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83강, 9월 답사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하고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한 이후 조선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 각 분야에 설치하였던 일제 식민지배의 유적들을 더듬어보는 기행입니다. 9월 둘째 주 일요일이 추석연휴라서 한 주 늦춰서 셋째 주 일요일인 18일에 진행합니다.
서울학교 제83강(제5기 제5강)은 2022년 9월 18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출구 장충파출소 앞공간에 모여주세요.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충단-박문사터-국사당터-조선신궁터-왜성대터-경성신사터-통감관저터-통감부터-점심식사-미스코시백화점-명치좌-조선식산은행터-동양척식회사터-종로경찰서터-조선총독부터-경무대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일제 식민지배의 현장>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통감통치에서 총독통치로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국 정부에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시켜 군사상으로 필요한 지점을 일본군이 강점하는 한편, 한국의 치안을 일본군이 맡는 군사경찰을 시행하였습니다. 이어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10월 27일에 ‘한국보호 확립실행’을 결정하고,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통감부가 설치되고, 한국의 외교권은 박탈되어 ‘보호국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1907년 7월 고종 양위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군대 해산, 그리고 10월의 경찰권 장악 등을 거쳐 1909년 7월 6일 일본 정부는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장악할 최종 방침으로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건’을 의결하고, 천황의 재가를 받습니다. 1910년 5월 30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통감에 임명,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을 공포, 그리고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면서 다음과 같은 방침을 밝혔습니다.
일본인과 차별하여 한국인을 통치하고, 총독이 천황의 직속 하에 일체의 정무를 관장하며, 식민통치기구는 될 수 있는 한 간편한 조직으로 하고, 하급관리는 한국인으로 다수 충원한다는 것입니다. 조선총독부의 최고 지위에 있는 총독은 식민지사회의 최고 권력자로서 입법, 사법, 행정, 군통수권 등 전 분야에 걸쳐 방대한 권한을 가진 사실상의 군주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조선의 주권을 강탈한 일본제국주의가 1945년 패망할 때까지 무력(군대와 경찰)을 배경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식민통치를 수행하고 민족운동 탄압과 수탈을 총지휘한 최고의 식민지배 통치기구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다른 식민지 사회와 달리 입법, 사법, 행정에서 전권을 행사한 총독을 정점으로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식민지 조선사회에 이식함으로써 민족차별을 구조화하고 관료제의 비대한 발달을 초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변천과정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일본제국의 식민통치를 시행한 최고 행정관청인 조선총독부가 사용한 건물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개의 건물을 거쳐 갔습니다. 일본은 대한제국과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같은 해 12월 20일에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하였는데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기로 한 조약 내용에 따라 1906년 2월 1일에 통감부 및 각 이사청의 개청식을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광화문 육조거리의 대한제국의 외부(外部) 청사를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다가 1907년 2월 28일에 남산 예장동, 회현동 일대의 왜성대에 르네상스 양식의 2층 목조건물로 통감부 청사를 건립하였습니다. 1910년 8월 29일에 한일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일본은 왜성대 통감부 청사를 조선총독부 청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식민지배의 중심인 왜성대 총독부 청사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1920년에 조선 총독의 암살과 총독부를 폭파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미수에 그쳤고, 1922년에는 김익상 의사가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하여 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후 1926년 1월에 총독부가 경복궁에 지은 신청사로 이전하였습니다. 처음에 신청사 부지로 종로구 동숭동 옛 서울대학교 문리대 자리와 서울특별시청 자리가 물망에 올랐지만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를 반대하여 일본인 건축가 이토 주타에 의해서 경복궁 흥례문 구역이 신청사 부지로 선정되었습니다. 마침 경복궁 흥례문 구역은 1915년에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총독부 청사의 신축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철거된 상태였습니다.
공사는 1916년 7월 10일에 착공하여 1926년 1월 4일에 건물을 완공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1일 시정기념일에 맞추어 낙성식을 가졌습니다. 총독부 청사의 신축 공사는 처음에는 5개년 계획과 300만 엔의 예산으로 시작하였지만 완공까지 10년이 걸렸고, 675만 1,982엔의 예산이 소요되었습니다.
총독부 신청사는 당시 일본의 본토와 식민지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으며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이었습니다. 건물 안쪽에 뜰을 배치한 ‘日’자형 평면에 지층과 지상 4층을 올린 총 건평 9,600여 평의 건물로,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벽돌로 기둥 사이의 벽을 채우고 외부를 화강석으로 마감하였으며 지붕에는 돔 모양의 중앙탑옥을 얹었습니다.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식민지 지배기구로서의 권위를 강조하였습니다. 조선은행과 철도호텔에 이어서 조선에서 세 번째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습니다.
전해지는 속설로 백악,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경성부청 청사(현재 서울특별시청)의 외관을 조합하면 한자로 ‘대일본’(大日本)을 형상화하고 있어서 풍수지리학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를 상징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공사관의 이전 경로
일본의 하나부사 공사가 최초의 정식 주차판리공사 자격으로 서울 서대문 밖 청수장에 들어온 것은 1880년 12월 17일이었으나, 청수장이 일본의 공사관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 4월부터입니다. 임오군란으로 청수장의 일본공사관이 불타버리자, 일본으로 철수했던 일본공사관은 1882년 8월 16일부터 1884년 4월 16일까지 왜성대의 이종승 집에 있다가, 1884년 4월 17일부터 교동의 박영효 저택으로 임시 이전하여 그 곳에 신축중인 공사관 건물 중 완성된 부분과 함께 사용하다가, 1884년 11월 3일 천장절을 기하여 교동공사관 낙성식을 거행했습니다. 이곳이 지금의 천도교회관 주변입니다. 그러나 이 건물은 1884년 12월 7일 갑신정변으로 불타 없어졌습니다.
이후 일본공사관은 1885년 1월 12일부터 남산 왜성대로 옮겼는데, 일제는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12월 20일에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했습니다.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기로 한 조약 내용에 따라 1906년 2월 1일 통감부가 설치되기 이전까지 일본공사관으로 사용했던 건물에 개청식을 열고 사용하다가 그들에게 의미 있는 장소인 일본공사관이 있는 근처 왜성대에 1907년 2월 28일에 르네상스 양식의 2층 목조건물로 통감부 청사를 건립하였습니다.
통감 및 총독 관저의 변천
통감관저는 원래 갑신정변의 결과로 체결된 한성조약(1885년)에 따라 조선정부가 대체부지로 제공한 땅에다 일본공사관의 용도로 지어올린 건물이었습니다. 건물의 신축은 1893년 또는 1894년에 동경에서 온 동량대목(棟梁大木) 나카무라신고(中村辰吾)에 의해 이뤄졌고, 그 규모는 2층짜리 목조건물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후에 부분적인 수리와 증축은 거듭되었지만,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도 기본골격만큼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일본공사관이었던 이곳이 '통감관저'로 전환된 것은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에 따라 일본공사관이 폐지되고 한국통감부가 설치되던 1906년 2월의 일입니다. 이때에 통감부 청사는 통감관저와 이웃하는 남산줄기의 언덕 위에다 따로 지어졌습니다.
통감관저에는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嘉仁)가 1907년 10월 16일 한국을 방문하여 4일간을 머물며 숙소로 이용했던, 바로 왜성대의 통감관저였습니다. 그의 한국방문에 때를 맞춰 남대문과 연결된 성벽을 헐어내기 시작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총독관저'로 다시 전환되었고, 1939년 9월 22일에 경무대(景武臺) 총독관저의 신축과 더불어 그곳으로 옮겨질 때까지 그 기능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러한 만큼 이곳은 가히 식민통치의 본거지요 심장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용산 지역에도 또 하나의 총독관저가 운용되긴 하였지만, 이곳에서는 주로 외빈접대 또는 공식행사의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식민통치에 관한 정책결정은 거의 전적으로 남산의 총독관저에서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경복궁 뒤편에 새로운 총독관저가 만들어진 이후 왜성대의 총독관저는 역대 통감과 총독의 업적을 기리는 '시정기념관'이라는 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때마침 1940년은 일본의 황기 2600년이 되는 동시에 시정 3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여 이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추진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이곳을 진작 '병합기념관'으로 전환하려 했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을 집어삼킨 역사적인 현장을 잘 보존하여 두고두고 자랑거리로 삼겠다는 속내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총독관저는 1910년부터 남산 왜성대의 일본공사관을 관저로 사용하였고 1908년에 건립된 용산의 관저를 별도로 운용하였으며 1937년에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지역에 총독 관저를 신축하였습니다.
경무대는 고려 숙종 때인 1104년에 완공된 남경 '이궁(離宮)'이었으며 조선 개국 후 태조가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후원(後園)으로 사용됐으나 일제 강점기에 후원에 있었던 4개의 건물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총독관저를 건립하여 6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처음 이용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의 군정장관 하지 중장의 관저로 사용되다가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통령 이승만의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고, 1960년 4·19혁명 이후 탄생한 제2공화국의 대통령 윤보선은 경무대가 독재정권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하면서 1960년 12월 30일에 청와대(靑瓦臺)로 개명하였습니다. 경무대는 경복궁(景福宮)의 '경'자와 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무'자를 따온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였던 악명 높았던 종로경찰서
종로경찰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하던 악명 높은 경찰서였습니다. 1910년 식민통치 시작 후 경성에는 북부경찰서, 남부경찰서, 용산경찰서, 창덕궁경찰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5년 경성의 경찰서 재편이 이루어지는데 동대문과 서대문 분서가 합쳐져 북부경찰서가 되고 북부경찰서는 종로경찰서로 개칭됩니다.
이름을 바꾼 종로경찰서는 1915년 7월말 일한와사회사 건물로 이전하게 됩니다. 이 건물은 한성전기회사 사옥으로 1901년에 지어진 조선의 근대화 추진 이후 종로통에 세워진 최초의 2층짜리 서양식 건물입니다.
우리나라에 전차를 도입한 회사인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 설립하여 1904년 한미전기회사로 변경하고 1909년에는 일본 국책회사인 일한와사회사로 넘어갔습니다. 와사(瓦斯)란 '가스'라는 뜻입니다. 이 회사는 1915년 9월 사명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변경하였는데 오늘날 한국전력의 전신입니다. 위치는 지금의 YMCA회관 바로 옆입니다.
1923년 의열단 단원 김상옥 열사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 YMCA 건물 옆에 있던 초기 종로경찰서 건물입니다. 그러다가 1929년 9월 옛 경성 복심 지방법원이 있었던 곳으로 이사를 가서 옛 법원이 사용하던 건물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하는데 이곳의 위치는 조선시대 의금부가 있었던, 지금의 종로1가 사거리 SC제일은행 건물이 있는 곳입니다. 법원은 1928년에 정동에 새 건물(현 서울시립미술관)을 지어 이사를 갔습니다.
처음의 종로경찰서 건물은 헐린 후 장안빌딩이라는 이름으로 새 건물이 들어섰는데 이 건물에서 다시 역사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해방 직후, 1945년 8월 16일 최초의 공산당이 이곳에서 결성되는데 공산당 이름이 빌딩 이름을 따서 이른바 '장안파 공산당'입니다. 이 장안파 공산당은 얼마 안 가 박헌영에게 공격을 받으며 해산하였습니다.
동척의 토지수탈, 식산은행의 자금수탈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같이 일본정부의 직접적 지배 하에서 그들의 특권에 기초한 독점적 특수회사입니다.
일제는 1908년 의회에서 동양척식회사법을 통과시키고, 이를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1000만 원 자금으로 한국에서 척식사업을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한국정부는 사업용지의 일부를 국유지로 출자함으로써 한국이 자원개발 식산진흥을 담당하였고, 일본은 경험이 풍부한 농민을 이식하고 진보된 농법을 시범함과 동시에 기업가에 대해서도 이자가 싼 자금을 공급하여 식산사업에 이바지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을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창립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반응은 냉담하였습니다.
회사가 설립되자 한국정부로부터 토지 1만 7714정보를 출자 받고, 1913년까지 토지 4만 7148정보를 헐값으로 매입하였으며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이후인 1920년 말에 회사 소유지는 경작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만 7천여 정보에 달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하여 막대한 면적의 산림지를 가로채어 1942년 말 16만여 정보의 임야를 소유하였습니다.
이같이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소작인에게 빌려주어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고,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둬들였습니다. 또한 그 소유지는 일본인 이주자에게 싼값으로 양도되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직영지 면적은 점차 감소되었으나, 1937년 동척이 직접 경영한 경작지 면적은 6만여 정보에 달했습니다.
일본은 각종 특혜를 주며 1910∼1926년에 17회에 걸쳐 일본인 이민 희망자 약 1만 명을 엄선하여 조선침략의 담당자로 활용했습니다. 이들 이주민은 경기·경상·전라·황해·충청도에 가장 많았는데, 그들은 조선민중을 착취 압박한 일제의 대변자이며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926년까지 조선인 빈농 약 29만 9천명이 토지를 상실하고 북간도로 이주하였습니다.
1920, 1930년대 농민의 격렬한 소작쟁의는 동척의 조선민중에 대한 수탈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으며 특히 1926년 12월 28일 의열단원 나석주 열사가 동척을 기습하여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은 바로 이러한 민족적 증오의 한 표현이었습니다.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10월 조선식산은행령에 의해 설립된 특수은행으로 산업개발을 목적으로 대한제국 말기에 설립된 한성농공은행 등 농공은행 6개를 합병해 1천만 원의 자본금으로 동양척식회사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으며 성장하여 일본 제국의 식민지 경제지배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중요한 축이 되었습니다.
1920년부터 1934년까지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에서 자금 공급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1926년에는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이어 두 번째로 습격하였고, 중일 전쟁 이후로는 약 8년 동안의 전시 체제 속에서 채권 발행과 강제 저축을 통해 조선의 자금을 흡수하여 일본 정부와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산업 부문에 이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50년 2월에 상호가 한국식산은행으로 변경됐으며, 1954년 4월엔 새로 설립된 한국산업은행 등으로 모든 업무를 이관하고 주요 자산을 양도한 뒤 해산됐습니다.
최초의 경성신사, 황국신민화의 상징 조선신궁, 전몰장병을 기린 경성호국신사
목멱산(남산) 자락에는 경성신사, 조선신궁, 경성호국신사가 있었습니다. 경성신사는 1897년에 창건되었고, 1936년 국폐소사로 승격되었으며 주제신은 아마테라스(天照大神)와 개척3신이었습니다. 1897년 경성에 살던 일본인들이 이세신궁에서 신체를 받아와 이듬해 왜성대의 현 리라아트고 자리에 '남산대신궁'이란 이름으로 창건하여 조선신궁 완공 이전까지 사실상 조선의 신사를 대표했습니다. 1916년에 총독부로부터 정식으로 신사로 허가를 받으면서 '경성신사'로 개칭했고 1929년에 숭의여대 자리로 이전하고 개척3신을 합사했습니다.
경성신사는 조선신궁의 섭사가 되지 않도록, 조선신궁의 체면으로는 허락하기 어려운 신토식, 결혼식을 주관한다거나, 심지어 조선인들까지 어울려 놀 수 있는 축제를 열었습니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권위를 상징했기 때문에 모든 의례에서 '엄숙'을 강조했으므로 경성신사처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경성신사는 신토식, 결혼식의 명소로 떠올라 돈을 많이 벌었고, 그 돈으로 시설을 확충하고 경내를 넓혔습니다. 경성신사는 1945년 해체되었는데 철거된 자리에는 일시적으로 단군성조 묘가 세워졌다가 현재는 숭의여자대학교가 들어섰습니다.
조선신궁은 메이지 일왕과 일왕가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모신 관폐대사(일본의 역대 천황과 황족을 기리는 국가 관리의 신사)로 조선인을 일제통치에 순응하는 황국신민화 시키려는 목적으로 세웠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강점 초기부터 조선에 일본문화를 이식하고 조선인에게 일본의 국민의식을 심기 위해서는 조선신궁(조선신사)을 건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912년 조선신궁 건립 후보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여 1919년 건축 허가를 받아 1920년에 기공해 총공사비 156만여 엔을 투입해 1925년 10월에 총면적 12만 7900여 평, 경내 면적 7천 평에 이르는 조선신궁을 완공하였습니다.
이때 논의된 후보지는 백악 남쪽(현 청와대), 사직단(현 사직단), 효창동(현 효창공원), 왜성대(현 남산골한옥마을), 한양공원(현 백범공원 일대) 등인데 최종적으로 한양공원 자리에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후보지역보다 사유지가 적고 국유지가 많아서 보상비가 적게 들고 또한 경술국치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남산 일대에 많이 살았으며[倭城臺], 조선인들도 남산을 영험하게 여겼다는 것[國師堂]이 낙점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특히 조선이 한양에 도읍할 때부터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하고, 이곳에 제사 드리는 국사당을 세워 무학대사와 여러 수호신을 모셔놓았기 때문에 그 기를 꺾을 심산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준공 전 1925년 7월경 남산 정상에 있는 국사당이 조선신궁을 짓기로 한 위치보다 높이 있다는 이유로 서대문 밖 인왕산 중턱으로 강제로 옮겼으며 그 자리에는 팔각정이 들어섰습니다.
조선신궁은 건립 과정에서 당대 일본 최고의 신사 건축전문가이고, 메이지 일왕을 모시는 명치신궁 조영을 감독한 이토주타(伊藤忠太)를 초빙해 입지 선정과 설계에 다년간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는 일제의 식민지 동화정책 전개 과정에서 조선신궁이 갖는 기념비적 특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1925년 남산 중턱에 우뚝 선 조선신궁과 이듬해 경복궁에 들어선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을 대표하는 양대 랜드 마크가 되었습니다.
조선신궁의 경내는 서북서를 바라보는 장방형으로, 주요 건물이 있는 상중하 3단의 공간과 상중하 3개의 광장으로 이루어졌으며 참배로는 세 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남산의 백범광장 쪽에서 올라가는 길로 표참도라고 했고 둘째는 남산도서관 쪽에서 올라가는 서쪽도로[西參道]이고, 셋째는 숭의여자대학교 쪽에서 올라가는 동쪽도로[東參道]입니다.
경성호국신사는 일본제국 일본군 전몰자를 기렸던 신사입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전사자가 늘어나자 여러 도시에 자기 지역 출신 호국영령을 기리는 신사를 건립하기로 계획했습니다. '호국영령'이란 일본군 전사자를 뜻하는데, 조선인들도 일본군에 강제징용 되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을 비롯한 여러 식민지인들도 일본군에 포함되었습니다.
일본군 전사자를 모신다고 모두 호국신사라고 칭할 수는 없고 공적인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일본 본토에서는 내무대신 명의로 '호국신사'들을 정하고 관리했지만 식민지에서는 총독들이 관리하였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 명의로 경성부에 경성호국신사가, 함경북도 청진부에 나남호국신사가 허가를 받았습니다. 경성호국신사는 창건으로부터 광복 때까지 1년 9개월 남짓 유지되었습니다.
경성호국신사의 주변은 자연 그대로 목멱산자락 숲이었으나, 1945년 광복 후 경성호국신사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한 뒤로는 신사와 숲을 헐고 달동네가 형성되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민들도 내려와 경성호국신사 자리 주변에 정착했고 그 후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규모 판자촌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해방촌입니다. 지금은 용산구 후암동 108계단과 해오름빌라 옆에 경성호국신사의 옹벽인 듯한 벽이 있는데, 108계단과 옹벽 외에는 경성호국신사의 다른 흔적들은 깨끗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사찰 박문사
춘무산 박문사(春畝山 博文寺)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장충단 동쪽 언덕에 세운 사찰로 박문은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이고 춘무는 호입니다. 이곳에 박문사를 건립한 이유는 장충단이 을미사변 때 피살당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쌓은 제단으로 명성황후 살해에 대한 항일감정을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1919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을 공원으로 바꾸었고 1932년에 장충단공원 동쪽 언덕에 사찰을 건립하였습니다. 박문사는 이토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했는데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 친일부역자와 1천여 명 사람이 참석하였습니다.
박문사 건축에는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을 사용했으며,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이전하여 정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사찰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철거했고, 부속건물은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습니다. 현재 박문사 터에는 신라호텔 영빈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박문사는 사라졌지만, 그곳으로 오르는 길고 가파른 돌계단은 남아 있다가 신라호텔의 한옥호텔 착공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장충단은 을미사변 때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이하 여러 장병들을 제사 지내기 위해 1900년에 만든 초혼단입니다. 그 후 임오군란, 갑신정변 그리고 춘생문 사건에서 순직한 장병들도 함께 합사하였습니다. 이곳에 제향된 인물은 대부분 일제에 항거하며 고종을 호위하던 사람들입니다.
을사늑약을 감행한 일제는 1908년에 대일감정을 악화시킨다는 구실로 장충단의 제사를 금지시키고, 민영환이 쓴 비석도 숲속에 방치하였으며, 1919년에는 장춘단 일대에 벚꽃 수천 그루를 심어 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근대화란 이름으로 문화 예술의 식민지화
명치좌(明治座)는 1936년 10월 7일 준공된 일제 강점기의 영화관이자 극장입니다. 명동의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어 미도파백화점으로부터 명동성당까지를 한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민관, 약초극장, 황금좌 등과 함께 1930년대의 일본인들을 위한 위락시설로 지어진 것으로 주로 일본영화만 상영했습니다.
해방 이후 1946년 1월에 국제극장, 1947년 12월에는 시공관, 1957년 명동예술회관으로 개칭하여 국립극장이 되었습니다. 1973년 폐쇄 이후 36년을 거쳐 2009년 6월 5일 명동예술극장으로 다시 개관했습니다. 지금은 국립극단의 명동예술극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미스코시(三越)백화점 경성점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으로 신세계백화점의 전신입니다. 1930년 10월 24일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대규모 신관을 만들어 근대적 백화점으로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대지 730평, 건평 435평, 연건평 2,300평, 종업원 360여 명으로 당시 조선과 만주를 통틀어 최고 및 최대 규모의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미스코시 경성점은 단순히 물건만 판매하는 백화점이 아니었습니다. 선진문화를 흡수, 전파하는 ‘문화살롱’이자, 근대를 직접 느낄 수 있는 경성의 명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성의 근대문물을 소개하거나 경성관광 기념엽서에 미스코시 경성점의 외관이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상류층의 휴식공간으로 이름이 높았던 옥상정원, 오전이면 ‘모닝커피’ 손님으로 가득한 커피숍 등 미스코시의 모든 공간은 당시 사람들이 ‘근대’를 만나는 현장이었습니다.
일본인 집단거주지 왜성대
왜성대(倭城臺)는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주둔한 데서 마을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훈련장인 무예장이 있었으므로 무예장을 줄여 예장 혹은 예장골이라 하였습니다. 1885년 도성 내에 일본인의 거주가 허용되자 일본인들이 남산 주변지역에 정착하면서, 임진왜란 때 이 지역이 일본군 왜장 마시타나가모리(增田長盛)를 비롯한 일본군의 주둔지였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왜장 혹은 왜성과 관련 있다고 보고, 이곳을 왜장, 왜장터, 왜성대 등으로 불렀습니다. 대한제국 때에는 일본공사관이 있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통감부 청사가 위치하였으며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에는 통감부 청사가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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