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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의 마실길! 여기는 조선왕실 500년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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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의 마실길! 여기는 조선왕실 500년의 뿌리

[2022년 10월 고을학교는 <전주고을>]

10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제90강으로, 만추의 계절을 맞아 조선왕실의 뿌리이며 전라도의 으뜸고을이었던 전주로 마실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경기전은 조선왕실의 발상지인 전주에 세운 전각으로, 세종 때 붙인 이름이다.Ⓒ전주시

고을학교 제90강은 2022년 10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전주IC-조경단-풍패지관-풍남문-전동성당-경기전(전주사고/어진박물관/조경묘)-점심식사-오목대-이목대-전주향교-한벽당-서울의 순입니다.

▲<전주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90강 답사지인 <전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흠이 없이 온전하고 모든 것을 어우르는 고을, 전주

깊은 전통의 멋과 맛을 간직한 전주는 완주군과 경계의 대부분이 맞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김제시, 북쪽으로는 익산시와 접하고 있습니다.

전주의 산줄기는 북동으로부터 남서로 노령의 지맥인 기린봉, 고덕산, 남고산, 모악산 등이 뻗어 있으며, 곳곳에 200m 내외의 황방산, 가련산, 건지산, 완산칠봉 등이 자리 잡고 있어 전체적으로 산이 남쪽에서 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형태입니다.

물줄기로는 만경강의 제1지류인 전주천이 전주시 남동쪽에 있는 관촌평야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관통하여 흐르고, 덕진구 전미동에서 소양천과 합류해 만경강 본류를 이루어 시의 북쪽 경계를 이룹니다. 전주천의 지류인 삼천은 시의 남동쪽을 지나는 노령산맥의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완주군 구이면에서 들어와 시의 서쪽을 북쪽으로 흐르다 덕진구 팔복동에서 전주천에 합류합니다.

시가지의 대부분은 전주천 충적토상에 건설되어 대체로 평탄하며 전주천변을 중심으로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주(全州)의 옛 지명은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시대에는 완산(完山)이라 하였는데 마한국명으로는 원지국(圓池國)이었습니다. 전주라는 지명은 757년(경덕왕 16)부터 사용하였습니다. 전주와 완산의 지명의 어원을 살펴보면 ‘완(完)’과 ‘전(全)’ 은 모두 ‘온전하다’는 ‘온’이란 뜻을 지닌 글자입니다. ‘완’은 그 음도 ‘온’의 근사음으로서 ‘완’이란 글자는 ‘온’이란 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온’이란 첫째, 온전하고 흠이 없고 둘째, 뚜렷하고 갖추어져 있으며 셋째, 순수하고 티가 없으며 넷째, 모든 것을 어우르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온’이란 말은 완(完), 전(全)자 이외에도 원(圓), 온(溫), 백(百) 등의 한자 소리나 새김도 빌려 썼습니다. <삼국사기> 백제기 온조왕 조를 보면 백제가 마한 땅을 어우르자 줄기차게 항거했던 원산성(圓山城)도 바로 이곳이며 온조왕의 ‘온’자도 실은 온 임금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제(百濟)의 ‘백(百)’자도 온을 빌려 쓴 글자로서, 백제는 ‘온 다라’를 적은 것으로 실은 ‘완산’이나 ‘전주’와 같은 뜻입니다. 이 말은 “온 겨레가 바다를 건너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온 다라’는 ‘온 겨레’가 ‘온 뜻’을 어울려 ‘온 힘’을 합하여 거친 바다의 풍파를 헤쳐 온전하고 흠이 없으며 그리고 뚜렷하게 모든 것이 갖추어진 나라를 세우자는 이상이 담겨 있습니다.

전주는 마한, 백제시대 중심지에서 비켜서 있었지만, 만경강의 본류와 지류를 따라 충적지와 구릉지대가 발달한 자연환경과 지정학적인 이점을 바탕으로 중심지로의 성장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견훤은 900년 전주에 후백제를 세웠습니다. 후백제의 도성인 전주성(견훤성)은 승암산에서 기린봉 능선을 타고 북쪽으로 흐르는 구릉지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습니다. 고려는 성종 때(983년) 12목 체제를 마련했는데 전라도에는 전주목과 나주목이 설치되었고, 현종 때(1018년) 5도, 양계체제로 개편되면서, 전주권과 나주권이 합쳐져 전라도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는 이성계의 본향으로 왕조의 발상지입니다. 조선은 건국 후 전주에 태조 어진을 모시고 경기전이라 하여, 전주가 왕실의 뿌리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전주는 전라도를 총괄하는 전라감영의 수부(首府)였습니다.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성이었던 전주부성은 객사가 중심에 위치하고 그 앞쪽으로 서편에 전라감영, 동편에 전주부영이 자리했습니다. 1734년(영조 10) 감사 조현명이 전주성을 개축하고 4대문을 다시 쌓았습니다. 조선은 서울 춘추관을 비롯해 충주, 성주, 전주 등 4대 사고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으나 오희길, 손홍록, 안의 등에 의해 전주사고 본만은 태조 어진과 함께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전주는 호남 제일의 곡창지대 수부로 물산의 풍요로움이 한양을 방불케 하였습니다. 전주가 호수로는 한양, 평양에 이어 3번째이고, 인구수는 한양, 평양, 의주, 충주에 이어 5번째였습니다. 또한 조선후기 대사습놀이가 열렸던 소리의 고장이며, 음식문화가 발전한 맛의 고장입니다. 한지의 본가이며, 완판본이라는 이름으로 한양과 함께 출판문화를 주도했던 기록문화의 도시였습니다.

임진왜란(1592) 때는 왜군이 전주로 들어오는 두 길목인 웅치와 이치에서 전주성을 지켰습니다. 정유재란(1597) 때는 전주성이 왜군에게 점령되어 경기전 등이 파괴되지만, 임진왜란 초 전주성과 호남의 수호는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군이 전주부를 점령하였고 1895년 전주부가 전주군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후 전주면, 전주읍으로 바뀌고 마침내 전주부로 승격되어 전주군과 분리되어 1949년 전주시로 개칭되었습니다.

▲오목대는 고려 1380년(우왕 6)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전주시

견훤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후백제 유적지 동고산성, 남고산성

동고산성은 교동과 대성동이 접한 승암산 산줄기에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1,712m 이고, 동서 방향으로 314m, 남북 방향으로 256m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후백제의 견훤 왕궁 터가 발굴됐는데, 전체 188칸으로 고대 단일건물 중 최대 규모입니다. 특히 발굴 당시 출토된 연꽃무늬의 수막새와 암막새에는 전주성(全州城)이라 쓰여 있어 이곳이 견훤 왕궁 터였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남고산성은 고덕산 자락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후백제 견훤이 도성인 전주의 방어를 위해 쌓았다고 하여 견훤성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1813년(순조 13)에 고쳐 쌓으면서 남고산성이라 불렀습니다. 현재 성안에는 남고사와 관우를 모신 관성묘, 그리고 산성의 시설과 규모를 기록한 남고진 사적비가 있습니다. 남고산에는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 등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이중 만경대는 산성의 서문을 향해 우편으로 높게 솟아있는 바위 봉우리로, 남쪽 바위 벼랑에는 고려 말 정몽주가 남긴 우국시가 있습니다.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이목대, 황산대첩의 축하연이 열렸던 오목대

이목대(梨木臺)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李安社)의 유허지로서, 시조 이한(李翰) 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입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용비어천가>에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목대에도 오목대와 동시에 세워진,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가 새겨진 비가 있습니다. 오목대에서 육교 건너편으로 70m쯤 위쪽으로 가면 승암산 발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목대(梧木臺)는 고려 1380년(우왕 6)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으로, 1900년(고종 37) 고종이 친필로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 새겨진 비가 세워졌습니다. 경기전의 남동쪽 500m쯤 떨어진 곳,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는데, 옛날에는 동쪽의 승암산에서 오목대까지 산이 이어져 있었으나 전라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맥이 끊겼습니다.

▲전주향교는 전라도 53관의 수도향교로 불릴 정도로 그 규모와 세가 대단했다.Ⓒ전주시

경기전·조경묘·조경단, 조선왕실의 뿌리를 굳건히 하다

태종대에 경기전 정전을 세웠고 영조대에는 조경묘를 세워 선원경봉지지의 숙원을 굳혔는데, 동학혁명군에게 전주가 한때 점령되자 태조 영정과 함께 조경묘 위패가 위봉산성에 피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건지산에는 조경단을, 발산에는 목조의 유허비를, 오목대에는 태조의 주필유지비를 세웠습니다.

경기전(慶基殿)은 왕조의 발상지인 전주에 세운 전각으로, 세종 때 붙인 이름입니다. 1410년(태종 11)에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하는 전각을 짓고 어용전(御容殿)이라 하였습니다. 1442년(세종 24) 경기전으로 개칭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14년(광해군6)에 중건하였습니다.

정전(正殿 보물 1578호)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국보 317호)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며 지대석과 면석 및 갑석을 갖춘 기단 위에 세운 다포계 형식의 맞배집으로, 그 전면 가운데에는 1칸 규모의 기단을 돌출시켜 쌓고 그 위에 첨각(添閣)을 세워 배례청을 시설했습니다. 마치 능침의 정자각과 같은 형상입니다.

조경묘(肇慶廟)는 정전 북쪽에 있으며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 부부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전국 유생의 상소에 의하여 1771년(영조 47)에 지은 것입니다. 위패 ‘시조고신라사공신위(始祖古新羅司空神位)’와 ‘시조비경주김씨신위(始祖妣慶州金氏神位)’는 영조의 친필입니다. 1854년(철종 5) 개수되었고, 동학혁명 때 경기전의 태조 영정과 함께 위봉산성에 이안되기도 하였습니다. 외삼문, 내삼문, 본전과 그 좌우에 동무, 서무가 있습니다. 경기전 조경묘 도형을 보면 지금은 없어진 전사청, 동재, 서재, 수복방, 제기고 등 부속 건물들과 별전이 따로 있는 광범위한 영역이었습니다.

조경단(肇慶壇)은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의 묘역으로, 건지산 줄기에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태조는 묘역을 각별히 수호하도록 하였으며 이후의 역대 왕들도 정성을 다하여 보호하였습니다. 특히 고종은 1899년(광무 3) 5월에 이곳에 단을 쌓아 당상관을 배치하고 비석을 세워 전주이씨 시조의 묘로 정하여 대한조경단이라 명명하였으며, 해마다 한 차례 제사를 지내고, 단을 중심으로 450정보의 단역을 마련하였습니다. 경내 1만여 평의 주변을 돌담으로 쌓고 동·서·남·북문을 두었습니다. 조경단 남쪽 20m 지점에는 고종이 세운 비석이 비각에 안치되어 있는데 비석 앞면에 새겨진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는 글씨와 비문은 고종의 어필입니다.

읍치구역에는 풍패지관, 전라감영, 전주향교가 남아 있어

풍패지관(豐沛之館)은 조선 초 전주부성을 창건할 때 같이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뒤 성종3년(1473)에 전주부윤 조근(趙瑾)이 전주사고를 창설할 때 남은 재력으로 객사를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전라감영의 권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닌 보물로, 주관 정면에는 ‘풍패지관’이라는 유려한 초서체의 대형 현판이 걸려 있는데 명나라 재상 주지번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풍패란 한고조의 고향 지명으로, 전주가 바로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높임이 담겨 있습니다.

객사(客舍)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고을에 설치했던 객관으로, 출장을 나온 관원이나 외국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주관에 전패를 안치하고 국왕에게 배례를 올렸으며, 국가 경조시에는 민관이 합동으로 의식을 거행하거나 외객을 접대할 때는 연회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원래는 주관과 동익헌, 서익헌, 맹청, 무신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주관, 동익헌, 서익헌과 수직사만 남아 있습니다. 동익헌은 서익헌과 규모가 같았으나 도로 확장으로 인해 1칸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전라감영(全羅監營)은 전라도 일대를 총괄하는 지방통치관서로 조선왕조 500여 년 내내 전주에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전라도는 지금의 전라북도, 전라남도, 제주도까지 포함한 지역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전라감영 자리에 전북도청이 들어섰다가 2005년 전북도청이 신도심으로 이전하면서 2015년 구도청사를 철거하고 2020년 감영을 복원하였습니다.

전주향교(全州鄕校)는 1354년(공민왕 3)에 창건되어 1603년(선조 36) 순찰사 장만(張晩)이 좌사우묘지제(左社右廟之制)에 어긋난다고 조정에 품신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전주향교는 전라도 53관의 수도향교로 불릴 정도로 그 규모와 세를 자랑했는데, 조선후기의 경내 건물로는 대성전, 동무와 서무, 신문, 외문, 만화루, 명륜당, 동재와 서재, 계성사, 신문, 입덕문, 사마재, 양사재, 책판고, 직원실, 제기고, 수복실 등 총 99칸의 대규모의 건물로 되어 있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 10철, 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대성전과 명륜당 앞뜰에는 약 400여 년 정도 된 은행나무가 각각 2그루씩 있습니다. 대성전 우측 은행나무는 “수컷이 암컷으로 변하여 은행이 열게 되었다” 하여 자웅나무라고 부르는데, 이 은행을 따서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또한 일월문 앞 250년 된 은행나무는 은행을 따서 공을 빌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풍남문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성의 남쪽 문이다.Ⓒ전주시

전주성 4대문 중 유일하게 남은 풍남문

풍남문(豐南門)은 조선시대에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를 둘러싼 전주성의 남쪽 문입니다. 원래 전주성에는 동서남북 네 곳에 문이 있었지만 현재는 풍남문만 남았습니다. 축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말에는 이미 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절반이 넘게 허물어져 있던 전주성을 1731년(영조 10)에 크게 고쳐 쌓았고, 이때 남문을 명견루(明見樓)라 하였다가 이후 1767년(영조 43)에 소실된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다시 짓고 풍남문이라 하였습니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태어난 풍패(豊沛)에서 따온 것입니다. 조선 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풍패에 비유하여 풍패향이라 불렀으며,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라는 뜻으로 풍남문이라 하였습니다. 성문 밖에는 외부의 침입을 막으려고 만든 반원형의 옹성이 있습니다.

전주8경의 하나, 한벽당

한벽당(寒碧堂)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 머리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으로, 과거에는 바위에 부딪친 안개를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8경의 하나로 꼽았습니다. 한벽당은 5평 남짓 너른 마루와 서까래에, 처마 밑을 에두른 시인 묵객들이 제영한 수많은 시는 마음에 맞는 벗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공간임을 짐작케 합니다. <호남읍지(湖南邑誌> 등에는 이경전, 이경여, 이기발 등 20여 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한벽당에서 지었다는 시문이 지금도 게첨되어 있습니다.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 머리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으로, 전주8경의 하나로 꼽혔다.Ⓒ전주시

한국의 천주교 역사와 함께하는 전동성당

전동성당은 1791년 윤지충이 모친상 때 교리를 좇아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자 당시 유림들의 극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고 이에 윤지충과 그와 관련된 권상연이 참수형을 당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 터이며,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된 전교의 발상지입니다. 초대 주임신부인 보두네가 순교 1백주년을 기념해 1908년 건축을 시작하고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1914년 완공됐습니다. 그러나 성전 내부 시설과 성물 등의 설치가 다 이루어지지 못해 축복식만 진행하였고 이후 축성식은 1931년에 진행돼, 착공에서 성전 봉헌까지 무려 23년이 걸렸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전주에 새 길을 내기 위해 풍남문 성벽을 헐었는데 보두네 신부가 그 성벽의 돌들을 가져다 성당 주춧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공사는 중국인 벽돌공 백여 명이 동원돼 전주성을 헐은 흙으로 벽돌을 구웠고, 석재는 전북 익산의 황등석을 마차로 운반해 왔으며 목재는 치명자산에서 벌목하여 사용했다고 합니다. 전동성당은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동서양이 융합된 모습인데 호남지방의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입니다.

▲전동성당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 터이며,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된 전교의 발상지이다.Ⓒ전주시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고을학교 기사(10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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