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태 교장선생님은 얘기합니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밤>의 가사가 가장 잘 어울리는 여름입니다. 무더울 때면 더 생각나는 제주입니다. 어디서보다 건강한 땀을 흘릴 수 있고, 온 종일 해가 들지 않는 짙은 제주의 숲 곶자왈은 우리 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푸르게 만들어줄 것 같습니다. 이번 여름은 제주에서도 더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 서귀포를 찾아갑니다. 서귀포시의 동쪽 제지기오름에서 대정읍의 가시악까지 서귀포의 해안을 따라 늘어선 오름과 숲, 바다를 쏘다니려 합니다. 새연교 건너 찾아가는 새섬과 ‘모세의 기적’이 펼쳐지는 신비로운 섬, 서건도도 들립니다. 하나같이 걷기 쉽고 신비로운 제주의 숨은 명소들입니다.
오름학교(교장 이승태. 여행작가·제주오름 전문가)의 2022년 8월 19(금)-20(토)일, 제20강은 <여름특집 : 서귀포 해안의 오름과 바다-매오름, 제지기오름, 테라로사, 소정방폭포와 소라의 성, 삼매봉, 서건도, 베릿내오름, 송악산, 가시악>을 찾아갑니다.
제주 출신 화가 강요배 선생은 “오름에 올라가본 일이 없는 사람은 제주 풍광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고, 오름을 모르는 사람은 제주인의 삶을 알지 못한다”면서 제주 오름의 소중함을 얘기했습니다. 이는 제주도가 오름과 오름이 세포처럼 유기적으로 이어진 곳이어서 제주를 알려면 반드시 오름을 알고 올라보아야 한다는 말일 겁니다. 들판 한가운데, 바닷가에, 작은 마을 뒤편에 순하디 순한 모양으로 솟아 제주의 자연풍광을 이룬 오름.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유명 관광지에서는 만날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제주의 모습이 그곳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제주도 오름을 순례하는 <오름학교>는 격월로, 제주 자연풍광의 결정체이며 마을 형성의 모태인 오름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그 아름다움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짚고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름’은 ‘산’의 제주도 방언으로, 한라산 산록으로부터 해안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있는 작은 화산체들을 이릅니다.
2022년 8월 강의를 준비하는 교장선생님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제20강 1일차 / 8월 19일(금요일) / 매오름(도청오름), 제지기오름, 테라로사, 소정방폭포와 소라의 성, 삼매봉
마음도 걸음도 취하는 숲길
-매오름(도청오름)
표선의 남서쪽 들판에 우뚝 솟은 매오름은 바위가 돌출된 꼭대기가 매의 부리처럼 생겨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북동쪽 들판에서 보면 이 점이 도드라지죠. 남쪽에서 북쪽으로 발달한 길쭉한 능선이 끝에서 북서쪽으로 휘어 감기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중간쯤에서 동쪽 안부로 이어진 도청오름이 혹처럼 붙었는데, 덩치가 작지 않고 둥근 분화구 바닥을 드러낸 채 남서쪽으로 트인 말굽형 굼부리도 가졌지만 매오름의 알오름으로 분류됩니다. 알오름의 ‘도청’이라는 이름은 최근에 붙은 것으로, 정상에 도청에서 만든 부대(레이더기지)가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남쪽 들머리에 안내판
전체적으로 울창한 숲에 덮였으며, 삼나무가 주종을 이룬 가운데, 보리수를 비롯한 다양한 활엽수가 눈에 띕니다. 정상 북동쪽 사면은 대나무가 넓은 면적을 차지했고요. 대숲은 제주 오름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어서 눈길을 끌죠. 이처럼 다양한 숲이 섞여 탐방 환경이 좋습니다. 게다가 표선 중심지가 가깝고, 제법 큰 덩치의 오름인 까닭에 여러 탐방로가 조성되었습니다. 곳곳에 안내도가 설치되었고, 들‧날머리도 여러 군데입니다.
남쪽 들머리의 안내판에 큰 글씨로 ‘매봉 산책로’라고 적혀 있습니다. 초록으로 덮인 숲은 근사하고, 길도 넓고 쾌적해서 걷노라면 마음과 걸음이 그 푸른 풍광에 취할 지경이죠. 쪽창 같이 열린 틈새로 비춰든 햇살이 눈부시고,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은 한없이 여유로운 얼굴빛입니다. 바닥엔 야자매트가 깔려서 걸음도 편하죠.
얼마 후 숲이 훤해지며 운동시설이 나타납니다. 벤치도 놓여 쉴 수도 있는 공간. 직진하면 정상으로 향하고, 오른쪽 삼나무 숲 사이로도 길이 보입니다. 호젓한 숲을 지나 낙원정사와 연결되는 코스입니다.
한라산, 바다, 들판 모두 조망되는 정상
길은 곧 콘크리트 포장도를 만납니다. 도청오름의 레이더기지와 안부의 표선공동묘지 때문에 생긴 포장도입니다. 포장도 따라 140m쯤 간 곳에서 오른쪽으로 도청오름 진입로가 갈리고, 매오름은 왼쪽의 너른 터를 지나 숲속 오솔길을 따릅니다.
매의 목덜미쯤에 해당하는 이 구간은 운치가 참 좋습니다. 온갖 넝쿨이 뒤섞인 주변 숲이 높지 않아 시야가 트이거든요. 곧 칼날능선을 이룬 정상부에 닿으며 사방으로 조망이 열립니다. 북서쪽으로 토산망과 가세오름이 한라산을 배경 삼고 부드럽게 이어지고, 동북쪽으로 표선 중심지와 달산봉도 잘 보입니다. 남쪽으로 은비늘처럼 반짝이는 서귀포 바다가 매오름에서의 조망을 더 멋지게 합니다. 하산은 올랐던 길을 되짚거나 북쪽으로 내려서서 오른쪽 대숲을 따라 돌아오는 코스도 좋습니다.
솔숲으로 온 몸 휘감은 절오름
-제지기오름
제주올레 6코스(쇠소깎-제주올레 여행자센터 올레)가 지나는 제지기오름은 서귀포시 보목포구 옆에 우두커니 서있습니다. 옛날에 이 오름 남쪽의 중턱 굴에 절이 있어서 ‘절지기오름’이라 부르던 것이 제지기오름이 되었죠. 해발고도가 94.8m로 높지 않으나 파도가 철썩이는 바닷가에 바투 서 있어 꽤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앞바다 조망 빼어나
솔숲으로 온 몸을 두른 오름의 북쪽 사면은 완만한 등성이를 따라 여러 갈래의 골이 패였고, 남쪽 사면은 가파른 벼랑을 이뤘습니다. 지금은 길이 막혔지만 남쪽 벼랑 가운데에 바위굴과 절터가 있었고, 70년대까지만 해도 굴에 사람이 살았다고 하죠. 절터 아래, 바다에 접한 곳에 길게 돌담을 쌓은 건물 한 채가 눈길을 끕니다. 한때 대한민국 안방을 들었다놨다하면서 웃음바다로 만들던 코미디언 고 이주일(1940~2002)씨가 지은 별장입니다. 그가 떠난 뒤 몇 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한 카페가 오래 영업을 했는데, 지금은 카페 간판도 사라지고 잠잠합니다.
작은 오름이어서 탐방로는 단순하죠. 올레 코스를 따라 남서쪽이나 북동쪽 들머리를 통해 오르내립니다. 어디라도 탐방로는 계단길이고요. 지그재그 계단이 정상부까지 이어지지만 숲이 좋아서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운동시설과 평상이 놓인 정상은 꽤 넓고 소나무가 사방을 두르고 있어서 그늘도 좋습니다. 남쪽 양 끄트머리에 전망대가 하나씩 조성되었고, 어디라도 조망이 멋지죠. 서남쪽 전망대에 서면 1km 남짓 떨어진 섶섬과 보목포구가 훤합니다. 그리 크지 않은 보목포구지만 항구의 활기는 그 어디보다 넘쳐납니다.
귤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커피전문점, 테라로사 서귀포
강릉엔 솔향만큼 진한 향기가 있습니다. 커피입니다. 강릉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커피 고장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박물관이 강릉에 있고, ‘커피 1세대’로 불리는 커피 명인 박이추 선생이 운영하는 커피공장과 횟집보다 카페가 더 많다는 안목 커피거리도 유명하고요. 2009년에 시작된 ‘강릉커피축제’는 해마다 더 많은 여행자의 목적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커피로 유명한 강릉의 커피 명소 중에서도 손꼽히는 곳이 강릉시 구정면의 한적한 시골에 자리한 ‘테라로사’입니다. 제주 오름여행 중에 ‘웬 강릉 타령?’ 하실 테죠!
2002년, 커피를 볶아 카페와 호텔, 레스토랑 등에 공급하는 커피공장으로 출발한 ‘테라로사 강릉’은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이 늘면서 카페 역할도 겸하게 된 곳인데요, 2017년 7월, 옛 건물 옆 울창한 밤나무 숲 속에 빨간 벽돌로 신축한 카페가 문을 열었습니다. 일부러 구경하러 오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건축적으로도 아름다운 곳입니다. 외딴 곳에 있지만 주말이면 줄을 서서 입장해야 할 정도로 커피 마니아들 사이엔 성지로 통합니다. 품질에 대한 열정과 집념으로 내어놓는 최상급 스페셜티 커피는 테라로사만의 공간과 함께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았을 정도입니다.
테라로사는 강릉 구정면의 본사 커피공장 외에 강릉과 서울, 경기, 세종, 부산, 제주에 열여덟 곳의 직영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장소와 넓이가 모두 다르지만 저마다 테라로사만의 독특한 감성을 간직한 채 차원이 다른 카페 인테리어를 보여줍니다. 잘 만든 유럽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도서관 느낌이죠. 저는 세종점을 제외한 테라로사의 전국 모든 지점을 일부러 찾아가 보았는데요, 하나같이 최고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서귀포점을 가장 사랑합니다. 일단 좋아하는 제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귤밭 가운데 자리를 잡았거든요. 테라로사만의 차별성과 제주스러움이 멋진 조화를 이룬 공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커피를 좋아했을까
귤밭을 끼고 자리한 테라로사 서귀포점은 다른 지점과 마찬가지로 천장이 높고 공간이 넓습니다. 전체적으로 엔틱하면서도 세련된 공간이라서 커피는 더 따듯하고 향기롭습니다. 뭐라 말이 없이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 그렇게 비처럼, 음악처럼 흐르는 곳이죠.
몇 해 전 통계입니다만 전국에서 커피를 전문으로 파는 가게 숫자가 무려 9만이고, 커피를 파는 빵집이나 디저트 가게 등을 감안하면 그 수는 10만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그 전 해엔 우리나라의 커피 소비량이 250억 잔을 넘겼는데, 이는 국민 1인당 연간 500잔의 커피를 마신 어마어마한 수치입니다. 국민 대다수가 커피와 진한 연애중인 것이죠.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커피를 좋아하게 됐을까요? 우유팩에 찰 정도의 양인 한 잔의 커피. 그것을 각성의 효과를 가진 음료라고 말하는 건 너무나 얕은 평가입니다. 누구는 커피의 가장 큰 매력을 삶의 여유라고 말했고, 또 누구는 지친 삶의 위로라고도 했습니다. 또 끝없이 짝사랑할 수 있는 신의 선물이라고도 했죠. 커피는 충분히 그렇습니다. 저의 경우, 여행의 깊이를 더해주고 동행한 이와의 추억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는 게 커피였습니다.
좋은 이들과 떠난 여행길에서의 커피 한 잔은 도무지 양보할 수 없는 사치여서 수년 전부터 저는 등산을 가거나 백패킹, 트레킹을 떠날 때 늘 휴대용 커피드립세트를 챙깁니다. 커피만큼 여행과 잘 어울리는 게 없는 것 같아서죠. 골안개 가득 차오르던 지리산에서, 아득하게 번져가던 꽃지해변의 붉은 노을을 마주하며, 어느 여름날 가거도 섬등반도의 밤하늘이 다 담아내지 못해 쏟아 붓던 은하수에 취했을 때도 저는 커피가 ‘땡겼습니다’. 이번 오름 여행은 중간에 커피 한 잔 마시고 또 이어가겠습니다.
절벽 위의 작은 궁전, 소라의 성
-소정방폭포와 소라의 성
서귀포 70리 바닷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곳이 올레 6코스입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면서 빚어낸 절경 쇠소깍에서 보목리 포구를 지나 서귀포시 해안을 따라 외돌개까지 걷는 올레입니다. 초반에 오름이 하나 있고, 무성한 숲길도 지나지만 길이 험하지 않습니다.
소가 누워 있는 형태라서 쇠둔이라 불렀던 쇠소깍 깊은 물에는 손으로 줄을 당겨 이동하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배 ‘테우’가 떠다닙니다. 해안가에는 소금이 귀하던 시절, 가마솥에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얻던 소금막이 있고, 소금막을 지나 만나는 제지기오름은 서귀포 앞바다에 뜬 섶섬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망대입니다. 제지기오름 아래는 자리돔 주산지로 유명한 보목포구입니다. 맞은편 갯바위에는 고래라도 잡을 요량인지 한껏 휘어진 낚싯대와 씨름하는 꾼들의 모습이 검고 푸른 바다와 멋진 조화를 이룹니다.
가까운 바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비소리, 무자맥질에 바쁜 제주 해녀들의 것이죠. 동그란 테왁이 달린 망시리를 짊어 메고 걸어 나오는 검은 물옷을 입은 해녀들. 철 따라 다르지만 문어 몇 마리와 성게, 미역, 톳, 소라 같은 게 대부분입니다.
제주올레 6코스 중에서도 가장 눈부신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소라의 성’입니다. 섶섬과 문섬 사이 서귀포 바다가 펼쳐지는 절벽 위에 서 있는 소라의 성은 이름처럼 커다란 소라가 연상되는 외관을 하고 있습니다. 안내판에는 ‘건축가 미상이지만 김중업의 작품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적혔습니다. 대한민국의 1세대 건축가인 김중업(1922~1988)은 일본에서 건축을 배웠고,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소라의 성’은 선생의 작품인 제주대학교 구 분관과 비슷한 건축적 특성을 보여줍니다.
1969년에 완공된 소라의 성은 개인 소유로, 한때 (사)제주올레 사무국이 입주해 사용하다가 서귀포시에서 매입해 지금은 북카페와 여행자를 위한 쉼터, 전시 기능을 갖춘 복합 문화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소라의 성 바로 옆이 소정방폭포입니다. 정방폭포와 마찬가지로 뭍에서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폭포로, 규모는 작지만 예쁘고 멋지죠. 계단을 타고 소정방폭포 아래로 내려설 수 있는데, 여기서 소라의 성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소라의 성이 있는 절벽 아래가 커다란 동굴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린 해식동굴 위에 소라의 성이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한때 위험한 건축물로 분류되기도 했습니다.
남극 상공의 노인성 조망하는 곳
-삼매봉
도심의 시민공원이 된 오름으로 제주시에 사라봉이 있다면 서귀포엔 삼매봉이 대표적입니다. 오름의 남쪽엔 화산암의 차별침식 과정을 거쳐 형성된 외돌개가 아름답고, 북쪽으로는 드넓은 하논분화구와의 사이에 미술관과 도서관이 들어섰습니다.
매화처럼 아름다운 봉우리가 세 개 연달아 있어서 ‘삼매봉(三梅峰)’ 또는 ‘삼미봉(三美峰)’이라 부른다는데, 숲이 우거진 지금 그 봉우리를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상 동쪽엔 방송국 중계소 철탑이 우뚝하고, 정상에는 사라봉의 망양정과 흡사하게 생긴 ‘남성정(南星亭)’이라는 팔각 정자가 멋진 처마를 펼치고 섰습니다. 이는 예로부터 삼매봉 정상이 수평선 멀리 남극 부근 하늘에 뜨는 붉은 별인 노인성을 보던 조망대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엔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되었다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삼매봉을 북쪽 하논오름의 정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인상적인 솔숲 계단길
남동쪽 자락에서 출발해 정상부를 한 바퀴 도는 도로가 나 있어서 차로 오를 수도 있습니다. 이 도로를 따라 매일 조깅 겸 오르내리는 이도 많죠. 보통은 정상 남쪽의 외돌개주차장을 이용합니다. 주차장 동쪽 끝에서 탐방로가 시작됩니다. 크고 굵은 해송이 길 안내를 하는 이 길은 정상부 순환도로를 만나기까지 계단이 이어집니다. 순환도로에서 정상은 금방입니다. 멋지게 자란 소나무 사이로 운동시설이 들어선 정상의 남성정에 오르면 한라산과 서귀포 칠십리 앞바다가 시원스레 조망됩니다. 제주올레 7코스가 삼매봉을 지납니다.
제20강 2일차 / 8월 20일(토요일) / 서건도, 베릿내오름, 송악산, 가시악
제주에서 만나는 모세의 기적
-서건도
제주올레 7코스가 지나는 해안을 마주한 곳에 작은 섬 서건도가 있습니다. 하도 작고 구석에 붙어서 있는지도 모르는 섬이죠. 면적은 1만3367제곱미터이며, 마주한 해안과는 300m 떨어져 있습니다. 하루 두 번 썰물 때면 바닷물이 빠지며 섬과 이어진 얕은 돌길이 드러납니다. ‘조이통물’에서 기원한 수량이 풍부한 개울물이 서건도 앞바다로 흘러듭니다. 서건도의 바다 갈라짐 현상은 보름이나 그믐 때 특히 규모가 큽니다. 사리기간엔 가장 두드러집니다.
수중화산이 분출해 형성된 섬으로, 이곳에서 B.C. 1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파편과 동물뼈, 주거흔적 등 고대 유물이 발견되어 관심이 집중되기도 한 곳입니다. 물이 빠지면 폭 10m쯤의 현무암 자갈지대가 드러나서 걸어서 섬까지 오갈 수 있습니다. 이때 보말이나 성게 같은 것을 잡기도 하죠.
서건도 안에는 목재데크가 깔린 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서 섬을 한 바퀴 둘러보기 좋습니다. 길이 예쁘고, 사진 찍기 좋은 포토스폿도 여러 곳입니다. 섬이 작아서 둘러보는데 40~50분이면 넉넉합니다.
중문의 No.1 산책로
-베릿내오름
‘베릿내’는 중문천이 끝나는 천제연(天帝淵) 하류에 있던 작은 바닷가 마을 성천포(星川浦)를 말합니다. 옛사람들은 중문천을 ‘별이 흐르는 내’라며 성천(星川)이라 불렀다고 하죠. 개발로 인해 별이 흐르던 옛 마을은 사라졌어도 이름은 바로 옆의 오름에 남았습니다. 베릿내오름을 한자로 ‘성천봉(星川峰)’ ‘성천악(星川岳)’으로 표기하는 것입니다.
‘베릿내’라는 이름을 두고 몇 가지 해석이 전해옵니다. 별의 제주방언인 ‘벨’이 변해 ‘베리’가 되었다는 것과 강과 바닷가의 깎아지른 절벽을 가리키는 벼루의 제주 방언이 ‘베리’인데, 성천포 주변에 절벽이 있어서 베릿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후자가 정설로 통합니다. 중문천에 접한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동남쪽은 야트막한 말굽형 화구를 품고 완만합니다. 이 화구를 중심으로 동오름과 섯오름, 만지섬오름으로 불리는, 밋밋한 세 봉우리가 이어집니다.
걷는 내내 즐겁고 신나는 길
들머리는 크게 세 곳입니다. 광명사 입구에서 양쪽으로, 남쪽 천제2교 방면에서도 오를 수 있습니다. 덩치가 작다 보니 길이 복잡하거나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풍광은 충분히 멋지죠. 제주올레 8코스와 그대로 겹치는 베릿내오름 탐방로는 중문관광단지 내에 있기에 관리상태가 좋고, 평탄하고 완만해 남녀노소 모두 걷기 편합니다. 동오름 정상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구간이 울창한 숲에 덮인 것도 장점입니다.
보통 광명사주차장을 기점으로 삼습니다. 주차장 앞 동쪽의 외딴집이 보이는 고갯마루가 오름 들머리입니다. 유독성 식물인 ‘협죽도’가 늘어선 사이로 들어서면 ‘원주 원씨 홍천공 묘역’ 표석 옆으로 나무데크가 나타납니다. 이후 길은 데크를 따릅니다. 굵은 둥치의 소나무 사이로 이리저리 굽어 도는 길, “아, 좋다!”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오는 코스입니다. 숲이 쾌적하고, 멀리까지 훤히 가늠되어 시선도 편하죠. 오른쪽으로 숲이 트이는 곳, 군산과 월라봉, 박수기정, 산방산이 겹쳐진 환상적인 제주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분화구를 휘감고 돌며 잠시 낮아지는가 싶더니 넓은 전망대를 갖춘 동오름 정상에 닿습니다. 가운데를 차지한 해송 두 그루가 멋진 곳입니다. 그 너머 멀리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한라산이 반갑고요. 서쪽으론 송악산과 가파도, 마라도까지 가늠됩니다. 탁 트인 제주 풍광으로 인해 마냥 앉아 머물고 싶은 동오름입니다.
이후 만나는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서면 천제2교 방향 날머리가 가깝습니다. 하지만 오른쪽으로 꺾어 광명사로 돌아오는 길이 워낙 멋집니다. 베릿내오름이 품은 아름다움이 이 길을 따라 넘쳐나기 때문이죠. 일제강점기 전, 논농사를 위해 천제연의 물을 끌어오기 위해 바위를 깎고 뚫어 만든 관개수로도 지납니다. 제주의 척박한 자연환경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운 조상들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새로 열린 굼부리 탐방로
-송악산
소나무가 많아서 이름 붙은 송악산(松岳山)은 지금은 잊혀진 ‘절울이’라는 예쁜 우리말 이름을 가졌습니다. 거친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우레 같아서죠. 99개의 봉우리로 이뤄졌다고 해서 ‘99봉’으로도 불립니다. 모슬포 앞바다를 향해 망루마냥 툭 튀어나온 송악산은 바다에 접한 면이 전부 깎아지른 절벽을 이룬 채 쉴 새 없이 부딪쳐오는 파도를 맞닥뜨리고 섰습니다.
트레킹코스로 만나는 송악산
송악산은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입니다. 송악산을 찾은 이들 대부분은 말 타는 곳을 지나 전망대가 있는 곳까지 느릿느릿 걸어갔다가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런 관광 모드가 아닌 오름 트레킹코스로 둘러봐야 송악산의 진짜 매력을 만날 수 있죠. 송악산 표석을 지나 둘레길에 접어들면서 왼쪽으로 펼쳐지는 바다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감동입니다. 송악산과 산방산, 월라봉, 군산에 폭 안긴 바다 한가운데의 형제섬이 신비롭고, 산방산 너머 멀리 한라산이 있는 듯 없는 듯 배경을 이룬 이곳에서의 조망은 광치기해변에서 보는 성산일출봉만큼이나 제주를 대표하는 명풍광으로 꼽힙니다.
그러나 이번 오름트레킹에서는 송악산을 한 바퀴 돌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출입이 통제되다가 6년 만인 지난해에 송악산 정상부 탐방로가 개방되었는데, 그 코스를 다녀오려고 합니다. 정상 굼부리만 올랐다가 오겠습니다. 제주 오름의 여러 굼부리 중에서도 송악산은 장관입니다. 커다랗게 입을 벌린 깊이 80m의 화구가 위압감을 느끼게도 하죠. 그리 길지 않은 정상 탐방로지만 오르내리는 동안 펼쳐지는 주변 풍광은 압권입니다. 굼부리 능선에서 조망하는 산방산과 서귀포 앞바다 풍광이 그야말로 그림 같습니다. 또 언제 출입이 막힐지도 몰라서 이참에 후딱 다녀오려 합니다.
신의 팔레트, 난드르 들판
-가시오름
주변에 이렇다 할 산이 없어서 더욱 도드라지는 가시오름은 옛날에 가시나무가 많아서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원추형처럼 보이지만 남서록에 귤밭이 들어선 얕은 말굽형 굼부리를 품었습니다. 넓은 평지인 정상부도 둥글넓적한 모양의 굼부리가 아닐까 싶은데, 김종철 선생의 책이나 제주도에서 발간한 오름 책자에 별다른 언급이 없더군요. 정상부 초지 한쪽엔 아주 작지만 오목한 습지도 보입니다.
도로에서 바로 시작되는 탐방로
오름 주변이 온통 평야입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이 들판의 이름은 ‘난드르’.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들판을 일컫는 ‘난들’의 제주어입니다. 난드르엔 맑은 물이 샘솟는 샘이 많아서 까마득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합니다. 오름 남서쪽의 밭 한가운데에 그 흔적인 고인돌(일과리지석묘)이 보입니다.
땅이 좋지 않다고 여겼을까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오름에 산담이 거의 없습니다. 주변이 평야지대이고, 산이라고는 가시오름 하나인데, 오름 전체에 겨우 예닐곱 개의 산담이 확인될 뿐. 대신 동남쪽 들판의 밭뙈기마다 산담이 들어섰고, 직선거리로 1.7km 떨어진 모슬봉은 아예 오름 자체가 공동묘지 같습니다.
오름의 동북쪽을 스쳐 지나는 1120번 지방도(대한로)에서 바로 탐방로가 시작됩니다. 북동쪽 사면을 가로질러 곧장 정상까지 가는 이 길은 나무계단과 초지가 번갈아 나타나죠. 주변은 물론, 탐방로에도 풀이 많습니다. 관리기관에서 풀베기를 하지만 때를 잘못 맞추면 수풀을 헤치느라 고생인 코스입니다.
한갓진 수렛길로 하산
정상은 꽤 넓은 초지대로, 띠가 무성합니다. 사료용으로 부러 가꾸는 듯 늦가을에 올랐을 때는 반쯤은 베어갔더군요. 북쪽엔 산불감시초소가, 남쪽엔 사각정자가 서 있고, 정자 앞으로는 벤치와 운동시설도 보입니다. 난드르에서 홀로 우뚝하다보니 바람이 시원하고, 사방으로 조망도 빼어납니다. 동남쪽으로 한라산을 닮은 모슬봉이 대지에 덮어둔 보자기처럼 부드럽게 솟았고, 그 뒤로 바굼지오름과 산방산, 군산이 해안선을 따라 멋진 자태를 뽐냅니다. 가시오름에서는 무엇보다 난드르 들판이 풍광의 주인공입니다. 초록빛깔이 이리도 다채로웠나 싶을 정도로 밭뙈기마다 조금씩 톤이 다른 초록 작물로 채워졌습니다. 화가의 팔레트가 이처럼 예쁠까 싶더군요. 보고 또 봐도 기분 좋은 조망입니다.
내려설 때는 산불감시초소 앞에서 시작되는 비포장 수렛길을 따르는 편이 좋습니다. 이 길은 서·남·동쪽 사면을 거치며 오름 중턱을 한 바퀴 돈 후 북동쪽에서 탐방로를 만나 출발지로 갑니다. 완만하게 굽어 돌기에 힘들지 않고, 길섶으로 억새와 수크령, 볼레낭 등이 나타나 눈도 즐겁습니다. 중간에 벤치가 나오고, 그늘도 적당하고요.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오름학교 기사(8월)를 확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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