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바람 맞으며,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2022년 3월 제83강으로, 하늘과 땅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지평선으로 펼쳐진 김제·만경평야의 <김제고을>로 향합니다. 이 벌판은 ‘징게맹게 외배미들’이라고도 부르는데, ‘징게맹게’는 전라도 사투리로 김제와 만경, ‘외배미들’은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모두 한 배미로 툭트인 땅을 의미합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허허로운 벌판에서 늘 빼앗기기만 했던 농민들의 한숨소리와 아우성소리를 스치는 바람결에 흘깃 들어보고, 모악산 아래에서 후천개벽의 세상을 펼치고자 했던 강증산의 자취와, 대동세상을 꿈꾸었던 정여립의 흔적과,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마음이 영글어 있는 미륵신앙성지인 금산사를 둘러본 후, 동진강과 만경강이 서해와 만나는 하구에서 진묵대사의 자취도 더듬어 보고 김제의 읍치구역 유적들도 둘러볼 예정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83강은 2022년 3월 2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압구정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서울을 출발합니다.
이날 답사코스는 서울-김제IC-금구면(남강정사/금구향교)-금산면(금산사/강증산유적지)-점심식사-김제시내(김제향교/동헌/내아)-부량면(벽골제)-만경읍(만경향교/조앙사)-진봉면(망해사)-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83강 답사지인 김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예로부터 벼농사의 중심지
전라북도 김제(金堤)의 지형은 동쪽의 산줄기, 남쪽과 북쪽의 물줄기 그리고 서쪽으로는 서해에 둘러 싸여 있는 특성을 지니며 남쪽의 동진강을 경계로 정읍·부안과, 북쪽의 만경강을 경계로 군산·익산과, 동쪽으로 모악산을 경계로 전주·완주와 이웃하고 서쪽으로는 진봉반도가 서해로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김제의 산줄기는 동쪽으로는 모악산을 중심으로 국사봉, 상두산 등 해발 500~700m의 산지가 북북동 및 남남동 방향으로 발달하였고 금구면과 금산면의 경계에는 구성산이 동서 방향으로 능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동북동 방향으로 봉화산·진봉산·국사봉·니성산으로 이어지면서 서해로 빠져들고 중앙의 평야지대에는 황산을 제외하면 대부분 해발 50m 이내의 낮은 구릉지들이 부분적으로 발달하였는데, 그래서 김제지역에서는 주변보다 고도가 높으면서 약간 비탈진 언덕에 해당하는 곳도 ‘산’이라고 부르는 곳이 많습니다.
김제의 물줄기는 중부 구릉지의 낮은 분수계를 중심으로 북부의 만경강 수계와 남부의 동진강 수계로 크게 나뉘며, 만경강은 북쪽의 시 경계를 따라 서해로 흘러들고, 동진강은 남서쪽의 경계를 따라 서해로 흘러들고, 원평천·신평천·두월천은 김제의 중앙을 관통하고 서해로 흘러듭니다.
평야는 크게 보아 하천이 실어온 토사가 쌓인 충적평야와 오랫동안 산지가 깎여 나가 평탄해진 침식평야로 나뉘는데, 김제·만경평야는 충적평야와 침식평야가 함께 발달한 곳으로, 만경강과 동진강이 만든 충적평야 이외에 곳곳에 해발 10-30m의 작은 구릉성 산지가 산재한 침식평야가 발달해 있습니다. 충적평야를 ‘뜰’이라 하고 침식평야를 ‘야산’이나 ‘고라실’이라고 부릅니다.
김제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로서 54개 부족국가 가운데 가장 방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벽비리국이었으며, 백제시대에는 벽골군이었는데 ‘벽비리국’이나 ‘벽골군’은 모두 ‘벼의 고을’ 또는 ‘볏 고을’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는 김제가 일찍부터 논농사의 중심지였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김제는 ‘황금의 별판‘이란 뜻
660년(의자왕 20)에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후 주류성(지금의 부안)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을 펴던 부흥군이 662년 12월에 본거지를 피성으로 옮겼다가 두 달 후인 663년 2월에 다시 주류성으로 되돌아갔는데 이 기간 약 60일은 김제가 백제 부흥군의 수도였던 셈입니다.
통일신라시대는 757년(경덕왕 16)에 ‘벽골’은 김제로 바뀌고 만경, 금구 등의 이름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하며 김제는 ‘금의 언덕’ 또는 ‘황금의 벌판’이란 뜻입니다. 이 시기에 특기할 것은 851년(문성왕 13)에 해상왕 장보고의 근거지인 청해진이 폐지되면서 그 주민들을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는데 백제 부흥군이 이곳으로 왔던 것과, 청해진 주민을 이곳으로 옮긴 사실은 김제 고을이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넓은 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940년(태조 23)에 김제지역이 부윤(富潤)과 거야(巨野)로 개칭되었으며 1143년(인종 21)에는 김제현과 금구현으로 나뉘었고, 예종 때 다시 만경현, 김제현, 금구현이 차례로 현령관으로서 독립 행정구역이 되고 전주목 관할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03년(태종 3)에 김제현이 다시 김제군으로 승격되었고 1620년(광해군 12)에는 만경현이 한때 김제군에 병합되기도 하였으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남하하는 왜적을 무찌른 금구대첩의 현장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김제지역에서는 왜구들의 ‘코베기’가 극성을 부렸던 곳입니다. 철종 때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란의 영향을 받아 금구지역에서도 수백 명의 농민들이 삼정의 문란과 지방 관리의 행패로 민란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농민봉기는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전쟁으로 이어졌고 김제지역에서는 김봉년, 김덕명 등 2천여 명이 백산에 진을 치고 관군에 대항하였습니다.
김제는 해안지역이기 때문에 백제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와 군현의 치소에 군사적 방어를 위하여 테뫼식 산성을 많이 쌓았는데, 특히 김제의 주성인 성산성과 크고 작은 전초호(前哨濠), 그리고 황산을 중심으로 한 난산성 및 월성 등은 서해안 일대의 해적들을 방어하여 내륙지방의 안전을 지킨 중요한 역할을 한 산성들입니다.
성산성은 김제의 주성으로 백제 때 축조한 것으로, 성곽은 원래는 토성과 석성의 이중성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담장의 원형은 상실되고 성터만 남아 있으며 성채는 옹성이 넷, 샘이 여섯이 있었다고 합니다. 산성에서 동쪽인 시내 쪽은 성곽이 보이지 않고 남쪽, 서쪽, 북쪽은 지금도 성곽의 형태가 남아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성산성이 피지산 또는 피성으로 기록되고 있어 이 피성이 백제 부흥군의 근거지였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며 또한 백제 풍장왕이 한때 주류성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던 곳이라는 견해도 있어 이곳 성산성은 백제 주류성의 위치를 파악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난산성은 난봉동에 있는 황산을 중심으로 백제가 쌓은 원형의 석성으로 그 둘레가 2㎞나 되었다고 합니다. 김제의 주성인 성산성을 보호하는 호익역이 월성과 난산성이었는데 월성은 거의 사라져 마을이 되었고 난산성도 터만 남아 있으며 달리 도리봉성 터로도 불립니다.
월성토성은 원평천과 금구천이 합류되는 동쪽의 월성평야 즉 옛 금구천 유역 가운데에 있는 구릉지대의 해발 약 20m 정도의 낮은 언덕에 위치하는데, 월성평야를 수호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방어 진지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월성토성 터에서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 토성은 원삼국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축조 경위는 밝혀진 것이 없으며 토성은 논으로 개간되면서 구릉을 모두 깎아버려 그 원형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창산성은 백제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용지면사무소 뒷산의 산 정상을 테뫼식으로 둘렀으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가 없으며 사창이 있었다고 사창산이라 합니다. 사창은 조선시대 지방의 각 촌락에 설치된 일종의 곡물 대여기관으로 의창과 같은 성격이나, 의창은 국영이고 사창은 사(社, 행정단위로 지금의 면)에서 경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고곡을 대출하고 무이자로 신곡을 받기도 하고, 곡물을 대여하여 이자만 받기도 하며, 춘궁기에 대출하여 가을에 이식과 함께 받기도 하였는데 지금도 사창산 등성이에서 썩은 쌀알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서해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군사적 요충지
만경읍성은 삼국시대의 읍성으로 북서쪽으로는 비옥한 농토가, 남쪽으로는 호수가, 동쪽으로는 멀리 모악산 기슭에서 잔잔히 뻗어 내려온 평원지대가 두산과 연결되어 있는 후록산에 자리 잡고 있는데, 후록산은 백제시대에 두내산, 두릉이라고도 불렀습니다. 1870년대 편찬된 <읍지>에는 “성첩은 삼리에 걸쳐 둘러 있고, 높이 5척, 옹성은 네 곳, 성문 세 곳이다”라고 했으며, 만경읍성의 성곽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것은 만경읍이 서해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만 일제강점기 초에 허물어져 이제는 그 원형조차 찾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성덕산 토성은 성덕산의 낮은 구릉 지역에 토성의 형태로 쌓아 올렸다고 알려져 있으며, 백제시대 무근촌현의 치소로 남쪽에 남포를 거느린 수로의 요충지였습니다. 서해안에 가까운 평야 지대의 지형적 특징으로 보아 군사적 방어를 위하여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토성 터 안에서 고려시대의 기와편들이 수습되었습니다.
동지산리 토성은 동지산리 척산마을 일대에 있는 소상산(26.8m) 정상을 테뫼식으로 두른 산성으로, 앞으로는 만경강이 흐르고 옆으로는 신창진을 거느리고 있어 동지산리 토성은 해안지역으로부터 침입해 오는 외적을 방어하는 진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폐허가 됐지만 소상산 정상에서 출토된 기와편과 자기편으로 미루어 그 축조시기가 원삼국시대로 추정됩니다.
금구산성은 봉두산의 정상을 둘러친 테뫼식 토성으로, 산의 동쪽 부분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한 석축이 100m 이상 남아 있으며 이 같은 석축의 흔적이 200m가량 추가로 확인되었습니다. 서, 북, 남쪽은 자연 경사면을 이용하였으며 이러한 자연 성벽을 포함하면 전체 길이가 900m에 이릅니다. 봉두산의 정상에는 기와 조각이 도처에 보일뿐만 아니라 제법 큰 초석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석재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묻혀 있으며, <금구읍지>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백제시대의 산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두산성은 상두산 정상에 포곡식으로 쌓은 산성으로, 삼국시대에 쌓았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후백제 왕, 견훤이 쌓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동서로의 교통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 안에는 중앙에 약 280m에 이르는 폭 10m 정도의 익성(翼城)이 있고 북동 모서리에도 북쪽으로 약 90m를 내뻗은 폭 20m 정도의 익성이 있으며 익성을 포함하여 석성의 형태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서쪽 능선에 있는 건물 터에는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고, 특이하게 높이가 575.3m나 되는 남방식 지석묘가 남아 있습니다.
상두산성은 전라북도 동서로의 교통 요지로서 내륙 지방에서 정읍 눌재를 거쳐 줄포만에 이르는 과거 해상교통로의 거점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모악산과 바로 연결되고 있어 호남 지방의 중간 지점으로서 군사적 요새지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명금산 토성은 명금산을 테뫼식으로 축조한 백제시대의 성으로 거의 평탄한 산상 둘레에 토루를 쌓아 내황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벽골제의 남단에 위치하여 벽골제를 수호하고 동진강 하구를 따라 내륙으로 들어오는 적을 차단하는 방어 진지였습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정읍과 김제의 양쪽 군 경계를 이룬 소 산맥 위에 있다. 둘레 200칸의 토축으로 거의 붕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지금은 수많은 묘지들이 정상부에 이르기까지 들어서 있어 성의 형태는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금산사성지는 삼국시대에 금산사를 보호하기 위하여 절 입구에 쌓은 석성으로 1920년대까지만 해도 아치형의 석조물인 성문 주변에 남북 방향으로 성벽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는데, 이 석성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예부터 금산사를 수호하는 성문이었으며 달리 ‘견훤 성문’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성문의 북쪽으로는 개천이 흐르고 개천 건너에는 평지가 형성되어 있어 이 일대에 축대를 쌓으면서 성벽을 쌓았던 석재들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성문 주변에는 아직 성벽의 기단석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제에는 심포리와 선암리 두 곳에 봉수대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심포리 길곶 봉수대는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 사이로 서해에 고개를 내민 진봉면의 끝자락 봉화산 정상에 있는데, 지금은 원형이 남아 있지 않지만 봉수대 축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연 석재들이 직경 10m에 걸쳐 무덤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 중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는 돌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전기부터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암리 봉두산 봉수대는 금구면 선암리 봉두산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로 <금구읍지>에는 단지 “남산에 불을 피웠다”고만 전해지고 있는데 금구현이었을 때, 현의 중심이 당월마을이었고 그 남쪽에 봉두산이 있기 때문에 <읍지>에서 말하는 ‘남산’이 지금의 봉두산일 가능성이 높아 <읍지>에서 말하는 ‘남산 봉수’가 선암리 봉두산 봉수대일 개연성이 무척 높습니다.
김제, 만경, 금구의 3곳에 읍치구역
김제지역에는 김제, 만경, 금구의 3곳에 읍치구역이 있었으며, 김제는 동진강 유역 쪽의 구릉지에, 만경은 만경강 유역 쪽의 구릉지에, 금구는 내륙 깊숙이 모악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김제고을의 읍치구역은 성산 아래에 있었는데, 김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시대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군현으로서 읍치구역의 격이 높았기 때문에 현존하는 관아와 향교의 건물은 그에 따른 위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관아와 향교가 인접한 거리에 함께 보존되고 있어서 조선시대 관아와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 통치와 교화 기능을 담당하던 당시 읍치구역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관아의 동헌과 내아가 함께 있는 드문 예로서 보존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 관아의 정무를 보던 중심 건물로 지방관의 생활 처소인 내아와 구분되어 보통 그 동편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동헌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1667년(현종 8)에 김제 군수 민도가 처음 세우고 이를 ‘근민헌(近民軒)’이라 칭하였는데 1699년(숙종 25)에 중수하여 명칭을 ‘사칠헌(事七軒)’으로 고쳤고 다시 1881년(고종 18)에 중건하여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내아는 1667년(현종 8) 김제동헌이 지어질 때 함께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그 뒤 동헌이 수리되거나 중건될 때 함께 개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최근에는 1981년에 복원, 보수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동헌과 함께 남아 있는 내아로서 관아의 건축물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김제향교는 1790년경에 작성된 <김제군읍지>에 의하면 당시 임원으로 장의 1명, 제임 2명, 유사 2명이 있었으며 교생의 정원이 50명인 소설위로 대성전은 1404년(태종 4) 창건하였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향교 건물 전체가 소실될 때 함께 불탔다가 1635년(인조 13) 현재의 위치에 대성전을 비롯하여 동무와 서무를 중건한 뒤 5성, 4현과 동국 18현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금구향교는 원래 위치가 금구동헌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됨에 따라 서혈산 아래에 중건하였으나 지세가 좋지 못하여 1675년(숙종 1)에 현 위치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성전의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김제·금구·만경 향교지>와 금구향교 앞뜰에 서 있는 전교 송방섭이 쓴 중수 비문에는 1390년(공양왕 2)으로 적고 있으며, <문화재지>와 <금구읍지> 및 전북대학교 박물관이 펴낸 <김제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에는 1405년(태종 5)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 송대6현, 동국18현을 배향하고 있고 명륜당, 만화루, 동재, 서재도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습니다.
만경향교는 1407년(태종 7) 창건되었으며, 1790년경 편찬된 <만경읍지>에 의하면 장의 1인, 유사 2인이 있었고 교생은 50명이었으며 대성전은 1407년에 만경동헌 서편에 있는 송전리에 창건되었으나 1620년(광해군 12)에 화재로 말미암아 소실되었다가 1637년(인조 15)에 현재의 위치에 이전 건립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 송대6현, 동국18현이 배향되어 있고 명륜당과 동재, 서재가 남아 있습니다.
구성서원은 1700년(숙종 26) 윤순거와 윤증을 배향한 서원으로 구성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1868년(고종 5)에 헐어버렸는데 다시 세우지 못해 묘처럼 봉분한 단과 ‘동토윤선생’과 ‘문성공명재윤선생’이라 새긴 2기의 비만 남아 있습니다.
쌍계서원은 1573년(선조 6)에 창건하였고 최식·최응삼·경거륜 등을 배향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철폐된 이후로 건물은 헐려 남아 있지 않고 문 뒤쪽에 쌍계서원이란 편액이 걸려 있지만 잘 보이지는 않고 시멘트 벽돌로 담을 둘러친 가운데 배향하였던 3명의 비석만이 풀밭에 서 있습니다.
회동서원은 1602년(선조 35)에 창건되어 이서상·이광춘·이영춘·최주극·최주항·임명항·임명용 등을 배향하였으나, 1870년(고종 7)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복원되지 못한 채 빈 터만 남아 있습니다.
남강정사는 일유재 장태수의 생가로서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강제로 합병되자 단식으로 스스로 숨을 끊은 곳입니다. 장태수는 1861년(철종 12) 21세 때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갔다가 1875년(고종 12) 연로한 부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고향인 금구에 내려와 효를 다하였습니다. 부친 사후 다시 관직에 나아가 시정원부경까지 올랐으나, 1910년(순종 4)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이 임금에게 불충하고 조상에게 불효한 것이라 하여 동포에게 주권 회복을 호소하는 고결문(告訣文)을 남기고 단식을 시작한 지 20여 일이 지난 11월 27일 남강정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동진강의 김제평야와 만경강의 만경평야
김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벼농사 중심의 농업지대를 형성하게 된 것은 동진강 유역의 김제평야와 만경강 유역의 만경평야의 개간과 간척사업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김제군·만경현·금구현에 각각 수십 개에 달하는 제언(堤堰)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벽골제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저수지입니다.
백제는 3세기 말에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아우르고 노령 이북까지 진출하였으며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 노령 이남의 잔존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오늘날의 전라남도 해안 지방까지 판도를 넓혔는데 이 시기는 고이왕으로부터 근초고왕에 이르는 80여 년으로 고대 국가 발전의 초석을 다진 시기였습니다. 기후가 온난하고 넓은 평야를 가진 서남지방이 지배 아래 들어오자 수전도작(水田稻作)을 장려하고 관개시설을 확충해 경제적 기반을 다져 나갔습니다.
벽골제의 대역사가 이루어진 것도 이 시기로 330년(백제 비류왕 27)에 김제에 벽골제를 쌓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369년 남방경략을 도모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790년(신라 원성왕 6)과 고려 현종 때와 1143년(인종 21)에 고쳐 쌓은 후 1415년(태종 15)에 다시 쌓았습니다. 현재는 길이 약 3㎞ 정도의 둑만이 남아 있는데 일제 강점기인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 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치면서 원형에서 많이 변형되었습니다.
벽골제의 수문은 원래 수여거·장생거·중심거·경장거·유통거 등 5개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둑의 한가운데를 파서 수로를 만들면서 둑은 둘로 갈라졌고 수문도 사라졌습니다. 장생거와 경장거의 돌기둥과 중심거의 바닥돌이 남아 있으며 제방을 따라 차례로 장생거, 주민 김귀남 집 마당에 있는 중심거, 그곳에서 800m가량 떨어진 지점에 경장거가 있으며 유통거와 수여거는 흔적만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벽골제비는 1415년(태종 15)에 벽골제를 중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인데, 비문이 마멸되어 1684년(숙종 10)에 신털미산 정상에 중건되었다가 비석의 보호를 위해 제방 북쪽에 옮겨 놓았는데 닳아서 명문을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월촌 선돌(立石)은 길쭉한 자연석이나 그 일부를 가공한 큰 돌을 어떤 믿음의 대상물이나 특수 목적을 가지고 삼국시대에 세운 것으로, 삿갓바위·입석·입암이라고도 합니다. 마을의 입석은 제사 신앙이 수반되어 마을 신앙의 대상으로 신격화되기도 하고 풍요를 기원하는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월촌 입석은 예부터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과 백제시대 벽골제를 시축한 기념으로 세웠다는 설이 전해져 옵니다.
금산사 입구 구리골은 정여립과 강증산이 개혁의 터를 연 곳
금산사 입구 금평지 주변의 마을을 구리골[銅谷]이라 하는데 이곳은 중생제도와 개혁의 모태가 됐던 곳입니다. 선조 때 기축옥사에 희생됐던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고 군사훈련을 했던 곳으로, 금평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제비산(帝妃山) 자락에 생가가, 중턱에 대동계의 지휘부, 정상의 커다란 바위 밑에 수련했던 수행처가 있었습니다. 정여립은 이곳에서 군사단체인 대동계를 조직하고 주변의 수양산 오리알 터와 솔개봉 등에서 군사훈련을 했습니다.
정여립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을 주장했습니다. 당시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사상으로, 이러한 사상과 대동계라는 군사단체가 역모의 증거가 돼 반대정파인 서인의 밀고로 숙청되는 기축옥사의 원인이 됐습니다. 정여립은 역모로 몰려 진안 죽도로 도망가 자살했지만 이곳 구리골에서 조선사회의 개혁을 꿈꾸었습니다. 정여립이 활동한 제비산 일대는 안타깝게도 폐허화되고 주변은 난개발에 방치돼 있습니다.
또한 구리골은 일제 강점으로 탄압받는 민중의 희망이 됐던 증산교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증산 강일순은 정읍 고부에서 태어났으며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참상을 보고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를 세울 결심을 하고, 유불선의 교리와 음양풍수·복서·의술 등을 연구하는 한편, 신명을 부리는 도술과 과거, 미래를 알 수 있는 공부도 하고는 1897년부터 3년간 세상을 보다 많이 알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이 기간에 충청도 비인 사람인 김경흔에게 증산교의 중요한 주문이 된 태을주를 얻었으며 연산에서는 당시 <정역>을 저술한 김일부를 만나 <정역>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됩니다. 전국 유람을 마친 강일순은 1901년 모악산에 있는 금산사와 대원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던 중, 그 해 7월 하늘과 땅의 원리를 깨닫게 되고 인간의 욕심·음란·성냄·어리석음의 네 가지를 극복함으로써 성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귀한 자는 빈천함을 알지 못하며 강한 자는 병약함을 알지 못하고 유식한 자는 어리석음을 알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빈천하고 병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가까이 하겠노라. 그들이 곧 내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깨달음의 일성을 외치며 증산교 교주로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성도한 증산은 9년 동안 구리골에 머물면서 고통 받던 민중들이 마음에 맺힌 모든 것을 풀고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상생의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천지공사를 열었으며, 1909년 3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증산이 머물렀던 집과 구리골약방(銅谷藥房)은 증산교의 분파인 대순진리회가 매입해 관리하고 있으며 솔개봉 맞은 편 수양산 오리알 터에는 증산법종교 교당과 강일순 부부의 묘각인 영대, 증산미륵불을 봉안한 삼청전 등 1950년대에 지어진 많은 건물들이 있습니다.
진표율사가 중창한 금산사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왕실의 원찰로 창건된 소규모 사찰이었으나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이때 진표율사는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미륵전에 모셨고, 금당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자기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 이후 금산사는 미륵신앙, 즉 신라 오교의 하나인 법상종의 근본도량으로서 이 지역 불교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견훤은 말년에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가 맏아들인 신검을 비롯해 양검·용검 등 아들들에게 붙잡혀 금산사에 유폐되었습니다. 신검은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하고 금강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으며 석 달 동안 유폐 생활을 하던 견훤은 감시자들에게 술을 먹이고 금성(지금의 나주)으로 도망쳐 왕건에게 투항하여 왕건이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견훤은 착잡한 번민과 울화에 싸여 등창이 나서 논산시 여산에 있던 황산사에서 죽었습니다.
금산사 경내에는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노주·석련대·오층석탑·혜덕왕사 진응탑비·당간지주·석종·육각다층석탑·석등 등 많은 보물과 대적광전·대장전·명부전·나한전· 일주문·금강문·보제루 등의 건물이 전해지고 있으며 심원암·용천암·청련암 등 부속 암자가 남아 있습니다.
동진강 하구의 망해사는 서해를 바라보고 있는데 신라 문무왕 11년(671년) 부설거사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낙서전 전면에 서 있는 팽나무는 1589년(선조 22) 진묵대사가 낙서전을 창건하고 그 기념으로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유서 깊은 노거수로서 문화재인 낙서전과 서해의 아름다운 낙조와 더불어 망해사의 명물이 되고 있습니다.
조앙사는 진묵조사를 흠앙하는 뜻으로 지은 이름으로, 이곳에서 훤당 조의씨가 진묵조사를 잉태하였을 때 인근의 산천초목이 시들어가더니 진묵조사가 출생하였다고 합니다. 1930년에 조앙사가 대화교의 포교당일 때 주존불인 미륵불을 모시고 미륵신앙을 전파하던 당시 모습을 보여주는 조앙사 미륵보탑이 남아 있습니다. 대화교는 손은석이 서울에서 창립한 종교로서, 최제우를 교조로 하는 제우교를 만들어 포교를 시작했다가 1920년에 용화교로 바꾸고 1923년 대화교로 다시 창종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고을학교 기사(3월)를 확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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