않으나, 건물에 관한 한 상량문을 더 중시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팔작지붕의 다포계 건물로 비교적 조선 중기 이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건물 내부는 뒤쪽에 치우쳐 고주 2개를 세워 그 위로 대들보가 건너가게 했습니다. 고주를 의지하여 불단을 설치했고 그 상부에 닷집을 달았으며,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중앙 부분을 주위보다 한층 높게 한 것이 특이합니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은 관룡사 서쪽의 봉우리인 용선대에 동향하여 앉힌 여래좌상으로, 석굴암의 본존불과 똑같은 양식으로 조성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높은 대좌 위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높고 큼직하며 얼굴은 4각형에 가까우나 풍만합니다. 목의 삼도는 가슴까지 내려와서 형식화되어 있고 통견의 법의는 몸에 밀착되었으며 몸은 당당하지는 못하나 통통하고 안정감을 주며, 광배는 결실되었습니다. 대좌의 상대는 반구형이며, 판내에 화문이 있는 중판 연화문이 앙연으로 조각되고 중대석은 8각입니다. 불상 바로 앞에 하대석만 남아 있는 석등이 있는데, 불상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보물 제1730호)는 본존불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삼불상과 본존불의 대좌입니다. 본존불의 대좌 밑쪽에 묵서를 통해 숭정 2년, 1629년(인조 7) 기사년 10월에 불상 조성을 시작해서 다음 해(1630년) 5월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존 석가여래불 좌상은 높이가 150cm로 비교적 큰 상에 속하며 양쪽의 불상들은 120cm 정도의 크기입니다. 불상들은 얼굴형이 네모나고 코가 유난히 높고 크며 입과 턱 사이의 간격이 좁은 편이어서 상의 인상이 약간 어린 아이와 같은 천진한 표정입니다. 불상의 옷주름 처리가 단순하고 넓은 면으로 율동감 있게 표현되었으며 결가부좌한 다리 부분의 폭이 짧은 편으로 불상의 안정감과 위엄스러움이 약간 쇠퇴되어 보입니다.
조각에는 현진, 승일, 천민, 수영 등 6인이 참여하였는데 그중의 대표 격인 현진은 17세기 초에 함양 상령대보살상, 구례 천은사의 목조보살상, 보은 법주사 소조아미타여래삼불상 조성에 참여하였으며, 이 상은 비교적 현진의 말년에 제작한 상입니다. 현진의 초기 불상에서 보이던 예쁜 모습은 사라지고 대형의 법주사에서 보이던 엄숙한 표정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천진스러운 모습에서 현진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각승 승일과는 처음으로 같이 제작하였으며 승일이 제작한 영광 불갑사 석가여래삼불상, 하동 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조상과 같은 상에서 그 양식적 계승의 특징이 보입니다.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은 약사전에 안치되어 있으며, 16개 꽃잎이 겹쳐진 부연이 아름답게 새겨진 대좌 위에 앉아 있는 여래좌상입니다. 수인은 약사인인데 오른손의 약호는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대석은 제작기법이 수려하여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이지만, 상대석은 제작기법이 거칠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불상도 약간 조잡한 느낌이 있으나 고려 불상으로 추측되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며 불상의 외면에는 후대에 칠한 것으로 보이는 회칠이 되어 있었으나, 2001년 약사전 보수공사 때에 회칠을 제거하고 원래 갖추었던 형태로 복구하였습니다.
약사전(보물 제146호)은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미상이나 <사적기>에 약사전이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소실을 면했다고 기록된 점과 그 후의 산사태로 화를 입었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 초기로 건축으로 추정됩니다. 주심포의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기둥 사이를 3분하여 좌우에는 북막이 창을 고정하고 중앙부는 두 짝의 여닫이문으로 되어 있으며 공포는 네 귀의 기둥 위에만 있습니다. 공포의 짜임과 첨차의 쌍 조각 산미의 뿌리, 우미량 납도리와 중도리, 배흘림을 한 기둥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조선 초기의 건물 양식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보물 제1816호)는 보타락가산에서 설법하는 관음보살을 선재동재가 방문하여 법을 청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벽면 전체에 관음보살을 채워 크게 부각시켰습니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보채(補彩)가 이루어졌지만 좌우로 넓게 퍼진 보관과 영락장식, 옅은 수묵으로 그린 기암괴석과 대나무 표현,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의 모습, 유희좌로 단정하게 앉은 보살의 자세 등에서 조선 후기 18세기 불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얼굴 표현에 보이는 강한 음영은 보채가 이루어지면서 다소 강렬하게 표현되었는데, 이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불화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또한 영락으로 장식된 쌍개머리를 하고 상의에 천의를 걸치고, 백색 바지 위에 적색 치마를 입고 합장한 선재동자의 모습, 관음보살의 주처 보타락가산을 표현하면서도 특징적인 물가 표현을 하지 않은 것 등은 다른 후불벽 관음보살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입니다.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불교 문화재들
인양사 조성비(보물 제227호)는 인양사의 금당 뒤편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이 일대의 전답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로 인정되는 문양의 기와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 당시에는 대가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각 안에 머리가 없는 높이 55㎝ 가량의 석조좌상 1구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창녕박물관에서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 비석도 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어 서쪽 편에 총탄 흔적이 있고 북쪽 편 비상에도 총탄 흔적이 있습니다. 귀부와 이수 대신에 장방형의 대석과 옥개형의 개석을 얹은 특이한 모양의 비로 불사 조성에 관하여 기록한 특수한 비석입니다. 인양사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 있는 여러 사찰의 범종, 탑, 불상, 금당, 요사 등의 조성 연대와 소요된 양식에 관하여 낱낱이 기재하고 있습니다. 앞면과 양 측면은 비문이 새겨져 있고, 뒷면 전부에는 우아한 기법으로 승상이 양각되어 있으며 앞면의 비문은 비의 제목 없이 10행으로 각행 28자를 자경 4㎝의 육조체로 새겼는데 비문은 <조선금석총람>에 실려 있습니다.
술정리동(東)삼층석탑(국보 제34호)은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은 이중 4개의 면석과 4개의 갑석으로 조립되었고, 상하 기단의 면석에는 모두 탱주 2주식이 각출 되어 있습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매이며 옥개석 받침은 각층 5단이고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습니다. 세부 양식에서 신라 석탑의 전형을 따르고 작풍에 있어 장중 명쾌한 기풍이 있는 석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각부의 수법도 통일신라 초기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불국사 삼층석탑과 비견되는 작품으로 제작 시기 또한 석가탑과 비슷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민가의 담 밑으로 하층기단의 일부가 들어가 있었으나, 1965년 주위에 있던 민가들을 철거하여 정화 보존조치를 취하였고 탑도 함께 해체 수리하였습니다. 이때 3층 탑신의 상면의 방형 사리공에서 청동향로형용기, 황색 유리제 사리병, 사리 7립, 향편, 유리소주 등의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복원 시 사리는 다시 스테인리스용기에 넣어 탑내에 보관되었으며 다른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탑을 동탑이라 하는 것은, 한 사찰내에 쌍탑이 건립되어서가 아니라 행정구역상 술정리 내에 2기의 석탑이 존재하는 이유로 붙여진 명칭이며, 서(西)삼층석탑은 약 1㎞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술정리서삼층석탑(보물 제520호)은 통일신라 석탑으로 2중 기단 위에 세운 3층 석탑으로 상층기단의 면석 중앙은 별도의 석재로 문비가 새겨져 있으며, 위에는 양 우주가 조각되고 옥개 받침은 5단이며 상층기단의 각 면석의 조각은 곡선의 아름다운 안상이 새겨져 있고, 상륜부에는 노반과 보주가 남아 있습니다. 기단은 8개의 면석으로 조립되고 탱주는 4매씩 되었으며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1매이며 전체적인 조각 기법으로 보아 술정리동삼층석탑보다 수준이 떨어지며 제작 시대 역시 같은 통일신라시대 중·후대로 추정됩니다.
송현동마애여래좌상(보물 제75호)은 커다란 암석을 이용해 조각된 마애불로 암벽을 이용했으나 통상의 평면 조각이 아니고 좌불의 돋을새김이 두드러지며, 특히 암석 자체가 보주형으로 생겨 자연 광배를 이루고 문양은 없습니다. 불상의 얼굴은 안으로 미소를 머금은 풍만한 모습이며, 소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1단의 선을 마련한 특징적 표현을 하고 있으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입니다. 우측만 걸친 법의는 유려하게 표현하였으며 전체적인 체구, 얼굴, 의문은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양식을 직접 모방했습니다. 그러나 어깨가 당당한데 비하여 다소 움츠렸고 체구가 옆으로 지나치게 벌어져서 힘이 없어 보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고을학교 기사(11월)를 확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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