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한가운데 사막 같은 모래 섬이 있습니다. 밀물 때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가 썰물이면 홀연히 나타나는 바다의 신기루. 인천시 옹진군 대이작도 앞바다에 있는 ‘풀등’입니다. 썰물 때만 몸을 드러내는 모래 평원인 풀등은 동서 2.5km, 남북 1km나 되는데 이 나라에서는 진귀한 사막 같은 풍경입니다.
7월 2일(토)과 3일(일)의 1박2일,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연구소장)는 제96강으로, 풀등이 있는 섬 대이작도를 탐사하러 갑니다. 대이작도는 옛날에 해적들이 살았었다 합니다. 그래서 이적도(伊賊島)란 이름을 얻었다가 이작도(伊作島)가 됐다지요. 이번 답사길에는 인천 앞바다 섬들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부아산 트레킹도 하고 영화 <섬마을 선생님> 촬영지였던 계남분교까지 이어지는 해변 길도 걷습니다. 또 고운 모래해변인 큰풀안, 작은풀안 해변에서 한더위를 날려 보낼 물놀이도 하고 모래밭에서 바지락잡기 체험도 하며 평화로운 휴식의 시간을 보내다 올 예정입니다. 풀등은 뱃길이 끊겨 멀리서 조망합니다(물때에 따라서 달라짐). 이번에는 인천 연안부두로 각자 집결해 함께 떠납니다. 신비로 가득한 섬 이작도 기행에 함께 하실 분을 초대합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섬학교 제96강, 7월 답사지인 <신비의 섬 ‘해적섬’ 이작도와 ‘바다의 사막’ 풀등>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왜구의 거점이었던 섬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 이작도. 이작도(伊作島)의 옛 이름은 이적도(伊賊島)였다 합니다. 서남해의 여러 섬처럼 고려 말에는 이작도가 왜구의 거점이었던 까닭입니다. <고려사> ‘변광수전(邊光秀傳)’에 “고려 말 왜구들이 이 섬을 점거하고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을 약탈하던 근거지라 하여 이적(夷賊) 또는 이적(二賊)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고려사>에는 공민왕 13년(1364년)에 현물세를 운반하던 배가 이 섬 근처에서 왜구에 의해 자주 습격을 받자 무장 전선 80여척을 동원해 수송케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 조선시대에도 소규모 해적집단이 이작도를 은신처로 삼았다 합니다.
이작도는 북서 방향으로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두 섬이 마주보고 있는데, 소이작도 휘청골에는 임진왜란 이후 살았던 해적들의 집터와 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소이작도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휘청골로 갑니다. 휘청골 해변은 작고 옹색합니다. 큰 무리의 해적이 숨어 살기는 좁아 보입니다. 더 큰 무리의 해적들은 대이작도에 숨어 살았던 것은 아닐까요. 숲속에는 돌무더기들만 더러 남아 있습니다. 숲에는 또 무덤 몇 기가 있지만 관리 상태로 보아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해적의 무덤은 아닐 것입니다. 해적의 무덤이 남아있다 한들 비석에 해적의 묘라고 새겨지지 않은 바에야 어찌 찾을 길이 있겠습니까.
과거 동북아에서 가장 위협적인 해적은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였지만 왜구가 아니라도 섬에 숨어 살던 소규모의 해적집단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 해적을 ‘포작’이라 했습니다. 이들은 원래 양민들이었으나 관청의 수탈을 피해 섬에 숨어 살며 불법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가끔씩 왜구들과 결탁을 해 노략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라가 키운 도적이었던 셈이지요.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해상 지리에 밝은 포작들을 왜군과의 전투에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임란 이후에는 일부 포작들이 양민으로 환원됐지만 대부분은 해적으로 남았다 합니다.
해양왕국의 역사는 해적의 역사
해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깁니다. 하지만 인류의 해양사에서 해적과 비해적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강한 군사 집단이 이웃 나라를 침략하여 노략질을 하고 땅을 빼앗고 백성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해적질과 무엇이 다를까요. 역사가들은 이를 정복이란 이름으로 미화시키지만 해양왕국의 역사란 바로 해적의 역사에 다름 아닙니다. 먼저 세력을 키워 나라를 세운 해적 두목은 왕이 되고 뒤에 나타난 세력은 해적으로 이름이 남겨졌을 뿐이겠지요.
중세유럽의 가장 악명 높은 해적은 바이킹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잉글랜드 섬과 러시아를 침략해 노르만왕조와 키에프공국을 세웠습니다. 16세기 대항해 시대,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 여왕 치하의 악명 높은 해적이자 노예 상인이었던 호킨스나 드레이크 등은 국가의 공인을 받은 해적이었습니다. 해군제독이 된 해적 두목 드레이크는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영 제국의 세계 지배에 일등 공신이 되기도 했지요.
삼국시대 이후 고려, 조선시대까지 한반도에 가장 큰 위협은 일본의 해적 집단인 왜구였습니다. 왜구는 단순한 도적이 아닙니다. 지방 호족인 사무라이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통솔된 수군 집단이었습니다. 왜구들은 중국 해안을 비롯해 한반도 연안의 각 고을을 노략질하고 강간과 납치, 방화와 살인을 일삼으며 조정의 세곡선까지 약탈해 갔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포도청 종사관과 포졸을 사칭하고 해적질을 한 자들이 있었지만 그 세력은 중국이나 일본 해적들에 비해 미미했습니다. 중국에서는 “관리가 되려면 먼저 도적의 수령이 되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였다 합니다. 그 격언은 여전히 이 시대 이 땅에서까지 통용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정치를 하려거든 먼저 돈을 벌어라.” 티켓다방으로, 건설, 토목업으로 재물을 모은 폭력배들이 일부 지방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이 나라 현실입니다. 얼마 전, 해남군수는 자신이 한때 조폭 조직원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떠들기도 했습니다. 이 땅의 정치꾼들이 나라를 거덜내는 도적질을 일삼는 것은 그들의 뿌리가 도적의 뿌리와 같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손가락바위와 손가락법문
여객선을 타고 가다보면 소이작도 콩돌해변 끝에 서 있는 ‘손가락바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먹을 쥐고 검지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든 모습이 마치 거인의 손가락과도 같습니다. 거인은 무슨 까닭으로 내내 손가락 하나만을 들고 있는 것일까요?
구지선사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입니다. 선사는 누구든 불법에 대해 물으면 한결같이 손가락 하나만을 세워 보일 뿐 일체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사를 시봉하는 동자승은 그 모습을 늘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하루는 구지선사가 출타 중인데 어떤 스님이 법을 물으러 왔습니다. 객승은 동자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사께서는 법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습니다. 객승은 아무 말 없이 돌아갔습니다. 구지선사가 돌아오자 동자승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구지선사가 물었습니다.
“그 스님에게 했듯이 나에게도 대답해 보거라. 불법이 무엇이냐?”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습니다. 순간 구지선사는 칼을 꺼내 동자승의 손가락을 싹둑 잘라버립니다. 동자승은 비명을 지르며 문 밖으로 뛰쳐나갔지요. 선사가 동자승을 불러 세우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 불법이 무엇이냐?”
동자승은 순간적으로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습니다. 아차! 손가락은 이미 잘리고 없지 않은가? 그 순간 동자승은 퍼뜩 깨쳤습니다. <벽암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동자승은 대체 무엇을 깨쳤던 것일까요. '무아(無我)'를 깨쳤던 것일까요. 나를 내려놓을 때, 나의 주장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나는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요.
<섬마을 선생님>의 무대
대이작도는 이름처럼 큰 섬이 아닙니다. 큰 ‘대’자가 붙은 것은 소이작도에 비해 크다는 뜻일 뿐, 섬은 면적 2.57㎢, 해안선 둘레 18km의 작은 섬입니다. 대이작도의 선착장에는 ‘영화의 섬’이라는 빛바랜 글귀가 눈에 띕니다. 대이작도는 이미자의 노래 <섬마을 선생님>을 영화화한 <섬마을 선생님>(1967년 김기덕 감독 작품)의 배경이 됐던 섬입니다. 나그네는 선착장을 지나 큰말 부근에서 대이작도 부아산에 오릅니다. 해발 159m의 부아산. 산정에는 구름다리도 놓여 있습니다. 정상에 오르니 대이작도 주변의 섬들이 발아랜 듯 가깝습니다. 동쪽은 옹진군의 승봉도, 서북쪽은 자월도, 소야도, 덕적도, 서쪽은 문갑도, 굴업도, 각흘도, 남서쪽은 선갑도, 백아도, 울도. 동남쪽으로는 풍도, 육도, 대란지도 등 서해의 섬들이 지척입니다.
이제는 섬마을의 많은 학교들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됐던 대이작도의 계남분교도 폐교된 지 오래입니다. 더 이상 순정을 다 바쳐서 총각선생님을 사랑할 섬 처녀는 없습니다. 처녀들, 총각들, 모든 젊은 사람들이 떠나가 버린 섬마을은 적막합니다. 섬도 늙었고 사람도 늙었습니다. 순정을 빼앗고 훌쩍 떠나버렸던 총각선생님은 이미 은퇴를 했거나 아니면 교장선생님이 되어 늙어가고 있겠지요. 그때 그 순정한 처녀는 어디로 갔을까요. 뭍으로 나가 식모살이를 하거나 공장으로 갔겠지요. 더러는 술집으로도 갔겠지요. 그녀도 이제는 늙었거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섬에는 더 이상 청춘도 없고 비애도 없습니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부아산 정상, 정자에 앉아 <섬마을 선생님>을 흥얼거립니다. 구성진 가락에 애틋한 가사. 그 시절뿐일까요. 순정을 다 바친 이들에게 돌아오는 보답이란 기껏 비극적 결말뿐인 것이. 하지만 노래의 힘은 비애를 넘어 섭니다.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풀등, 바다 위의 사막
대이작도의 진짜 보물은 섬 바로 앞에 있습니다. 큰풀안 해변 건너 바다 속에 있습니다. 밀물 때는 몸을 숨겼다 썰물 때면 모습을 보이는 모래섬. 사승봉도에서 자월도 서남단까지 펼쳐진 모래밭을 이곳 사람들은 ‘풀등’이라 부릅니다. 낚싯배로 10분 남짓 가면 망망하던 바다 위로 장대한 모래섬이 솟아 있습니다. 동서 2.5km, 남북 1km의 모래 평원은 이 나라에서는 진귀한 사막의 풍경입니다. 이번엔 뱃길이 끊겨 아쉽지만 멀리서 감상합니다(물때에 따라서 달라짐).
예전에는 썰물 때면 풀등의 웅덩이에 갇힌 꽃게, 새우, 광어 등을 거저 주어 담을 수 있었다 합니다. 서해 바다에 물고기들이 넘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풀등 유역 바다의 광대한 모래밭은 옹진군이나 토건업자들이 탐낼 만큼 질이 좋습니다. 토건업자들에게는 건축 자재일 뿐인 모래가 바다생물들에게는 산란과 생존을 위한 생명의 터전입니다. 오랜 세월 이 바다 모래밭에서 나고 자란 갯것들이 섬사람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20여 년 간 인천 앞바다에서 사라진 모래는 무려 2억㎢에 달합니다. 풀등도 그로부터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50만 평에 달하던 거대한 풀등이 지금은 30여만 평만 남았습니다. 옹진군이 10년 넘게 풀등 인근의 모래 채취를 허가해준 탓입니다.
‘생태계 보전지역’ 지정, 그러나 계속되는 탐욕
토건공화국인 이 나라는 농어촌 섬지역까지도 땅을 파헤치고 모래를 채취하고 산을 뭉개는 기계음으로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국회의원과 지방자치 단체장과 지방의원, 지역 토건업자들은 이 나라 자연을 파괴하는 또다른 주역들입니다. 이들은 지역의 절대 권력자입니다. 지방분권이 과거에는 경제 권력만 쥐고 있던 토호들에게 정치권력까지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많은 토호들이 토건업자들입니다. 이들은 의원이나 단체장이 되면 ‘바지’ 사장을 세워두고 여전히 토건업체를 운영합니다. 세비를 받아가며 지역 주민이 아니라 자기 사업체를 위해 일하는 셈이지요.
인천시의 토호들도 인천 앞바다와 풀등의 모래 유실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정부는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압력에 자극 받아 뒤늦게 풀등의 경관과 생태적 가치를 깨닫고 2004년, 풀등을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 고시했습니다. 풀등은 생태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 희소성 때문에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도 큽니다. 하지만 정부는 애초에 주민들과 약속한 74㎢가 아니라 55㎢만을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했습니다. 모래 채취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자치단체와 지역 토호들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지요. ‘생태계 보전지역’에서 제외된 19㎢의 모래밭은 언제든지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바다의 모래 채취가 재개되면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풀등 또한 무사할 수 없습니다. 24시간 바다 속에 유압 호스를 넣어 모래를 빨아들이면 허가 지역뿐만 아니라 물길을 따라 인근의 풀등이나 해수욕장의 모래 또한 유출될 것은 자명합니다. 최근에도 옹진군은 모래 채취 허가를 내주려다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된 바 있습니다. 그나마 주민들이 풀등 가치를 깨달아 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풀등의 소중함을 알고 함께 지켜냈으면 좋겠습니다.
굴을 깨는 마지막 세대
부아산을 내려와 작은풀안 해변을 걷습니다. ‘조금’ 때라 물은 조금밖에 빠지지 않았으나 오늘도 할머니들은 굴을 깨러 나옵니다. 할머니 두 분이 조새가 담긴 대바구니를 매고 등에는 배낭을 지고,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모래밭을 걸어 해안가 바위로 갑니다. 바다가 굴을 살리고 굴은 사람을 살립니다. 이 할머니들이 떠나고 나면 누가 굴을 깨러 갈까요. 할머니들은 바다에서 굴을 깰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할머니 한 분은 굴밭으로 가기도 전에 힘에 겨워 주저앉고 맙니다. 대체 몇 십 년을 바닥에 엎드려 굴을 깬 것일까요. 더 이상 펴지지 않는 허리. 할머니의 굽은 등이 굴 깨는 조새처럼 휘어졌습니다. 또 한 분의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해변을 걸어갑니다. 할머니는 팔십은 족히 넘어 보입니다.
“할머니, 굴 깨러 가세요?”
“그래요.”
“많이 힘드시죠?”
“힘들지, 힘들어요.”
“그럼 좀, 쉬지 않으시구요.”
“쉴 수가 있나. 굴이라도 안 깨면 십 원 한 장 안 나오는데. 그걸로 쌀도 사고 그래야 먹고 살지.”
“그래 지난 겨울에는 굴 깨서 돈 좀 모으셨어요.”
“네 사리나 했어도 100만원도 못 했수.”
한 달에 두 사리가 있으니 네 사리면 두 달입니다. 물의 들고 남에 따라 굴을 깨는 시간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합니다. 한 달 내내 굴을 깨도 50만원 수입이 안 되는 것이지요. 노인들은 한철 굴을 깨서 번 수입으로 일 년을 삽니다. 자식들은 다들 뭍으로 나가 다시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제 가족 부양 하느라 노부모 건사할 여력이 없습니다. 이작도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섬이 그렇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섬학교 기사(7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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