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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여성 세계는 '온통 검은색'…전쟁 '현실'은 다른 데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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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우크라 여성 세계는 '온통 검은색'…전쟁 '현실'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전쟁이 파괴한 미래-우크라 여성을 만나다] ①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저자 윤영호·윤지영씨 인터뷰

얼마 전까지 아이폰으로 동영상을 보며 깔깔 웃고 친구와 쇼핑을 하고 연애 고민을 털어 놓고 지금 일이 나한테 잘 맞는 건지 혼자 끙끙 앓다가 문득 삶이 지루하고 무료하다고 느끼기도 했을, 누구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보통의 삶'을 살던 '보통 여성들'이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하루 아침에 '난민'으로 불리게 됐다. 

전쟁은 목숨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미래도 빼앗는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내 가족과 지인들에 둘러싸여 내 미래를 어떻게 개척할지 고민과 포부로 가득 차 있었을 여성들은 갑자기 뿌리 뽑혀, 적어도 당분간은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야 하는 존재가 됐다. <프레시안>은 '전쟁 뒤 세상이 모두 검은색으로 물들었다'고 말하는 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부서진 건물과 피 흘리는 사람들의 이미지, 그리고 피해 당사자를 눈 앞에 두고도 '저 위에서' 논의되는 현실주의 등 국제정치 담론에선 발견하기 어려운 '전쟁의 현실', 전쟁이 살아있는 사람의 무엇을 파괴하는지 낱낱이 드러내고자 한다. 

전쟁 발발 뒤 우크라이나에서 탈출한 여성을 비롯해 여성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이 기획의 첫 장을 우크라이나 난민 여성, 난민을 집에 받아들인 영국 여성, 전쟁에 반대하는 러시아 출신 여성에 이르기까지 전쟁 당사자와 그 주변을 아우르는 17명의 여성을 인터뷰해 펴낸 책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메디치미디어)의 저자 윤영호·윤지영씨의 인터뷰로 연다. <피렌체의 식탁>에 공동 게재되는 이번 인터뷰는 정재권 <피렌체의 식탁> 콘텐츠 코디네이터(CC)가 진행했다. 인터뷰를 맡은 정 CC는 28년 간 <한겨레> 기자로 일한 현직 KBS 이사다.

여기 17명의 여성이 있다.

다리야, 아만다, 나탈리아, 리디아, 루드밀라, 올레나, 소피아, 자네, 알리야, 스테파니, 디아나, 안나, 메리, 아나르, 리자, 줄리아, 마리아. 나이도, 나라도, 직업도 많이 다른 이들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2022년 2월24일 하나의 사건과 함께 같은 운명의 수레바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전쟁이 터지고 나서 이들은 일상이 무너지며 삶이 달라졌다. 우크라이나 전직 기자인 올레나 빌로제르스카는 저격수로 거주지 인근에서 러시아군과 직접 전투를 벌인다. 영국 런던에 거주하는 러시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안나 오브샤니코바는 ‘조국’을 비판하는 시위에 참여하고, 런던의 영국인 예술가 아만다 그리토렉스는 생면부지의 우크라이나 난민 여성에게 안식처를 제공한다.

그리고 여기 윤영호, 윤지영 부부가 있다. 런던에 사는 두 사람은 국제 관계에 밝고,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거주해 러시아와 영어에 유창하다. 남편 영호씨는 오랫동안 금융 관련 업무에 종사했고 지금은 글을 쓰고 있다. 아내 지영씨는 여러 영역의 기업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미술 공부와 함께 글을 쓰며 생활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뒤 부부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다양한 채널을 동원해 전쟁으로 삶이 달라진 17명의 여성을 인터뷰했다. 그리고 그 생생한 목소리를 묶어 인터뷰집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를 펴냈다.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인터뷰에 응해준 이유는 침묵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 있는 곳이 다르기에, 여성들은 제각각의 시선으로 전쟁의 얼굴을 드러내고, 깊은 울림을 우리에게 전한다. 그 울림을 통해 우리는 비인간적인 전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먼 타국에서 일어난 비극과 거리를 좁힌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전쟁을 멈추라는 17명 여성의 간절한 목소리이자, 이 비극에 침묵하면 안 된다는 저자 윤영호, 윤지영의 호소이기도 하다. 책 출간에 맞춰 두 사람과 두 차례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저자 윤영호, 윤지영(오른쪽)씨. ⓒ 윤영호.윤지영 제공

"아이를 돌보는 건 여성만의 몫이 아니지만 전쟁이 그렇게 만들었다"

정재권 CC(이하 정재권): 전쟁의 참상에 분노하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 연민과 안타까움을 가질 수는 있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에서 다른 민족이 겪는 일이고, 내 일상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일텐데 17명을 인터뷰하고 책으로 엮었다.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윤영호, 윤지영을 움직인 동인과 동력은 무엇이었나?

윤영호 윤지영: <피렌체의 식탁>에 이해영 교수가 기존의 서방 언론 보도와 달리 러시아측 입장이 중심이 된 글을 실었는데, 반향이 컸다. 독자들의 문제 제기가 많았다. <피렌체의 식탁> 발행인인 김현종 대표가 페이스북에 관련 포스팅을 했고, 그 포스팅을 보는 마음이 미묘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와 사상의 자유 사이에서 어정쩡한 자세였다. ‘반론을 우크라이나 대통령보고 해달라고 하면 어떨까요?’라는 댓글을 남겼다. 김 대표가 즉각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크라이나 유명 인사의 의견은 외신을 통해서 많이 접할 수 있으니 보통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자.’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으로 인터뷰 섭외가 된 사람이 벨라루스에서 반전 시위를 하다가 투옥된 32살의 소피아 마로자바였다. 첫 인터뷰부터 강렬했고, 새로 알게 된 것이 너무 많았다. 다음으로 폴란드에 사는 우크라이나 여성 다리야 마르첸코와 연결됐다. 인터뷰 순간마다 말 못할 흥분이 있었다. 다음부터는 동력이라는 것이 필요 없었다. 인터뷰어가 생각하지 못한 스토리를 모든 인터뷰이가 가지고 있었다. 의미와 깨달음으로 온몸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매번 감정이 이입되고, 인터뷰이의 입장에 서게 되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정재권: 흔히 ‘전쟁은 여성과 아이들에게 가장 가혹하다’고 말한다. 인터뷰 대상자들이 주로 여성인 이유는 전쟁의 이런 측면과 맥이 닿아 있는가?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는가?

윤영호 윤지영: 처음에 인터뷰 대상자를 여성으로 한정한 것은 아니었다. 난민이 주로 여성과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인터뷰 대상자가 주로 여성이었다. 성인 남성은 우크라이나 국경 밖으로 나가는 데에 제약이 있다. 전투 중에 죽은 사람은 대부분 혼자 죽는데, 혼자 죽은 사람은 그래도 눈을 감고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피난을 가다가 죽은 사람은 눈을 감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전자는 남성이고, 후자는 여성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어찌 편하게 죽겠는가. 그래도 이 말은 전쟁에서 드러나는 모성을 극명하게 표현한다.

아이의 손을 잡고 피난을 가는 마음, 아이의 손에 들린 인형, 그 모습을 보고 도와야 한다는 본능, 그런 것이 인터뷰 과정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다. 여성만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쟁이 남성을 전쟁터로 가게 만들고 여성을 아이와 함께 피난하도록 만들었다. 

인터뷰 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어머니가 없는 아이를 동반한 경우라면 아버지도 나이와 관계없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을 수 있다. 자식의 손을 잡은 부모의 책임감, 인형을 안고 있는 아이의 불안감, 그것이 이 전쟁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전쟁 당사자에게 전쟁은 끝날 때까지 시들해지지 않는다"

정재권: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만 해도 한국의 미디어도 비중 있게 전쟁 상황을 소개했고, 여론의 관심도 높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많이 시들해졌다. 전황에 급격한 변화가 없는 게 이유일 수 있겠지만, 영국이나 유럽의 미디어는 어떤가? 시민사회나 반전 운동 진영의 움직임은?

윤영호 윤지영: 영국 정부나 언론,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는 실로 대단하다. 혹자는 그것을 우크라이나가 유럽을 대신하여 러시아와 싸우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를 가든지 우크라이나 국기가 펄럭이고, 어디를 가나 우크라이나 국가가 연주된다. 물가가 오르고 에너지 가격이 올랐다. 그것을 우크라이나 전쟁 탓이라고 불평할 수도 있지만, 그런 불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런 말은 스스로를 야만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물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일부 원인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크라이나를 비난할 이유는 조금도 되지 못한다.

영국인은 변화를 싫어하고 일상의 평온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2차 대전 중에 군인들에게 보낸 엽서에 다른 나라 엽서는 국기나 국가적 상징물이 그려 있는 엽서가 많았다. 그러나 영국군에게 보내진 엽서는 특별할 것이 없는 동네 오솔길, 시냇물 이런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영국군이 싸운 이유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푸틴에 의해 일상이 어느 정도 깨졌고, 일상이 완전히 깨진 난민이 도처에 있다. 이미 전쟁이다. 이미 전쟁의 당사자다. 전쟁의 당사자에게 전쟁은 끝날 때까지는 시들해지는 법이 없다.

정재권: 영국의 현지 분위기를 잘 모르는 탓에 조심스럽긴 하다. 두 사람은 “물가고 오르고 에너지 가격이 올랐다. 그것을 우크라이나 전쟁 탓이라고 불평할 수도 있지만, 그런 불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조금 과장된 것 아닌가?

윤영호 윤지영: ‘한 명도’라는 말은 과장일 수 있겠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한국에서 LGBT(성소수자)에 대한 반대 의견을 누군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부 사람들은 사석에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술자리라든가. 영국에서는 사석에서도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LGBT에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미개하고 몰지각하며 교양이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따라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조차도 감히 그런 이야기를 지극히 사적인 자리에서도 꺼내지 못한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자신이 불편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말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그 자체로 미개하고 몰지각하며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몰지각하고 교양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명도’라는 표현은 과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감정·선악 잣대 버리라고? 전쟁 피해자 경험 소외시킨 '현실'이 존재하는가

정재권: 17명의 인터뷰는 부부의 공동 작업이다. 각자는 주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인터뷰이를 찾고 실제 인터뷰를 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윤영호 윤지영: 처음에는 윤영호가 혼자 진행했다. 진행 초기에 인터뷰를 윤지영이 참관했는데, 윤지영이 보기에 인터뷰가 말도 안 되게 진행됐다. 인터뷰이는 자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인터뷰어가 감정 이입을 못하고 사실 관계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인터뷰를 하면서 놓치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기에 윤지영이 함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윤지영은 공동으로 인터뷰이를 섭외하고 예상 질문을 뽑고 인터뷰를 진행하고 정리했다. 서면으로 진행된 인터뷰는 주로 윤영호가, 줌으로 진행된 인터뷰는 공동으로, 대면으로 진행된 인터뷰는 주로 윤지영이 담당했다.

정재권: 책 서문에서 밀란 쿤데라의 말을 인용했다. “이성이 감정에게 자리를 온전히 내주면 인간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편협한 세상에 머문다”고. 이 전쟁과 17명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이성’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무엇이길 바라는가?

윤영호 윤지영: 전쟁 피해자, 전쟁 피해자를 돕는 사람들,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의 감정에 몰입하게 된다. 그럴 때면 “감정이 편가르는 선악의 잣대를 버리고 현실을 보라”는 조언을 주변에서 듣게 된다. ‘감정으로 보지 말고 이성으로 보라’, ‘당위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현실의 관점으로 보라’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쟁의 현실은 무엇이고 전쟁을 보는 이성은 무엇인가?

우리나라는 건국 이래 최고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런 번영을 만들어 낸 것이 지금의 국제정치 질서다. 이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국경이 변경되고, 민족 정체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고, 편협한 국가주의로 장벽이 세워지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현재 국경이 강대국에 의해 무시되고, 각 나라가 생존을 위해 담을 쌓고, 군비를 경쟁하는 환경에서 우리는 번영을 이어갈 수 없다.

어느 세력이든지 국경을 무시하고, 국제정치 질서를 위태롭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타국을 침략해서는 안 되며, 침략의 명분으로 다른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 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우크라이나가 현실적이지 못한 판단을 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 국제정치 현실은 침략을 통해서 국경을 변경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을 마음대로 조정하고, 우크라이나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함부로 떠드는 것을 용납한다면, 중국이 주변국과의 국경을 마음대로 조정하고, 주변국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함부로 떠드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러시아가 힘이 강하다고 그것이 용납될 수 없듯이, 중국의 힘이 세다고 그것이 용납될 수 없다. 가해자가 얼굴을 들지 못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 이성의 역할이다. 그것은 집단의 감정, 민족의 감정보다 중요하다.

정재권: 부부의 인터뷰를 읽으며 페이스북 친구인 미국 조지아공과대학의 장승순 교수를 떠올렸다. 장 교수는 미국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온라인 피케팅’을 벌이고 있는데, 지금까지 300차례가 넘었다. 세계 각지에서 참여한다. 비록 대상은 달라도 두 사람의 인터뷰와 장 교수의 피케팅은 ‘잊지 않겠다’ ‘기억하겠다’는 의미의 활동으로 이해된다. ‘기억’이란 어떤 의미일까?

윤영호 윤지영: 우리가 그분들과 비교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그분들이 가진 끈기와 진정성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억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과거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기억이라는 단어가 다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대답하기가 어렵다.

다만 우리 프로젝트에서 등장한 기억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겠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는 한 번도 별도의 민족인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어느 인터뷰이가 이렇게 답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기억하는 것과 러시아가 기억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라고. 그래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다른 민족이며, 다른 나라라는 것이다. 기억이란 바로 정체성의 핵심이다.

우크라 여성 "전쟁 터진 뒤 나의 세상은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앤트 카버가 그린 영국의 거리 벽화 <세상의 끝>.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일깨우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지만 최근 이 그림을 본 사람 대다수가 메말라 죽은 해바라기 꽃 이미지를 보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떠올린다고 한다. ⓒ메디치미디어

“(전쟁의 책임은)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 모두에게 있습니다. 전쟁 결정을 내린 푸틴과 푸틴의 협조자들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모든 러시아 국민, 우크라이나 땅에서 헛되이 죽어가고 있는 러시아 젊은이들을 모른 척하고 있는 러시아 사람, 이 전쟁을 가능하게 한 모든 사람, 남편과 자식을 전쟁터에 내보낸 모든 어머니와 아내에게도 똑같은 책임이 있습니다. 죽은 우크라이나인들을 두고 우크라이나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하는 선동가들, 그들 모두의 책임입니다. 이런 문명화된 세계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가 되질 않아요.” - 다리야 마르첸코(가명·25·우크라이나 및 폴란드 국적·시장분석가),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에서 발췌

정재권: 이제 인터뷰 당사자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4월15일 인터뷰를 했던 난민 다리야(가명)는 애초 예정대로 6월에 결혼식을 치렀다니 다행스럽다. 그는 “어리석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내 영혼, 내 가족의 영혼, 모든 우크라이나인의 영혼을 영원히 불구로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의 세상은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어 버렸다”고 얘기한다. 다리아의 세상이 밝은 빛을 되찾을 수 있을까? 

윤영호 윤지영: 쉽지 않아 보인다. 그녀의 고향이 (격전지인) 마리우폴이고, 그녀의 친가, 외가, 조부모님이 모두 마리우폴에 기반을 두고 있고, 아버지와 동생은 마리우폴을 떠나 임시 거처에 생활하고 있어서 그녀 가족의 삶이 정상화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녀가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형편 넉넉하지 않아도, 우크라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주저없이 외쳤다, "너의 집에 온 걸 환영해!"

▲우크라이나 난민 여성에게 자신의 집을 제공한 영국 여성 아만다 그리토렉스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모습. ⓒ메디치미디어

“초인종이 울렸어요. 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문을 열었어요. 나타샤는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조금 지쳐 보였지만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죠.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려 꼬옥 안아주었어요. “너의 집에 온 것을 환영해! Welcome to YOUR HOUSE!”라고 큰 소리로 말했죠.” - 우크라이나 난민 여성에게 자신의 집을 제공한 영국 여성 아만다 그리토렉스,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발췌 

정재권: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아만다는 생면부지의 우크라니아 여성 나타샤에게 런던 덜위치에 있는 자신의 집을 제공한다. 덜위치 일대에는 난민 초청 가정이 128곳 있으며, 서로 온라인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도움을 준다고 설명한다. 이런 자발적 지원이 가능한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나?

윤영호 윤지영: 나타샤는 그것을 본능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그것이 인간에 대한 신뢰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신뢰한다면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신뢰 기반이 약한 사회에서는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 영화 속에서 남자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여성을 돕는다. 그 영화를 본 한국의 어느 평론가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돕는 이유가 불명확하여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평론은 영화 못지 않게 큰 인상으로 남았다. 누가 누구를 돕는 데는 어떠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이유 없이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재권: 202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러시아 저널리스트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난민을 돕기 위해 6월에 노벨상 메달을 뉴욕 경매에 내놓아 1억350만달러에 낙찰됐다. 원화로 1300억원이 넘는 금액에 팔렸다는 얘기인데, 드라마 같은 느낌이다. 가장 참혹한 상황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류애가 꽃을 피운 것인가?

윤영호 윤지영: 노벨평화상 메달을 내놓은 러시아의 독립 저널리스트에게도 경의를 표하며, 1억350만달러라는 돈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어느 자선가(philanthropist)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우크라군 여성 저격수는 전투가 끝나면 신선한 치즈와 계란을 산다…"그 외에 무슨 다른 즐거움이 있을 수 있을까"

▲저격수로 위치한 올레나 빌로제르스카 ⓒ메디치미디어

“(저격수로 처음 적에게 방아쇠를 당겼을 때) 심적 고통은 없었어요. 그들에게 방아쇠를 당기면서 감상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처음 적을 죽였을 때의 느낌이요? 내가 쏜 총탄이 적을 곤경에 빠트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적이 사망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코티지치즈와 계란을 사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올레나 빌로제르스카(42·우크라이나군 저격수),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발췌 

정재권: 올레나는 난민이 아닌 러시아와의 전투에 참여하는 저격수인데다,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매우 이채롭다. 10여 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는 경력도 특이하다. 올레나는 저격수로 싸우는 것에 대해 뭐라고 설명하나? 

윤영호 윤지영: 그녀는 사격을 오래 전부터 배웠고, 자신이 전쟁에 참여한다면 저격수가 적격이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격을 배울 때는 스포츠 개념이었지만,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에 그녀의 취미는 직업이 되었다. 그녀는 2014년부터 전쟁터에 투입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정신적 어려움이 없었다고 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전쟁 이후에 ‘베트남 증후군’ 같은 것을 걱정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나는 강하며, 그런 것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모쪼록 그녀가 전쟁 이후에도 정신적 어려움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정재권: 올레나는 방아쇠를 당겨 처음 적을 곤경에 빠트렸을 때 “그 순간 코티지치즈와 계란을 사러 가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어찌보면 지독한 아이러니인데, 그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윤영호 윤지영: 그녀는 자신의 강인함을 내보이고 싶었고, 자신의 감정에 특별할 것이 없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녀는 전투 업무가 끝나고 나면, 동네 민가에 가서 정기적으로 코티지치즈와 계란을 샀다. 코티지치즈와 계란은 가게에서 파는 것이 아니고 일반 가정집에서 만드는 것이었다. 품질이 좋아서 많은 병사들이 그 집을 찾았다. 그녀는 그날도 신선한 재료로 음식을 요리해 먹고 싶었다. 전장에서 질 좋은 재료로 신선한 음식을 만드는 것은 꽤나 의미가 있는 모양이다. 사실 전장의 저격수에게 그 이외의 무슨 다른 즐거움이 있을 수 있을까?

전쟁에 반대하는 러시아 출신 예술가 여성 "러시아 음악이 전쟁의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

“다음날 ‘우리는 전쟁을 반대하는 러시아인이다 Russians Against War’, ‘푸틴을 멈춰라, 전쟁을 멈춰라 Stop Putin, Stop War’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파리) 생미셸 거리로 나갔다. 프랑스 사람과 우크라이나 사람이 함께했다. 동생의 시위 장면이 프랑스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우리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전쟁 반대, 우크라이나 평화 기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 전쟁 반대 목소리를 내는 러시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안나 오브샤니코바,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발췌

정재권: 안나는 러시아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영국인 남편과 런던에서 생활하고 있고, 부모님은 러시아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여동생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시위에 참여하는 등 공개적으로 전쟁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본인의 활동을 어떻게 설명하나?

윤영호 윤지영: 안나는 러시아인으로서 기본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애정이 있다. 그녀는 음악 분야에서 찬란하게 빛났던 러시아를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수많은 러시아 작곡가와 러시아 연주자를 사랑하며 자랑스러워한다. 그러한 러시아가 침략자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러시아가 침략자가 됨으로써 러시아 음악도 배척받을 수 있다. 그녀는 러시아에서 음악을 시작했다. 러시아 음악이 전쟁의 동조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러시아 음악의 어떤 부분도 이번 전쟁에 도구로 쓰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전쟁 반대는 실로 중요한 문제다. 그녀에게 전쟁 반대 운동은 매우 실존적인 이슈다.

정재권: 17명의 인터뷰 대상자 가운데 지금도 가장 특별하게 기억되는 이가 있다면? 그 이유는?

윤영호: 책의 맨 처음에 나오는 다리야 마르첸코가 가장 인상적이다.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세계는 온통 검은색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그 말 자체는 정확히 받아 기록했지만, 온전히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인터뷰를 마치며 어떤 생각이 드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공허하다고 답했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인터뷰가 <피렌체의 식탁>에 게재되었고, 이제는 당분간 물어볼 것이 없을 것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그것을 슬프게 생각했다. 그녀는 외로웠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는 곳을 갔다가 우연히 길거리 벽화를 보았다. 앤트 카버의 작품이다. 동네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부르는 그 작품 속 이미지와 다리야의 인터뷰 내용이 똑같다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돋았다. ‘검은색으로 변했다. 공허하다. 외롭다’는 말의 의미가 모두 이해되었다.

윤지영: 아만다 그리토렉스가 가장 인상적이다. 그녀는 나와 멀지 않은 곳에서 살며, 생활이 넉넉하지 않다. 그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상황에 대해 나만큼 알고 있지 못하며, 우크라이나와 관련한 글을 쓰고 있지도 않다. 그런데도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라는 뜻밖의 전화에 주저없이 “OK(좋아)”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보다는 여유가 있고, 러시아어를 할 줄 알며, 우크라이나도 잘 알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인터뷰도 진행하고 있다. 나에게는 그러한 제안이 없었지만, 있었다면 나는 아만다처럼 주저 없이 “OK”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 같다. 나도 난민을 돕고 있지만 아만다처럼 온 마음을 다하지는 못한다. 무엇이 나와 아만다의 차이를 만들었는지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내내 생각했다.

"히틀러와의 어정쩡한 타협을 누가 원하겠는가"

정재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전쟁은 어떻게 매듭지어지는 것이 현실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보나?

윤영호 윤지영: 어려운 질문이다. 이 전쟁은 2차대전 이후에 강대국이 관련되었던 다른 전쟁과는 여러모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서구 사회가 푸틴을 히틀러와 비유하는 것은 단순히 침략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다. 이 전쟁의 도덕성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반론을 편다. 여기서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 미국을 옹호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 전쟁은 20세기 후반에 강대국이 개입한 여타의 전쟁보다는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에 가깝다. 먼저 이 전쟁은 강대국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전쟁이 아니라 영토를 확대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면에서 히틀러의 전쟁에 가깝다. 둘째로 침략자가 피침략 국가의 민족 정체성을 전쟁의 구실로 삼고 있는 면에서 히틀러의 전쟁에 가깝다. 그런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이 전쟁은 애매하고 어정쩡한 타협으로 결론을 내기가 어려워졌다. 히틀러와의 타협이나 히틀러와의 어정쩡한 결론을 누가 원하겠는가?

정재권: 런던에서 두 사람의 일상은?

윤영호 윤지영: 평범하다.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표지 ⓒ메디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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