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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힘" 믿었던 김정은, "낙담한 친구나 연인"이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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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힘" 믿었던 김정은, "낙담한 친구나 연인"이 된 이유

[정욱식 칼럼] 남북미 정상들의 우정과 배신

많은 이들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좌초 위기에 처한 이유를 2019년 2월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하노이 노딜'로 끝난 데에서 찾는다. 북미 간의 동상이몽이 너무나도 컸고 남북관계도 그 여파에 시달려왔다는 점에서 이러한 진단은 적실성을 갖는다.

그러나 좌초 위기에 처했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구할 기회는 있었다. 4개월 후에 열린 판문점 남북미 정상들의 접촉이 바로 그것이었다. 국내외 언론이 인용보도하고 있는 밥 우드워드의 신간 <격노>(Rage)에 그 장면이 담겨 있다.

▲ 미국 언론인 밥 우드워드가 펴낸 트럼프 대통령과 관련된 뒷이야기 <RAGE> ⓒSimon & Schuster

'하노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6월 10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 트럼프가 "러브 레터"라고 부른 이 친서에서 김정은은 "우리 사이의 깊고 특별한 우정이 북미관계의 진전을 이끄는 마법의 힘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다시 한 번의 기회" 즉, 3차 북미 정상회담 의지를 강력히 피력했다.

그리고 20일 후에 세계가 놀랄 만한 '깜짝쇼'가 펼쳐졌다.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 참석했던 트럼프가 서울로 출발하기에 앞서 트위터에 "김 위원장이 이것을 본다면, 나는 비무장지대(DMZ)에서 그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인사(say Hello)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적은 것이다. "2분 동안 만나는 게 전부겠지만 그래도 좋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트럼프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던 김정은은 이 깜짝 제안을 전격 수락했고, 6월 30일 판문점 회동은 이렇게 성사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은 "우리 각하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훌륭한 관계가 아니라면 하루 만에 이런 상봉이 전격적으로 이뤄지지는 못했을 것"이라며, "우리가 맞닥뜨리는 난관과 장애를 견인하고 극복하는 신비로운 힘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트럼프도 화답했다. 그는 6월 30일 자 <뉴욕타임스>의 머리기사에 실린 두 사람의 사진을 동봉해 "오늘 당신과의 만남은 정말이지 놀라운 것"이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틀 후에도 22장의 사진을 첨부해 또 편지를 썼다. "이 사진들은 나에겐 위대한 추억이고 당신과 내가 발전시켜온 유일한 관계를 보여준다"는 설명과 함께.

하지만 김정은이 품었던 확신이 실망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판문점 회동에서 한미 연합 군사 훈련 중단을 약속했다. 그러나 7월 중순 들어 한미 양국은 8월에 한미 연합 훈련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고, 8월 11일부터 훈련이 시작됐다.

그러자 김정은이 또 트럼프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는 트럼프가 약속했던 한미 연합 훈련 중단이 지켜지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에 담겼다. 그는 "우리의 관계는 솔직한 생각을 말할 정도가 되었다"며 "나는 너무 기분이 나쁘다. 이 감정을 당신에게 숨기고 싶지 않다. 정말이지 너무 기분이 좋지 않다"고 썼다. 이를 두고 우드워드는 김정은이 "낙담한 친구나 연인" 같았다고 표현했다.

낙담한 김정은은 판문점 회동의 합의 사항이었던 북미 실무회담을 뒤로 미뤘다. 그리고 이때부터 트럼프와의 '사적 관계'와 북미관계라는 '공적 관계'를 구분짓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친분이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를 푸는 "마법의 힘"이 될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만약 트럼프가 약속했던 한미 연합 훈련 중단이 지켜졌다면 어땠을까'라는 짚은 아쉬움이 드는 까닭이다.

이 대목은 김정은의 트럼프에 대한 실망감뿐만 아니라 문재인 정부를 향한 '근친증오'를 이해하게 해준다.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솔직한 생각"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에 앞서 문재인 정부를 향해서도 '권언'을 내놨었다. "남조선 당국자가 사태발전 전망의 위험성을 제 때에 깨닫고 최신무기 반입이나 군사연습과 같은 자멸적 행위를 중단하고 하루빨리 지난해 4월과 9월과 같은 바른 자세를 되찾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미 양국은 8월 11일부터 연합지휘소훈련을 강행했고, 8월 14일 국방부는 '2020-2024년 국방중기계획'을 통해 무려 290조 5000억 원의 국방비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문재인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남북한이 평화경제론을 실현해 일본을 따라잡자는 취지로 연설했다.

그러자 북한은 한미 군사 훈련과 남한의 대규모 군비증강을 맹비난하면서 문 대통령의 연설을 가리켜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막말을 쏟아냈다.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도 했다. 이후 남북관계는 이렇게 흘러가고 말았다.

기실 하노이 노딜은 문재인 정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하지만 판문점 회동 이후의 상황 악화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고 그래서 예방할 수도 있었다. 트럼프가 거듭 한미 군사 훈련 중단을 약속했던 만큼, 문재인 정부는 이를 지렛대로 삼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연합훈련과 분리시키려고 했어야 했다. 2019년 한국의 군사력이 세계 7위로 평가된 만큼, 2018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단계적 군축" 실현을 위해 군비 조절에 나섰어야 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정부가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보다 전작권 전환을 더 상위의 목표로 잡았던 것이 아니냐는 지적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합리적 의심은 올해에도 지속되고 있다. 한미 연합 훈련 강행에 이어 5년간 300조 원이 넘는 국방비 투자 계획을 밝혔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로 연합 훈련이 축소되면서 전작권 전환이 또 물 건너가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정부 안팎에선 존 볼턴 회고록과 우드워드의 책을 두고 정부의 '선전'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지금은 자화자찬할 때가 아니다. 한반도 평화가 또다시 희망고문으로 끝날 위기에 처한 데에는 분명 정부의 잘못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까닭이다.

* 필자 신간 <한반도의 길, 왜 비핵지대인가?>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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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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