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춘(陽春)의 햇볕 따라 떠나는 경상도 답사길-.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2022년 2월 제82강으로, ‘넓고 크고 밝은 들’ 경남 거창(居昌)고을로 향합니다. 거창(居昌)은 예부터 넓고 크고 밝은 들이란 뜻으로 거열, 거타, 아림으로도 불렸으며, 명산 덕유산과 가야산이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고을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82강은 2022년 2월 2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코스는 서울-북상면(갈계숲/갈천서당/가선정/만월당)-위천면(용암정/구연서원/관수루/요수정/수승대)-황산마을(신씨고가/옛담장)-능허정-동계종택-마리면(사락정/영승서원)-거창읍(건계정/거창향교)-남하면(영빈서원/무릉리정씨고가)-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82강 답사지인 거창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합천, 함양, 산청군과 경계
거창은 가야시대 초기는 자타국, 거타, 후기에는 대가야연맹체의 일원이었으며 신라시대 초기에는 거타, 거열이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거창군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 여선현을 감음현으로, 감음현을 가조현으로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 합천을 합주로 승격시키고 거창, 가조, 감음. 삼가, 이안 등 12현을 합주에 속하게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1414년(태종 14) 가조지방에 이주한 거제와 거창을 병합하여 제창현으로 하였고 연산 비 신씨의 관향이라 거창군으로 승격하였으나 신씨의 폐위로 다시 거창현으로 격하되었다가 단경왕후 복위로 거창부로 승격하였습니다. 1895년(고종 32) 거창부를 거창군으로 개칭, 1937년 거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현재는 거창읍, 주상, 웅양, 고제, 북상, 위천, 마리, 남상, 남하, 신원, 가조, 가북 등 1읍 11면의 행정구역이 되었습니다.
거창의 산줄기는 북동쪽으로 가야산에서 뻗어 내린 남산(1,140m), 의상봉(1,046m), 비계산(1,126m), 오도산(1,134m), 문재산(1,126m), 오성산(889m)이 합천군과, 서쪽으로는 덕유산에서 뻗어 내린 월봉산(1,288m), 금원산(1,353m), 기백산(1,331m)이 함양군과, 남쪽으로는 솔봉산(645m), 매봉산(800m)이 낮은 봉우리를 이어가며 산청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줄기는 거창이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해 서출동류하는데 덕유산 삿갓샘에서 발원해 월성계곡을 만들고 원학동계곡을 휘돌아 거창읍을 가로 질러 황강을 따라 유유히 흐르다 낙동강에 합류합니다.
거열성은 건흥산(乾興山 572m)에 축조된 통일신라시대의 포곡식산성입니다. 둘레는 1.1km 정도이며 서쪽의 성곽이 잘 남아 있는데 2~3m이며 성곽 폭은 5~6m 정도입니다. 정상부에 북문지가 확인되었으며, 성내부에 내성 벽, 못, 건물지가 발굴되었습니다. 발굴조사 결과 거열성은 673년(문무왕 13)에 축조된 건흥산고성 혹은 만흥사산성으로 추정됩니다. 거창은 영호남의 접경지에 위치한 지정학적 요충지로 신라와 백제의 접전지였는데 건흥산과 남쪽의 망덕산의 협곡을 통하지 않고는 거창분지를 넘나들 수 없었기에 이를 통제하기 위해 축조된 산성으로 보입니다.
거창향교는 1415년(태종 15) 창건되어 1572년에 현감 서의가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3년에 대성전을 중건하고 1715년에 춘풍루를 건립하였습니다. 1748년에 도유사 전천분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몇 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춘풍루, 교직사 등이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공자와 사성, 공문10철, 송조6현, 동국 18현 등 총 39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갈계숲
거창에는 집성촌과 정자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갈계숲은 덕유산 기슭에서 발원한 원천이 송계를 지나 갈천에 이르러 동서로 나뉘어 흐르면서 시냇물이 자연섬을 만들고 수목이 우거져 아름다운 풍치를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석천 임득번과 그의 아들 갈천 임훈 등 삼형제와 문인들이 시를 지으며 노닐던 곳으로 숲 안에는 가선정, 도계정, 병암정, 신도비 등이 세워져 지조 높은 선비들의 학덕을 기리고 있습니다. 갈천 선생 호를 따서 세워진 가선정이 있어 가선림이라고도 하고 마을 이름을 따 치내숲이라고도 부르며 청학교가 놓인 뒤 청학림이라고도 하는데, 임정 가선림 청학림 모두 학덕 놓은 선비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갈계리는 은진 임씨의 집성촌으로 임씨고택은 임득번이 1507년에 건립한 주택으로 안채 영역과 사랑채 영역이 남북축선상에 직렬로 배치되어 있고 사당이 안채의 북쪽모서리에 있으며 대문채와 사랑채와 안채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최근에 복원된 것입니다. 사랑채의 자이당(自怡堂)이라는 당호는 임훈의 호를 따른 것입니다.
갈천서당은 갈천 임훈(1500~1584)이 후학 양성을 위하여 그의 아우 임운과 함께 1573년에 건립한 서당으로 소정천에 형성된 곡저평야에 남서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1878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좌우에 온돌방이 있는 중당협실(中堂夾室)형으로, 청방간에는 사분합 들문을 달아 공간 운영에 변화를 주었으며 평면은 좌측부터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 마루 2칸,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2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쪽에 솟을대문이, 왼쪽마당에는 신도비 2기가, 서당밖에는 고직사가 있습니다.
임훈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광주목사를 역임하였고 장례원 판결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습니다. 또 부역제도와 군정의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등 백성을 사랑하는 목민관으로서 추앙받았으며, 임운은 이황의 문인으로서 경사를 비롯하여 지리, 율려, 산수에 능통했으며 형과 함께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습니다.
용암정은 조선 후기 용암 임석형이 거창 월성계곡 위천변의 자연경관이 뛰어난 큰 바위에 지은 정자와 위천의 계류, 소, 암반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는 조선 시대 전통격식을 갖추고 있는 별서이며, 주변 자연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배치된 전통 경관과 역사문화환경이 복합된 자연유산으로 가치가 뛰어난 명승지입니다. 임석형은 행실과 학문이 빼어나 당세는 물론 후세까지 추앙받았으나 벼슬길에 오르기보다 초야에 묻히기를 좋아하는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7호로 뽑힌 황산마을
황산마을이 기대고 있는 산은 땅의 색이 누렇게 보이고 아침에 안개가 끼어 있어 하얗게 보인다고 황토 백산이라고 하는데 줄여서 황산이라고도 합니다. 마을 안에는 옛 담장이 약 1.2km나 펼쳐져 전통고가와 어우러져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며 수령 600년의 ‘안정좌’ 느티나무는 그 연륜을 뽐내고 있습니다. 황산마을은 1540년(중종 35) 요수 신권이 은거하며 후학들을 양성한 이후로 번성하여 거창신씨 집성촌이 되었으며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7호로 지정될 만큼 고풍스럽고 멋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황산리 신씨고가는 거창과 장수에 많은 땅을 가진 천석꾼의 부농 신도성이 1927년에 건립한 근대기 주택으로 원학고가(猿鶴古家)라고도 부릅니다. 안채 영역과 사랑채 영역을 나란하게 배치한 병렬형으로, 좌측에 있는 안채 영역은 역 ‘ㄱ’자형의 안채와 안채의 정면에 고방채, 우측에는 중문채를 두어 튼‘ 口’자형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사랑채 영역은 남향한 사랑채를 중심으로 우측에 대문채가 튼 ‘ㄱ’자형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관수루는 구연서원의 문루로 1740년(영조 16)에 세워졌습니다. 구연서원은 1540년에 낙수 신권이 세운 구연재라는 서당으로 출발하여 1694년에 신권과 석곡 성팽년을 배향하는 구연서원으로 발전하였고 1808년에는 황고 신수이를 추향하였습니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문루인 관수루와 강당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맞은편에는 요수정이 있습니다.
요수정은 요수 신권이 1542년(중종 37) 건립한 정자로 처음에는 구연재(현 구연서원)와 남쪽 척수대 사이에 건립하였습니다. 임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으나 위천의 홍수로 인해 1805년에 후손들이 수승대 건너편인 현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상량문에 1800년대 후반에 수리한 기록이 있습니다. 평면은 중앙 배면에 사방 1칸의 온돌방을 들이고 나머지 3면은 모두 누마루로 구성하였는데 이러한 평면 양식은 용암정과 비슷합니다.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수승대
수승대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습니다. 이후 조선 중종 때 요수 신권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을 이곳에 건립하여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대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 하여 암구대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이라 하였습니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급한 정무로 환정하면서 이곳에 오지는 못하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搜勝臺)라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를 보내니 요수 신권이 대의 바위 면에 새김으로서 비롯되었습니다.
동계종택은 동계 정온이 태어난 집으로, 1820년(순조 20)에 다시 짓고 정온의 신위를 사당에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ㄱ’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안쪽으로 ‘一’자형의 안채가 자리하였으며 안채의 뒷쪽에 따로 담장을 두르고 3문을 설치한 후 사당을 세웠습니다. 사랑채는 꺾인 부분을 누마루로 꾸미고 눈썹지붕을 설치한 점이 특이하고 안채와 사랑채는 북부지방 가옥의 특징인 겹집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기단은 낮고 툇마루를 높게 설치한 남부지방 고유의 특징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모리재는 정온을 기리기 위한 재실로 1645년에 유림에서 영당을 세워 영정과 유물을 보존하고 제향하다가 1704년에 소실되었던 것을 1707년에 중건하여 모리재라 하였으며, 1758년에 유허비를 세우고 1806년에 문루인 화엽루를 세웠으며 1921년에는 대대적인 중건을 하였습니다. 모리재를 중심으로 정면에 화엽루, 좌우측에 서무와 동무가 튼 ‘口’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정온은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고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10년(광해군 2)에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1614년에 부사직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하고,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의 참수를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 대정에서 10년간 위리안치 되어 유배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후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석방되어 헌납에 등용되었고 이어 사간, 이조참의,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였다가 결국 청나라에 굴복하는 화의가 이루어지자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은거하였습니다.
만월당은 만월당 정종주를 기리기 위해 1666년에 건립한 건물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며 1786년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평면은 중앙에 마루 2칸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1칸 배치한 형식이며 정면과 배면에 쪽마루를 설치하였습니다. 정면에는 원형의 연못이 1기 있으며 좌측에는 정면 4칸의 솟을대문이 있습니다. 건물의 성격도 처음에는 정자로 건립하여 중건하면서 재실의 기능이 부가되었고 최근에는 사당이 건립되어 문중 서원으로 발전하여 시대적 변화 양상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만월당에는 동편에 ‘만월당’이라는 편액과 서편에 ‘팔완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한 건물에 두 개의 편액이 걸린 이유는 만월당은 정종주가 현재의 자리에 건립하였지만 팔완당은 만월당의 조부인 팔완당 정몽서가 16세기 중엽에 건립한 건물로 건립 장소는 현재의 터가 아니라 남쪽에 있었습니다. 팔완당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만월당도 멸실된 것을 1786년(정조 10)에 후손들이 만월당 터에 각각의 건물을 중건하지 못하고 하나의 건물로 합쳐 지어 중건하였기에 당호가 2개가 되었습니다. 정종주는 학문이 높아 동계 정온과 교유하였으며, 숙부와 친형들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창의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하였습니다.
능허정은 확계 정옥견이 은거하여 소요하던 곳으로 당시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1634년에 중창했다가 그 뒤 1839년 후손들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능허(凌虛)는 ‘헛된 명리를 업신여긴다’는 뜻으로 정자 옆으로 위수 천이 흐르고 주위에는 벚나무가 많습니다. 정자 규모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이고, 계자난간을 둘렸으며 네 처마를 활주로 버티고, 목조 팔작지붕에 기와집으로 건축하였습니다.
영승 지역은 삼국시대 거열국에 속했는데 거열국은 대가야연맹의 일원으로 외교와 전쟁 양 측면에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거열국의 최고 방어 기지는 거열산성으로 건흥산에 있는데, 건흥산이 바로 영승 뒷산입니다. 거창읍과 영승을 드나들었던 취우재 고갯길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562년 거열국이 신라 진흥왕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영승 지역은 이때 신라에 복속되었습니다.
유서깊은 영승마을
영승마을은 신라, 백제 두 나라 사신을 마을에서 맞이하고 보냈다는 뜻으로 영송(迎送)이라고 불렀으나 1543년(중종 38) 퇴계 이황이 이곳에 살던 처 외숙 전철과 장인 귄질을 찾아 온 길에 마을 이름의 내력을 듣고 영송의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송(送)과 승(勝)이 소리가 같기 때문에 영승(迎勝)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마을 한가운데로는 아홉산에서 시작한 옥계내가 흘러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어 부유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마을 앞에는 농월담, 사락정, 영승서원이 수백 년 묵은 소나무들과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사락정은 전철의 증조부 전맹겸이 지은 초가 정자를 1519년 전철 형제들이 크게 중창하였고 퇴계 선생은 현판을 써 주고 사락(農桑漁樵 : 농사짓는 즐거움. 누에치는 즐거움, 낚시하는 즐거움, 땔나무하는 즐거움)의 시를 지어주었습니다. 1723년 홍수에 정자가 떠내려갔고 1740년 다시 복원하였다가 1998년 후손인 재일동포 전병수의 도움으로 중건되었다고 합니다.
영승서원은 퇴계 이황, 동춘당 송준길, 사락정 전철을 모시는 서원으로, 숭례사가 있으며, 1939년에 뜰에 '영승서원 사적비'를 세웠습니다.
건계정은 영천의 맑은 물 위에 꼬리를 담그고 거열산성을 향해 기어오르는 거북바위 등 위에 지어진 거창 장(章)씨의 정자입니다. 시조인 평보 장종행이 1240년(충렬왕)때 중국으로부터 귀화했는데, 그의 아들인 두민이 홍건적의 침입 때, 홍건적을 몰아내는 무훈을 세우자 공민왕이 두민을 아림군(娥林君)으로 봉했습니다. 후손들이 그 공을 기려서 1905년에 세운 정자로 그들 성씨집단이 유래한 곳이라는 중국 건주(建州) 땅의 지명을 따서 건계정이라 하였습니다.
무릉리의 정씨고가는 1686년(숙종 12)에 장사랑을 지낸 산수정 정형초가 창건하여 1924년에 중수한 것으로 안채, 사랑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건물 배치는 경사지에 기단을 높게 쌓아 안쪽 높은 곳에 안채, 바깥쪽 낮은 곳에 사랑채를 배치하였고 안채는 남부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ㄷ자형’ 구조입니다. 사랑채는 ㄱ자집 형태이며 형초의 호를 따서 ‘산수정’이라고 부릅니다.
영빈서원은 1744년(영조 20)에 영천사(瀯川祠)라는 사우로 창건하여, 정구, 정종, 정표, 정응두, 정시수, 정영진 등 동래정씨 6현을 제향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9년에 중건하여 사우와 강당을 새로 짓고 영빈서원으로 개칭 하였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향사를 봉행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삼우당은 동래정씨 삼형제인 정시수, 정시웅, 정시승의 학덕을 기려서 1913년에 건립한 것으로 본체인 삼우당과 누각인 화수정으로 구성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합천댐 건설로 그 지역이 수몰됨에 따라 1987년 지금 자리로 이건한 것입니다. 정시수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강화가 성립되자 시국을 개탄하고 여생을 초야에 묻혀 시를 읊으며 보냈다고 합니다.
일원정은 강호산인 김숙자를 추모하기 위해 정자 형태로 건립되었으나 지금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등 성리학의 연원을 같이 하는 7현을 모시고 제향하는 재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905년에 건립된 후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지만 원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정자형 재실로 대한제국 시기의 건축 기법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길 건너편에는 김숙자 신도비가 있습니다.
거창의 보물급 석조여래입상들
거창에는 보물급 석조여래입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농산리 석조여래입상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신체에 비하여 다소 머리 부분이 큰데 얼굴이 부분적으로 손상 되었지만 전체적으로 후덕한 느낌을 줍니다. 양어깨를 덮어 내린 통견의 법의는 가슴에서 ‘U’자형을 이루다 잘록한 허리 부분으로부터 ‘Y’자형으로 갈라져 양 대퇴부에서 대칭적인 의문(衣紋)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형태는 8세기 이후 상들에서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이 보입니다. 우측 상단부가 깨어져 나간 광배는 불신과 한 돌로 이루어진 배 모양으로 어느 정도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으나 화염문 등 구체적인 문양 표현은 알 수가 없습니다. 비록 부분적인 파손이 있으나 야산의 구릉에서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정제된 조각 수법을 보여 주고 있으며 비슷한 예가 많지 않은 점에서 가치가 높습니다.
양평리 석조여래입상은 높이 3.7m의 거대한 석조상으로 따로 마련된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는 형태입니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며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모습이며 얼굴은 둥글고 원만하며 눈, 코, 입 또한 솜씨 있게 처리되었습니다. 신체의 굴곡이 충실히 드러났으며, 날씬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이 남아 있으며 얇게 걸치고 있는 옷자락에는 ‘U’자형의 옷주름이 흐르다가 두 다리에서 긴 타원형을 그립니다. 오른손은 내려 옷자락을 잡았고, 왼손은 배에 대어 검지 손가락만 펴고 있으며 두 팔은 몸에 붙어 있어 조금은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원통형의 신체, 굴곡진 허리와 두 다리 등에 양감이 잘 표현된 통일신라 후기의 우수한 불상입니다. 이 주변에 금양사 혹은 노혜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불상의 주위에 주춧돌이 남아 있고, 불상 앞에 석등 재료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에 사찰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상림리 석조보살입상은 높이 3.5m의 거대한 보살상으로 연꽃이 새겨진 8각의 대좌 위에 서 있으며,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보계가 솟아 있고 보관은 없어진 상태입니다. 양감이 줄어든 얼굴에는 작고 가는 눈, 다문 입이 표현되어서 다소 엄숙한 모습이고 어깨는 각이 져 있으며, 신체는 장방형으로 보살상 특유의 유연성은 부족해 보입니다. 가슴에 장식된 목걸이와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천의는 매우 형식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허리에는 굵은 띠가 있고, 그 아래로는 양 다리에 걸쳐 ‘U’자형 옷주름이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으며 오른손은 몸에 붙여 물병을 들고 있고, 왼손은 가슴에 대어 연꽃송이를 쥐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던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되며 부근에 건흥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절에서 모시던 보살상으로 보입니다.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은 바위면 전체를 배 모양으로 파서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를 만들고 그 안에 삼존불입상을 얕게 새겨 놓았습니다. 중앙의 본존불은 얼굴이 비교적 넙적하며, 얼굴에 비하여 작은 눈·코·입, 밋밋하고 긴 귀 등에서 둔중하고 토속적인 인상을 풍깁니다. 신체의 표현은 각지게 처리된 어깨, 굴곡 없이 차분한 가슴, 막대 같은 다리와 좌우로 벌린 발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입니다. 끝이 날카로워진 연꽃무늬 대좌와 새의 날개깃처럼 좌우로 뻗친 옷자락 등은 삼국시대의 양식과 비슷하지만, 형식화되고 도식적인 요소로 보아 결국 이 불상은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적인 요소가 반영된 마애불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고을학교 기사(2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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