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 선언, 그러나 기후 침묵은 지속되고 있다
지난 한 해 한국의 기후정치는 급진전을 이루었다. 9월에 국회가 기후위기 비상선 결의안을 채택했으며, 대통령은 10월 국회 시정연설에서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12월에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을 발표하였고, 2050년 저탄소 장기 발전 전략(LEDS)에서 탄소중립을 명시하기로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였다. 작년 초만 하더라도 기후위기라는 단어조차 생소했고 2050년 탄소중립은 정부의 복수 시나리오 어디에도 찾기 힘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큰 변화임이 틀림없다. 이제는 포스코나 LG와 같은 거대 기업들까지도 탄소중립을 표방하고 보수언론들도 거론하기 시작했다. 뭔가 바뀌려나.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 된다. 정부, 기업, 언론 등의 엘리트들이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생각해서는 안 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이라는 '창의적' 사업을 제시하였고, 더불어민주당의 이낙연 대표는 부산을 방문하여 가덕도 공항 건설을 지지하고 나섰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석탄화럭발전소에 대한 한국 정부의 투자는 여전히 철회되지 않았으며, 한때 파열음을 내던 민주당 내 석탄발전소 반대 목소리는 온순해졌다. 대통령의 30년 후 탄소중립 선언과 당장의 정부여당의 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와 모순에 대해서 침묵이 흐르고 있다. 민주당 한 의원은 이제 낙타가 머리를 디밀었으니 천막을 모두 차지하기까지 기다리자고 한다. 기다릴 만한 시간이 있을까, 그 낙타가 천막을 차지할 수 있기는 한가, 무엇보다도 그 낙타가 대체 무엇인가.
한정애 환경부 장관 후보의 인사청문회는 참으로 기괴했다. 후보가 청문회장에서 "기후위기가 코로나19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파국이라고 경고하였지만, 아무도 대꾸한 의원이 없었다. '파국' 경고를 이렇게 무심하게 들을 수 있나 싶다. 신공항을 지지하는 이의 말이라서 그럴까. 인사청문회장만이 아니다.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장에서도 기후침묵은 이어졌다. 세 번씩이나 기후위기를 경고하고 탄소중립을 강조했기에,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입을 다문 것일까. 이번에는 말하지 않은 대통령뿐만 아니라, 묻지 않는 기자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한미동맹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생각이겠지만, 바이든 미 대통령이 강조하는 기후위기 대응은 '국민적 관심사'가 아닌가. 그 동맹에서 한반도 평화와 함께 코로나/기후변화 해결이 핵심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강경화 장관의 제안이 너무 늦게 나와 깨닫지 못했나.
지속되는 기후 침묵 속, 녹색성장의 꿈만 부푼다
국회에는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탈탄소 사회로 이행하겠다는 여러 법안들이 발의되어 있다. 민주당 이소영 의원의 법안이 대표적이다. 이 법안에는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명시하고, 국가기후위기위원회 설치, 국가기후위기대응기본계획의 수립과 이행, 정의로운 전환과 오염자 부담의 원칙 명시, 기후위기대응기금의 설치와 협동조합의 지원 등, 기후위기 비상행동 등의 사회운동이 요구해왔던 사항들이 담겨져 있다. 과거의 관성대로라면 기후운동은 이 법안의 부족함에 대해 아쉬움은 표하지만, 대체로 법안을 환영하며 빠른 국회 통과를 촉구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국회에 상정된 기후위기대응법안들이 만들려는 사회가 무엇인지 따져 물어야 한다. 기후위기에 직면하면서 지금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다는 교훈이 법안에 담겨져 있는가. 발의된 법안들에는 기후위기 대응을 천명하고 탈탄소, 탄소중립 등과 같은 용어들이 정의되어 있지만, 그 비장함과 새로움을 잡아먹는 경제성장주의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소영 의원의 법안은 기후위기를 생존의 문제만 아니라 "경제의 문제"라고 선언하면서, "글로벌 무역경쟁" 속의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탈탄소 기술과 산업을 육성"해 "국가경쟁력을 강화"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물론 모호하기 짝이 없지만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한다"고도 덧붙였다. 기후위기 시대에도 글로벌 무역경쟁은 여전하며 국가경쟁력은 계속 숭상되어야 하는지 성찰하지 않는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모자를 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대부분의 법안들은 회색 기술과 산업을 녹색(탈탄소) 기술과 산업으로 대체만 하면, 우리는 경제성장을 지속하면서도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녹색 기술을 개발하고 산업을 육성할 것인지에 있다고 전제하고, 기업을 지원과 육성을 위한 조항들로 가득 채웠다. "지난 10년간 추진했던 '저탄소 녹색성장'의 한계를 보완"하겠다고 천명하고 있지만, 녹색성장 전략에서 한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 아니, 맞다. 그래서 녹색성장 전략의 한계만을 단지 보완하겠다고 말한 이유일 것이다. "기후위기는 해결해야겠지만 경제성장도 지속해야지! 만약 경제성장에 어려움이 부딪친다면? 기후위기는 글쎄..... 생각 좀 해보자고." 이것이 법안들에 담긴 속마음이다. '경제성장과 온실가스 배출의 탈동조화'는 환상일 뿐이며, 지구적 착취에 껴들지 않고 녹색성장은 불가능하다.
기후정의를 묻고, '인권 기반 접근'을 담아라
발의된 법안은 사람들이 기후위기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이소영 법안에는 국민에게 그저 "탈탄소 생활을 적극 실천"해야 할 책무만이 주어질 뿐이다. 국가가 기후위기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으며, 온실가스를 감축하도록 기업을 강제할 의무도 밝히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업이 기후위기를 야기한 책임을 지고 피해입은 사람들에 보상할 의무도 규정하지 않고 있다. 기후위기는 인위적으로 배출된 온실가스 때문이라고 과학자들이 이야기하지만, 법안은 기후위기의 가해자가 누구인지 밝히고 그 책임을 추궁하기를 꺼리고 있다. 헌법과 국제 인권조약들은 사람들의 생존권, 건강권, 환경권 등을 보장하고 있지만, 법안은 이에 침묵하고 있다. 배출한 기업은 지원받고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보호받지 못한다. 필요한 것은 기후정의이지만, 법안은 기후불의를 선택한다.
인권학자인 조효제 교수는 최근 발간한 <탄소 사회의 종말>에서 기후위기에 대한 기술관료적 접근이 아닌 '인권 기반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2008년 유엔 인권이사회가 '인권과 기후변화 결의안'을 발표한 이래, 국제 인권기구와 인권운동은 기후변화가 인권을 침해하는 가장 치명적인 원인이라고 경고하고 각국이 그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해왔다. 과학자들은 기후위기와 1.5도 목표 준수의 절박성을 강조하지만, 국가와 기업들은 기술적, 경제적 가능성을 두고 시간을 허비해왔다. 이제 인권운동은 1.5도 목표 준수와 급격한 온실가스 감축, 그리고 기후위기 피해자의 보호를 국가의 정치적 책무성이라고 밝히면서, 그 간극을 메우라고 촉구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인권단체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 기후변화로 인권를 침해받은 이들을 도와 진정을 냈고, 이미 청소년들은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냈다. 불평등한 성장주의 체제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사회운동과 연계되고 그 일부로 자리잡길 기대한다.
국회가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탈탄소 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법률을 만들겠다면, 기후정의를 묻고 원칙을 천명하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 경제성장주의에 매몰되어 기업들에게 새로운 이윤 추구의 기회만을 만들 뿐, 사회적 불평등 해결도 그리고 기후위기 해결도 불투명한 녹색성장류의 접근은 버려야 한다. 대신에 누가 가해자이며 누가 피해자인지, 사람들의 권리는 무엇이며 국가와 기업의 의무는 무엇인지부터 명확히 밝히는 것부터 토론해야 한다. 또한 경제성장을 지속하면서 과연 온실가스를 대폭 감축할 수 있는 것인지,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탈탄소 사회는 또 다른 이름의 경제성장주의 사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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