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줍는다!
문장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강사가 이렇게 운을 뗐다.
다들 당연히 '버린다'라는 말이 이어질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수업에 참여한 청소 노동자들은 다른 답을 했다.
5천만 명이 살면서, 한 사람이 하루에 1kg가량의 쓰레기를 만드는 세상이라 했다. 그런 세상에 쓰레기를 '버린다'가 아니라 '줍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몇 해 지나지 않아 쓰레기로 분류될 상품을 만들고 파는 데 골몰했다.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었다. 줍는 행위에 비용을 지불해야 할 때가 되면 잠시 눈을 돌렸다. 이들에게 자신의 공간을 맡긴 기업은 쓰레기 줍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눈살을 찌푸렸다. 대학도 그들 중 하나였다.
코로나19 시기의 해고
아무리 청소(용역) 노동자가 대학을 닦고 쓸어도 대학 소속은 아니다. 알려진 사실이다. 대학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파견업체와 청소 경비 용역 계약을 맺었다. 저가낙찰 방식으로 최저임금을 유지했고, 그 인원마저 줄이고자 했다. 사람을 내보낸다.
경비 노동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CCTV와 무인 방범 시스템이 들어왔다. 청소 노동자가 내몰린 자리에는 두 사람 몫을 해내야 하는 노년 노동이 있었다. 대학은 누군가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을 경비 절감이라 불렀다. 경비를 아끼느라, 계단 아래 창문 없는 방을 휴게실이라 했다. 1년 전, 그곳에서 청소 노동자가 숨졌다. 100만 평 서울대 교정에서 그가 쉴 수 있는 공간은 1평 휴게실에 불과했다.
노동자의 죽음도 깨달음을 주진 못했나 보다. 세상은 달라진 것 없이 재난을 맞이했다. 코로나19가 닥쳤다. 자본주의에서 '가진 사람들'이 재난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7월, 포항에 자리한 한동대학교는 청소 노동자 14명을 집단 해고한다.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7월 1일 아침, 한동대 기숙사를 청소하는 이들은 작업복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에 들어서다가 저지당했다. "어떻게 들어왔어요?" 교직원이 놀라 물었다. 매일 같이 출근하는 곳을 어떻게 들어왔냐니. "카드 찍고 들어왔죠."
실수라고 했다. 원래 문이 열리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관리팀장이 나와 나가라고 소리쳤다. 오늘부터 이들은 외부인이라 했다. 각자가 청소하는 건물로 가 보았다. 출입카드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한동대는 용역업체인 세영○○○와의 계약이 6월 30일 자로 종료됐다고 했다. 그들이 내쫓긴 학교 정문 밖에는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신박'한 해고 통보였다.
5500여 명 재학생을 둔 한동대에 청소하는 노동자는 33명. 이 중 강의실 건물을 담당하는 이들을 본관 팀이라, 기숙사 여섯 동을 담당하는 이들을 생활관 팀이라 지칭했다. 생활관 소속 14명이 전원 해고된 것이다.
내보내는 게 임무면 격식이 있어야
7월 1일이 되기 며칠 전, 용역업체가 학교와 계약이 6월로 만료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들은 그것이 십여 년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말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가장 오래 근무한 이가 25년이다(올해가 한동대 설립 25주년이다). 예닐곱 해 일한 사람은 막내 축에 속했다.
용역업체만 바뀔 뿐 자신들의 고용은 그대로 유지됐다. 다만 매번 계약서를 새로 써야 했다. 10년 차도, 20년 차도 신입이 됐다. 경력직 신입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대학도 신입보다는 경력직 신입이 '부리기' 편했다. 그래서 고용승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제 코로나19로 청소 용역비를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계약 연장도, 새 용역 입찰도, 고용 승계도 없다. 현수막 통보는 무엇이냐는 언론의 질문에, 대학은 해고 통보는 용역업체가 알아서 할 문제라 일축했다. 자신들은 법적 책임이 없다. 그러나 십수 년 쓸고 닦느라 이 공간에 정이 든 사람들은 순리를 말한다.
내 집이었다. 마음이 그랬다.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그랬다.
'계약종료'라는 짧은 단어로 내쫓겼으나 가지 않았다. 정문 앞에 농성장을 세웠다.
대학은 새로운 현수막을 붙였다.
청소, 이게 마지막이잖아
농성 60일이 지났다. 매일 농성장에 출퇴근이다. 농성장 한 편에 앉아 듣자니, 한 이가 집을 나서는데 남편이 핀잔을 놓았나 보다. 돈 버는 일도 아니면서 뭐 그리 아침부터 나가. 다른 이가 한마디 한다.
갑자기 툭 끊긴 돈줄. 그 밥줄을 잇기 위해 무더위에 거리에 앉았다. 천막 안은 찜통이었다. 폭염 특보가 내린 날. 다들 천막 밖에 돗자리를 깔고 한 뼘 그늘을 찾아 들어갔다. 그래도 이마에서 땀이 주룩 흘렀다. 조합원 중 젊은 편이 마흔 후반. 낼모레 일흔이라는 이도 작은 체구를 웅크린 채 앉았다.
내 걱정을 해준다. 자신은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이 일상이라 괜찮다고 했다.
다들 이 말부터 했다. 그 앞에서 노동의 고됨을 묻긴 어려웠다.
뭐 대단한 돈 욕심이 아니다. 최저임금에 더해 한 끼 3000원짜리 점심값(7만 원)을 받는 재미로 다녔다. (올해 4500원으로 인상됐다.) "그게 살림에 보탬도 되고. 가끔은 친구들하고 맛있는 것 사 먹을 정도는 되고" 그래서 일했다.
좋은 일자리가 아닌 것은 알았다. '이 나이에' '여자가' '배운 것 없는' '기술 없는' 수식어를 붙여 납득할 뿐이었다. 자기 이름은 밝히지 말고 그냥 조합원이라고 해서 글을 써달라던 이는 말했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아랫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자신들이라는 소리였다.
참고 넘길 일이란 무밭 농사와 제초 작업 같은 것들이다. 한동대는 건립부터 재정 상태가 좋은 대학이 아니었다. 많은 부분 후원에 기댔다. 후원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아 김장철에 무를 보냈다. 대학 이름으로 보냈으나, 풀을 뽑고 물을 주고 농사짓는 이는 따로 있었다. 이런 걸 가리키는 말이 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
곰이 존재하는 이유는 왕서방이 돈을 벌기 위해서다. 그러니 곰이 노동조합에 들면 왕서방 표정이 바뀐다.
다 참아도 못 참는 것이 해고
2015년 청소 노동자들은 용역업체로부터 해고통지서를 받은 적이 있다.
그 소식을 들은 한동대 학생들이 찾아와 노동조합을 권했다(한동대에는 '들꽃' 등 청소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지하는 학생 모임이 있다).
"그날 일 마치고 씻다가 머리도 못 말리고 갔어요." 한걸음에 노동조합이라는 데를 찾아갔다. 다 참아도 못 참는 것이 '해고'였다. 내일부터 손가락 빠는 일을 감내할 노동자는 없었다.
노조가 생기자 학교는 "자기들 생각해서 이건 아니다 싶으면 아예 안 시키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다 싶은 일'에 밭농사와 제초가 있었다. 노조 만들고 다음달, 토요일 근무가 사라졌는데도 전보다 많은 금액이 입금됐다. 그런데 그게 최저임금이었다.
인력 감축 시도 꾸준히
그 후 1년에 한 번씩은 대학과 갈등을 빚었다. 대학은 매년 청소 인력을 줄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몇 번째인지 몰라요." 해고 시도를 나열하던 이가 말한다. 몇 가지만 추리자.
2017년에는 학생들의 온라인 민원을 근거로 3명을 해고하겠다고 했다. 작년에는 행복기숙사라는 신축 건물을 짓고도 신규채용을 하려 하지 않았다. 기존 인원으로 청소하라는 말이었다. 사학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은 기숙사였다. 그런데도 최저임금 받는 사람 한둘 들이길 아까워했다.
점심시간 전후로 4시간씩 꼬박 일했다. 청소하는 건물에 마음 편히 다리 뻗을 공간 하나 없지만, 대학 관리팀장은 오히려 일이 적어 저렇게 쉴 시간이 있는 거라고 했다. 기숙사 6동을 청소하는 데 14명까지 필요 없다는 입장이었다. "우리가 사람이 많다면서 괴롭히는 거야."
이들의 동선이 CCTV를 통해 팀장에게 전달됐다. 감시받고 질책받았다. 팀장은 일 편하면 대충하게 된다면서 화장실 물 호스를 없앴다. 덕분에 양동이로 수 리터 물을 날라야 했다. 100리터 쓰레기봉투를 바닥에 끌지 못하게 해, 학생들이 돈을 모아 손수레를 사준 일도 있다.
안 듣는 게 아니지, 그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떤 이는 70세 생일에 출근을 했더니 출입카드가 정지된 상태였다. 용역업체가 정한 정년(만 70세)까지 1년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대학은 나가라 했다. 나이가 많다고 했다. 나이든 노동자는 매일 자신이 청소하던 건물로 출근을 했다. 들어가지 못하니 밖에서 꽁초를 줍고 잡초를 뽑았다. "15일쯤 지나고 나니 딱 한계가 오는 거야. 진짜 이걸 해야 되나. 그만두고 싶은 마음인데. 동료들이 다 원하질 않았어요. 자기들 믿고 조금만 견뎌보자고." 한 달을 버티니 복직됐다. 그리고 딱 한 달 일했다. 6월 30일, 동료들과 함께 해고됐다.
노동조합은 대학 관리자를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으로 신고할 생각이다. 또 파견법은 원청(대학) 관리자의 직접 지시와 감시를 불법 파견(위장도급)이라 규정한다. 청소 노동자들은 팀장이 이러는 이유를 안다고 했다.
하지만 노조 하고 똑똑해졌다는 이들이다. '그거는 아니지' 덧붙인다.
대학이 '법적으로 문제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들도 자신이 아는 법을 지키는 게였다. 법에는 노동자의 권리를 언급한 부분이 있다. 함부로 쫓겨나지 않을 권리 같은 것 말이다.
코로나는 이용당했다
집단해고는 쉽게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 저항이 세니까. 명분이 필요한 일이다. 대학은 코로나19를 내세웠다. 방학이면 열리던 행사도 사라지고 기숙사에 머무는 학생도 적어 한 건물만 사용 중이라 했다. 청소는? 사감 역할을 하던 간사들이 하고 있다. 개학 후에는? 근로장학생에게 청소 알바를 줄 생각이라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노동조합은 말했다.
정부가 2조 원 넘는 예산을 고용유지지원금으로 책정한 것은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을 게다. 그러나 대학은 정식으로 사람을 채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총장 직인이 찍힌 고용유지 협약서가 노동조합에 있었다. 해고는 협약서가 작성된 지 7개월 되는 시점에 벌어졌다. 그러나 대학은 이 협약서가 '세영○○○ 청소근로자 관련 협정서'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만큼, 세영 업체와 계약종료가 된 이상 효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노조는 부당해고 구제신청에 들어갔다.
위기는 왜 최저임금 노동자에게
법이 이들의 해고를 부당해고(노조 탄압)라 하건, 피치 못할 경영상의 어려움이라 판단하건 내게 의문 하나가 남는다. 실제 위기라 해도, 그것은 왜 번번이 가장 취약한 노동자에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나.
한동대 교직원들 또한 고통을 분담했다고 들었다. 연봉 7000만 원 이상의 직원에 한해 월급 10%를 반납했다. 고임금 직원 두세 명이 대학에 반납한 금액을 합친 것보다 적은 돈이 청소 노동자의 월급이다. 그러나 이들이 가장 먼저 삭제됐다.
국내 대학들은 내내 위기를 말했다. 학생(등록금) 감소, 최저임금 인상을 이유로 들었다. 2014년, 모 대학은 경비노동자 1/3을 해고하면서 자신들은 "화장실 휴지도 아끼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휴지 사정은 밝혀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 적립금으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침묵했다. 대학 운영에서 청소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보통 0.1%도 되지 않는다.
사는 권리를 주장해야지
한동대 해고 문제를 다룬 지역방송(포항MBC)을 본 적이 있다. 학교와 노조의 입장을 조목조목 잘 비교해놓았다. 그런데 인터뷰 말미에 사회자는 노조 계획을 물으며 이리 말했다.
그 말이 귀에 꽂혔다. '떼쓴다고 들어주지 않는다'는 말과 겹쳐 들렸기 때문이다. 노조의 선전전 소리가 요란했다. 반면 학교는 큰 목소리를 내질 않았다.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사람을 해고했다. 조곤조곤한 말투로 고용유지 협정서의 효력을 무시했다. 일하는 사람이 길바닥에 앉고 눕고 해야 겨우 가질 수 있는 마이크를 그들은 쉽게 가졌다. 마이크를 쥐고 '자를 만해서 잘랐다'라고 한다. 그 말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다.
이대로는 못 나간다. 정년까지 일하다가 박수받으며 나가고 싶다고 했다. 이들은 더 시끄러워진다. 출근, 점심, 퇴근 시간에 맞춰 구호를 외치고 현수막을 든다. 내가 이게 웬 고생이냐고 하니, "말할 수라도 있어 속은 후련하지" 한다.
이들 목소리 더 크게 하려고 지역에서 같은 노동자가 온다. 시민들이 온다. 그것을 연대라고 한다. 학생들도 온다. 주말이면 한동대 학생들이 농성장 당직을 선다.
왜 싸우느냐는 말에 "나도 인간이니까" 하던 이었다.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배운 것, 하는 일, 심지어 목소리 크기마저 다르다. 차별이 위계가 되고, 어느새 탄압이 된다. 그렇지만 인간으로 사는 권리가 달라서는 안 되니까. 오늘도 이들은 목청을 돋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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