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처럼 새해를 맞이하는 대한민국은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2021년 7월 2일 경제와 무역의 유엔(UN)인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CTAD)가 대한민국을 선진국 그룹으로 공식 변경했다.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조정된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는 발표를 들은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를 입증하는 각종 지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타나고 있다.
사상 최고의 수출액, 반도체 1등 국가, 블룸버그 혁신지수 평가 1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디지털정부평가 1위, 세계 조선산업 경쟁력 1위 등의 지표로 인해 한국은 다른 나라가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하와이대 명예교수인 세계적인 미래학자 짐 데이토는 서구의 모델은 이제 수명을 다한 것 같다며, 대한민국이 미래의 길을 찾아 세계에 보여달라고 주문할 정도이다.
아직은 춥다
우리나라의 약진은 이제 경제와 IT를 넘어 문화영역으로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세계 젊은이들이 코로나19가 끝나면 가장 먼저 방문하고 싶은 나라가 K-Pop의 나라 한국이라는 인터뷰도 매체를 통해 종종 보도된다. 방탄소년단(BTS)의 한국어 노랫말을 세계인이 따라 부르게 되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호평받았고, <오징어 게임>을 향한 세계 시청자의 열광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 넘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성공한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의 스토리를 들여다보면 소득 불평등과 계급 갈등에 기반한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반지하방에서 살아가는 백수들이 기생충처럼 을과 을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기생충>, 더 나아가 빚에 눌려 자포자기한 비주류 인생들이 목숨을 담보로 러시안 룰렛 같은 생존게임을 벌이는 <오징어 게임>이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예술적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선진국은 국내총생산(GDP)이나 수출액 등 총량적 지표로 결정될 수 없다. 중동 산유국은 오일 달러 힘으로 국민소득 5만 달러를 능가하지만 이들 국가를 선진국으로 칭하지는 않는다. 심각한 빈부격차와 낮은 수준의 복지 및 의료 안전망을 이유로 세계 최강인 미국마저 선진국으로 부르기 어렵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 한국 역시 이 같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코로나19 시대의 천문학적 돈 풀기와 방역 우선주의 정책에 의해 전세계적으로 빈부격차와 교육, 문화, 사회적 격차가 심화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그 격차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현실을 볼 때, 스스로를 선진국으로 칭하기에는 너무나도 부끄럽고 암담한 모습이다.
다닥다닥 붙은 벌집 모양의 공간에서 미로 같은 어둡고 좁은 입구를 지나야 지친 몸을 겨우 뉘일 공간 하나에 의존하는 쪽방촌 사람들이 있다. 휜 허리와 굽은 어깨로 힘겹게 손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들의 모습은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다. 청소노동자가 기숙사 휴게실에서 숨지고, 청년들이 산업현장에서 각종 재해로 인해 목숨을 잃지만 해법은 요원하다. 이 시대 가장 낮은 곳에서 여전히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현실을 선진국 시대에도 바꾸지 못하는가?
청년들에게 미래는?
청년들의 삶은 또 어떤가? 각자도생. 선진국에 들어섰다는 대한민국의 2030 청년들에게 부여된 절체절명의 명제이다. <오징어 게임>에 전율하고 공감의 눈물을 흘리는 (세계의) 청년들로 인해 이 드라마는 한국의 리얼리티를 탁월한 예술적 완성도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하는 웃픈 상황에 처했다.
청년주택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 전 대표이며, 더불어민주당 청년 선거대책위원회인 다이너마이트 선대위 위원장인 권지웅은 최근 라디오 인터뷰에서 평범한 삶을 포기한 청년들의 자화상을 담담하게 토로했다. 사랑하고 결혼하여 살아가는, 너무나 평범한 일들이 이제 2030에게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와 배경, 교육, 경험의 양극화가 심화해,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가 팍팍한 이들에게 사회, 국가적 어젠다는 사치(?)일 것이다.
청년들을 더욱 못 견디게 하는 것은 비교 열위라고 해야 할까, 넘어설 수 없는 벽을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암담한 박탈감을 견디다 못해 적지 않은 청년들이 아파트 영끌에, 주식이나 가상화폐 투자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노라고 한다. 대선 후보의 경제 지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유명세를 탄 유튜브 채널 <삼프로>는 주식을 하는 청년들 거의가 시청한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을 향한 청년들의 열광은 결코 우연이 아니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투자가 성공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오징어 게임> 같은 극단적 생존확률까지는 아니지만, 결국 제로섬(zero sum) 또는 일정한 마이너스섬(minus sum) 게임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점은 청년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돈 풀기가 끝나가는 2022년에 투자 기상도는 '흐림'을 넘어 폭풍우 같은 긴축 발작이 일어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의 영혼은 불안하다. 청년들이 볼확실성에 내몰리는 것은 우리의 미래가 담보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부의 청년정책 어젠다는 아직도 청년들이 체감할 수 있는 무언가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2020년 8월 시행된 '청년기본법'에 의거하여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청년정책조정위원회를 두고 있다. 청년을 위한 정책에서 청년에 의한 정책으로 가기 위해, 청년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년들이 직접 청년 참여단, 온라인 청년 패널을 운영하고 있다. 매년 9월 셋째 주 토요일을 청년의 날로 기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정책 시스템이 산적한 청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헤드쿼터로서 역할을 감당하기는 한참 멀어 보인다. 청년들도 이제 국가에서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청년정책의 새틀짜기가 다음 정권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청년 – 미래를 결정하는 캐스팅 보터
아니나 다를까. 바야흐로 대선정국에서 정치권은 2030 표심잡기에 바쁘다. 한 대선캠프 관계자는 MZ세대의 속내를 종잡기 어려워 대선후보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다며, 후보에게 후드티라도 입혀야 하느냐를 고민할 정도라고 했다. 한 라디오 프로 진행자는 "기성 정치인은 이 세대를 이해 못하고 있다"며 "2030을 정치무관심층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2030 보수남성층은 정치 고관여층이며 자기중심적 이익에 민감하고, 생활이 정치화됐다"고 해석했다. 대선국면에서 2030세대는 '캐스팅 보터'로 부각되고 있다. 2030세대의 선택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선택이다.
청년정책에서 촉발된 '공정' 논의는 어느덧 2022 대선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공정하지 않다는 청년 세대의 절규는 우리 국가공동체가 불공정과 불평등의 깊은 역사적, 집단적 수렁에 빠져 있다는 반증이다. 문제는 불공정 문제의 해소가 고도의 정치적 역량과 전략적 선택, 공동체의 합의를 이루어 내는 통합적 지도력 등 모든 역량을 동원해도 해결이 쉽지 않는 난제 중의 난제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청년들이 절망하는 부동산 양극화 문제만 보더라도 사회경제적 암종이라고 할 정도로 그 뿌리가 깊다.
<눈떠보니 선진국> 저자 박태웅은 우리나라의 불평등 해소가 경제적으로는 토지개혁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추미애 전 장관은 "양극화와 불평등, 2030세대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문제의 중심에 부동산 문제가 있다"며 "땀이 존중받던 사회가 투기로 대박을 노리는 지대추구 사회로 변질된 탓"이라고 주장했다. 부동산으로 인한 이익을 기성세대가 가져가는 사회구조로는 세대간 격차가 해소될 수 없다. 월급 받아 월세 내거나 대출금 갚으면 남는 것이 없는 셈이라니, 주거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대'에 대한 근본적 접근을 달리하는 '시대적 대전환'이 하나의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물론 기득권과 기득권과 연계한 언론, 정치권의 엄청난 저항으로 자칫하면 세대간 한판 전쟁을 치러야 하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다.
청년정책을 위한 대선 후보의 자질
2022 대선에서 공정에 대한 감수성과 평등을 향한 진정성, 거기에 대해 풍부한 정책역량과 추진력, 세대간 통합을 위한 지도력을 골고루 갖춘 후보가 선출되기를 누구나 기대한다. 후보들도 어느 대선보다 2030 청년들을 위한 정책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청년들의 '깐부'를 자처하는 윤석열 후보는 공정사회, 공정한 법집행과 양성평등의 실현을 약속하며 청년원가주택, 청년도약계좌 등 계층이동 사다리 복원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하였다. 취업 문제와 부동산 문제를 문재인 정부의 실패로 공격하면서 청년세대들에게 비호감이라는 보수 후보의 이미지를 넘어 한 때 20대에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최근 들어 여가부 폐지나 병사봉급 200만 원 조정 등 이대남을 겨냥한 공약으로 선회하면서 양성평등의 문제를 희화화하고 남녀간 갈라치기를 조장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윤 후보는 역대 다른 보수 후보와 달리 청년들과 일정한 접점을 연결하는데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재명 후보는 늘 애용하는 "억강부약 대동세상"이라는 용어처럼 공정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을 강조한다. 지난해 말에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와 실시간 대담을 하면서 실력주의에 기반한 경쟁을 통한 결과는 공정하다는 것이 착각이니, 성공한 집단은 부채의식을 가지고 공공선, 연대의식으로 가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했다. 청년 기본소득, 월세 공제, 선택적 모병제, 다양한 양성평등 및 아동청소년 정책 등을 통해 "청년 기회국가"를 만들겠다는 공약이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제시되었다. 이재명 후보는 윤흥길 작가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읽으며 가난에 찌들어 살아온 권씨 본인에 감정이입해, 사시를 합격하고 삶의 토대가 바뀌어 기득권을 누리며 살 수 있었지만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일종의 부채의식이다. 누린 것을 사회에 환원해 외면 받았던 성장기를 마주하고 자신을 치유하는 걸 넘어, 공공선으로까지 이르는 삶의 과정을 거쳤으리라 추측한다.
필자는 지난 몇 차례의 대선을 거치면서 어느 때부턴가 유권자들에게 구애하기 위해 급조된 대선공약보다는 후보 삶의 이력과 정치적 실천에서 우러나는 핵심적 가치를 통해 그의 진정성을 확인한다. 지나온 삶의 궤적은 앞으로 한걸음씩 나아갈 미래를 예측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온갖 정치적 박해에도 불구하고 정치란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 하였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기득권 세력의 갖은 조롱을 받으면서도 ‘특권 없는 사회’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보릿고개를 겪는 시골 깡촌에서 태어나 모든 국민이 잘살아 보자는 신념에 진정성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새해 첫 칼럼을 쓰면서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한다는 희망의 근거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이와 반대되는 통계, 예컨대 우리나라의 불평등 정도가 세계 최고라는 <세계불평등보고서 2022> 자료, 불평등 정도를 보여주는 피케티 지수 등을 굳이 글머리에 제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처럼 절망적인 현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년 새해 임인년을 기대해본다. 세계사적으로도 엄혹한 시기에 오는 3월 대선에서 대한민국에 지도자만 잘 선출된다면, 종전과 세계평화, 경제 활력 등 주요 과제를 선도해갈 수 있는 모멘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향후 5년의 대한민국호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잘 선택한다면 우리는 청년세대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하나의 시대적 치트키(Cheat Key, Cheat Code)를 얻게 되는 셈이다. 3월 이후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공정의 문제를 풀어낼 지도자, 나아가 통일비용보다 훨씬 많은 안보유지 비용으로 청년의 미래가 암울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디스카운트를 벗어나게 해줄 지도자를 찾는다. 총칼을 녹여 보습과 호미를 만들 듯 평화가 담보된 한반도에서 청년주택, 탄소 감축을 통한 기후정의, 디지털 시대의 대전환, 그리고 출발점이 다른 아동청소년을 위한 교육 격차를 해소하는 날이 앞당겨지기를 기대한다.
※ 강경숙은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중등특수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7~2018년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회의 본회의 위원을 지냈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교육 분과 위원, 국무총리실 장애인정책위원회 위원,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윈회 위원, 국립정신건강센터 미래비전자문위원,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겸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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