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이 발표됐던 1848년, 조제프 샤를리에는 <사회문제의 해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여기서 진정한 의미의 기본소득이 최초로 제안됐다. 전국의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석 달에 한 번씩 획일적 영토배당금(기본소득)을 지불하자는 주장이었다. 재원은 건물의 유무를 불문하고 모든 토지를 임대해 거기에서 나오는 지대로 충당하자는 게 샤를리에의 생각이었다.
이런 영토배당의 논리는 "토지가 본질적으로 사회 전체의 공동 자산(공유부)"이라는 데 있다. 공동 자산인 토지에서 파생되는 소득을 구성원 모두가 나눠 갖는다는 생각은 이후 그 대상이 차츰 환경, 자원, 문화, 지식, 기술, 데이터 등으로 확대됐다. 그렇다면, 이런 공동 자산(공유부)은 어떻게 배분하는 게 더 좋은 방안일까?
기본소득 담론이 다시 거론되는 이유
조제프 샤를리에가 살던 시대의 복지는 자유방임 자본주의 발전국가의 엄격한 통제 하에 실시되던 공공부조 제도인 구빈법에 국한됐다. 당대가 시장소득의 거대한 불평등과 복지 제도의 미비로 인해 인구의 상당수가 심각한 빈곤으로 고통 받고 있었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해볼 때, 당시의 영토배당금(기본소득) 담론이 얼마나 진보적이고 위대한 사상인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사회보험의 원리가 사회적 자유주의 정치 세력(주로 자유당)에 의해 유럽 각국에서 제도적으로 보급되었고, 특히 1942년 사회보험의 원리에 기반을 둔 <베버리지 보고서>가 정식으로 채택되면서 보편적 영토배당금(기본소득)은 베버리지 사회보장제도에 의해 완전히 밀려났고 외면당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각국에서 발전했던 사회보장에 기반을 둔 복지국가 모델이 1970년대의 여러 어려움과 도전을 극복하면서 조정·심화의 과정을 거쳐 성공적으로 발전하게 되자, 기본소득 담론은 더욱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런데 최근 수년 동안 기본소득 담론은 정치사회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주목도도 높아졌다. 그럴듯한 이유가 제출됐기 때문이다. 첫째, 플랫폼 경제의 진전과 고용의 불안정성 등으로 노동시장의 조건이 이전과 달라졌기 때문에 전통적 노사관계에 기반을 둔 복지국가의 사회보장은 광범위한 사각지대로 제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둘째, 장차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인공지능과 로봇 등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함으로써 일자리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므로 노동(고용)에 기반을 둔 복지국가의 경제-복지 체제가 작동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셋째, 복지 행정의 복잡성과 중복 수혜 등으로 인한 복지국가의 효율성 저하와 도덕적 해이 가능성 등에 대한 문제 제기가 그것이다.
기본소득 제도를 반대하는 이유
17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본소득 담론은 조제프 샤를리에가 기술한 영토배당금의 기초 위에 서 있다.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공동 자산(공유부)을 최대한 활용하고 소득세 인상 등으로 재원을 마련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보편성) 개인적으로(개별성) 조건 없이(무조건성) 매달 지속적으로(정기성) 기본적 생활이 가능할 만큼 충분히(충분성) 현금을 지급하자는 주장이다.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의 실질적 자유가 구현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기본소득의 비전은 매우 진보적인 것처럼 간주된다. 하지만 공동 자산(공유부)이나 소득세 증세 등으로 마련된 재정을 모두에게 현금으로 똑같이 분배하자는 주장은 크게 잘못됐다. 이는 보편적 복지(사회보장)에 비해 덜 진보적이고, 제도의 성능도 크게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기본소득 도입을 반대한다. 혹자는 기본소득이 보편적 복지와 양립 가능하며, 심지어 보편적 복지의 단점을 보완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단언컨대, 이는 기본소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정치적 이유로 국민을 속이려는 것이다. 핵심 논지는 간단하다. 누진적·보편적 조세(증세) 원리에 따라 정부 재정을 충분히 마련한다는 점은 기본소득과 보편적 복지가 동일하다. 환경 관련 세금을 부과하거나 인공지능·데이터를 이용해 큰돈을 번 기업이나 고소득자·부자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걷자는 것도 기본소득이나 보편적 복지나 맥락이 같다. 다른 점은 이렇게 마련한 재정을 어떻게 사용(배분)하는가, 이 부분이다.
보편적 복지는 국민 모두에게 일생에 걸쳐 소득과 사회서비스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말한다. 즉, 보편적 복지는 일생에 걸친 소득 보장과 사회서비스 보장을 의미하는데, 보편적 복지의 소득 보장에는 사회보험과 사회수당이 있다. 사회보험은 소득 단절이라는 사회적 위험에 대처하는 제도적 장치(산재·고용·질병보험·국민연금)이고, 사회수당은 일정한 특성을 공유한 인구에게 정부가 재정에서 매달 현금을 지원하는 제도(아동·장애인·노인수당 등)이다. 다음으로 사회서비스에는 일생에 걸쳐 작동하는 보육·교육·의료·요양과 직업훈련·평생교육·일자리의 보장뿐만 아니라 보편적 주거 보장 정책도 포함된다.
보편적 복지국가는 보편적 복지의 사각지대가 없도록, 즉, ①대상자 모두를 포함하고 ②적정 수준의 보장성을 달성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실질적 보편주의(사각지대 없는 보편적 복지)이다. 선진 복지국가의 사례에서 보듯이 여기에는 큰 재정 지출이 요구된다. 경험적으로 국내총생산(GDP)의 약 25%가 공공사회복지에 지출돼야 이런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복지 지출의 비중이 GDP의 11%로 OECD 평균(20%)의 55% 수준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실질적 보편주의를 달성하는 한국적 복지국가다. 당장 시급한 것은 사회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양질의 고용을 확충하는 일이며, 동시에 우리는 보편적 복지(소득과 사회서비스 보장)의 사각지대를 없애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 20여 년 동안 이 길을 빠르게 달려왔고,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한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나눠주면서도 이 길을 갈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주장은 기존 복지의 상당부분 또는 대부분을 대체하자는 기본소득의 정통 담론보다 훨씬 나쁘다. 국민을 속이는 포퓰리즘이기 때문이다.
이는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보편적 복지와 기본소득은 제도의 작동 원리가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재정 지출을 놓고 경합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각종 사회적 위험에 처했거나 복지 필요가 발생했을 때 실질적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충분한 지원을 받도록 하는 보편적 복지와 작동 원리가 다르다. 그렇다면, 보편적 복지를 사실상 양보 또는 포기하고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을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기본소득은 보편적 복지(사회보장)에 비해 복지 효과가 현저하게 작기 때문이다. 보편적 복지는 누구라도 실업·질병·산재·은퇴·출산·육아 등의 사회적 위험이나 각종 복지(사회서비스)가 필요한 상황에 처했을 때 사회안전망과 복지체제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는다. 가령, 실업의 경우 고용보험의 실업급여가 충분히 지급된다. 우리나라도 월 160만~198만 원을 지급한다. 선진국들은 실업급여의 소득대체율이 훨씬 높다. 그런데 GDP의 10%짜리 부분기본소득(연간 200조 원 소요)의 경우, 지급액은 1인당 월 32만 원에 불과하다. 기본소득은 소액의 현금을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기 때문에 보편적 복지에 비해 필요 충족의 복지 효과가 작다.
둘째, 기본소득은 보편적 복지(사회보장)에 비해 경제 효과가 현저하게 작기 때문이다. 보편적 복지는 경기 침체 때 한계소비성향이 큰 실업자와 경제적 약자들이 충분히 소비할 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한다. 가령, 경기 침체로 실업률이 높아지고 빈자가 많아지면 고용보험과 공공부조 등이 작동해 정부 측에서 가계(시장)로 재원이 이전돼 경기 활성화의 마중물 역할을 하게 된다. 반대로 경기 활성화 때는 고용보험과 공공부조의 지출은 줄고 세금 수입은 늘어나므로 인플레이션 압박이 줄어든다. 사회보장의 경기조절 기능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은 경기변동과 무관하게 언제나 모두에게 소액의 동일 금액을 나눠주므로 소비 진작의 경제 효과가 작고, 경기조절 기능은 아예 없다.
셋째, 기본소득은 보편적 복지에 비해 소득재분배 효과가 작기 때문이다. 누진적 증세를 추진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핵심은 급여 방식의 차이다. 획일적 평등 급여인 기본소득보다 형평 급여 방식인 보편적 복지에서 소득재분배 효과가 더 크다. 게다가 부분기본소득 지급에 사용될 연간 200조 원 중 100조 원은 기존 복지의 구조조정으로 마련한 것인데, 사회적 위험(실업·빈곤 등)에 처한 경제사회적 약자들이 주로 받던 100조 원의 공공복지를 회수해 부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균등 배분하므로 기본소득은 역진적 재분배를 초래한다. 어렵게 마련한 재정을 보편적 복지에 투입하는 것이 기본소득보다 소득재분배에 훨씬 유리하다. 이는 각종 사회적 위험과 복지 필요 상황에 처할 확률이 경제사회적 약자에게서 더 높기 때문이다.
정명이 아닌 각종 가짜 기본소득
최근 수년 동안 기본소득 담론은 기존 복지국가 체제가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펴면서 기본소득 제도 도입의 불가피성을 설파해왔다. 그런데 주요 선진국 중 어느 나라도 기존의 복지국가 체제를 포기하지 않았고, 기본소득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한 적도 없다. 왜냐하면 복지국가의 보편적 복지가 플랫폼 경제의 진전과 고용의 불안정성 등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조건 변화에 능동적·제도적으로 대응하고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가령, 사회보험도 전통적 고용 관계의 임금이 아닌 소득 중심으로 제도의 작동 방식을 바꾸었다. 보편적 복지가 노동시장의 변화 등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사각지대를 없애는 방식으로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획일적 현금 제공은 대안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일자리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라는 공포심 조장에도 불구하고, 장차 예견되는 일자리와 고용 구조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데는 무정부적 기본소득 배분보다 책임성 강한 포용적 복지국가의 재정적 역할(교육·훈련 강화 등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사회서비스 확충 등의 일자리 정책, 인적·사회적 자본 확충, 능력배양과 기회의 평등)이 훨씬 중요하다는 데 이견이 별로 없어 보인다. 또 기존의 복지국가에서 나타나는 복지 행정의 복잡성과 비효율성 문제는 각종 전산시스템의 발전과 인공지능의 활용 등으로 문제의 크기를 줄여나가고 있으며, 중복 수혜나 복지 의존 등의 도덕적 해이도 이후 보편적 복지국가의 보편성과 포용성을 확대하고 지역사회의 참여와 연대 등을 통해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이지, 기본소득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몇 세대 또는 백년 이후, 혹은 그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보편적 복지국가의 작동 원리가 변화된 경제사회적 상황에 더 이상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조건에서 정통 기본소득 담론이 제대로 작동할 것으로 인정된다면, 그때는 거대한 제도 개혁이 불가피하게 이루어질 게 자명하다. 이런 식의 제도 발전과 변천은 역사적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이와 무관하게 최근 우리나라에서 정치적으로 기본소득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보편적 현금 제공의 포퓰리즘인데, 이들은 기본소득의 외피를 쓰고 있다.
기본소득은 국민 모두의 기본 생계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현금 지급으로 좋은 것이나 의도가 선한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기본소득은 고유담론과 무관하다. 기본소득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기본소득이란 용어의 이런 측면, 즉 보통사람들이 기본소득을 일반명사로 이해하는 경향을 악용한다. 가령,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각종 방송과 언론에서 '기본소득은 정책적으로 선하고 의도가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일반명사로서의 기본소득을 홍보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재명 지사가 광고·홍보한 것이 담론·논리적으로 가짜 기본소득이라는 사실이다. 기본소득의 5가지 요건을 모두 갖출 때라야 기본소득 명칭이 허락되는데, 이재명 지사의 기본소득 창작품들은 모두 이들 요건의 일부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소액을 지급하는 푼돈 기본소득
완전기본소득에 따르면, 모두의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GDP의 25%를 똑같이 나눠줘야 한다. 우리나라의 GDP를 2000조 원으로 간주하면, 25%는 500조 원, 5200만 국민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월 80만 원이 된다. 이 금액은 국민기초생활보장의 현금 급여인 1인 가구의 생계급여(52.7만 원)와 주거급여(서울 26.6만 원, 광역시 17.9만 원)를 합한 금액과 비슷하다. 중앙정부의 재정이 512조 원임을 감안할 때, 500조 원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중간 전략으로 1인당 GDP의 10~15%를 지급하는 부분기본소득이 제안됐다. 매달 32~48만 원을 지급하면 부분기본소득이 성립된다. 월 32만 원씩 지급하려면 GDP의 10%인 200조 원이, 월 48만 원씩 지급하려면 GDP의 15%인 300조 원이 필요하다.
6월 5일, 이재명 지사는 페이스북을 통해 "증세나 재정건전성 훼손 없이 기본소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그는 첫해 연간 20만 원으로 시작해 매년 조금씩 증액하여 수년 내에 연간 50만 원까지 만들면 재정 부담은 연간 10~25조 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일반회계예산의 조정을 통해 증세 없이 기본소득을 도입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럴 경우 5200만 국민에게 나눠줄 현금은 첫해 월 1만6000원이고 수년이 지나도 월 4만 원에 불과하다. 그 후에는 증세를 하자는 것이므로 그의 증세 없는 기본소득은 여기까지다. 문제는 월 1만6000원은 부분기본소득인 월 32만 원의 5%에 불과한 '푼돈'이라는 사실이다. 20% 알코올을 소주라고 부른다면, 1% 알코올은 확실히 가짜 소주다.
이재명 지사는 국토보유세로 연간 15~20조 원을 걷어 국민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럴 경우, 국민 1인당 월 2만4000~3만2000원씩 돌아간다. 정부 재정 15~20조 원을 국민 모두에게 나눠주다 보니 이렇게 푼돈이 되고 만 것이다. 이 금액을 모두에게 나눠준다고 해서 우리 국민의 실질적 자유가 구현될 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실질적 자유의 구현이라는 기본소득 담론의 철학과 비전을 상실한 푼돈 기본소득은 가짜임이 분명하다. 배척하는 게 논리적으로 옳다. 왜냐하면 이는 기본소득 담론이 아니면서 기본소득을 참칭해 복지국가의 미래를 망칠 수 있는 포퓰리즘이기 때문이다.
푼돈 기본소득 옹호자들이 정권을 잡게 된다면, 이재명 지사의 주장대로 증세 없이 연간 10조 원 정도는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국민 모두에게 월 1만6000원씩을 나눠줄 수 있게 된다. 연간 10조 원은 전 국민 고용안전망에 지출될 수도 있고, 아동수당의 대상과 지급액 확충에 사용될 수도 있고, 장애인 복지나 노인 복지에 투입될 수도 있는 소중한 정부 재정이다. 이렇게 푼돈 지급으로 쓸 일이 아니다. 보육·교육·의료·요양 등의 사회서비스에는 장차 거대한 재정 소요가 요구된다. 특히 저출산 고령화 시대의 사회서비스는 양·질적 확충에서 엄청난 재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보편적 복지국가의 전례를 따라 우리나라의 상황에 맞도록 정부 재정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사용해야 한다.
2) 연령별로 구획·차별하는 청년기본소득
특정 인구나 집단·계층에 국한해 현금을 지급하는 것은 기본소득이 아니다. 기본소득의 보편성과 무조건성 요건에 어긋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재명 지사의 경기도 청년기본소득은 대표적인 가짜 기본소득이다. 그는 청년기본소득 조례(2018년 11월)에 근거해 경기도에 거주하는 만 24세 청년들 모두에게 지역화폐로 분기마다 25만 원씩, 연간 총 100만 원을 지급하고 있다. 생산연령인구를 연령으로 구획·차별하는 것은 기본소득의 보편성 원칙에 어긋난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청년의 지지(표)를 의식해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게 청년기본소득이란 용어를 정명이 아니라는 인식조차 없이 일반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다.
청년기본소득은 정명이 아니다. 전체 인구에서 수혜 대상으로 청년만을 따로 떼어낼 경우, 이는 기본소득의 보편성 요건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 취업이 안 된 청년이나 사회안전망에 들지 못한 취업 청년을 찾아내 이들에게만 현금을 지원할 경우, 이는 기본소득의 무조건성 요건에 어긋난다. 그런데 최근 생산연령인구를 연령별로 구획·차별하는 청년기본소득이 여의도에 상륙했다. 7월 5일 국민의당 권은희 원내대표는 청년기본소득을 고리로 미래통합당과 정책연대를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19∼34세 청년(가구소득 하위 70%)에게 매달 일정액을 지급하는 선별적 방식이라고 하는데, 이는 기본소득이 아니다.
청년기본소득이라는 형용 모순의 가짜 기본소득을 거론하는 것 대신에 제대로 된 보편적 청년 고용·복지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복지국가의 선진 사례에 의하면, 대학 입학 청년에겐 무상 등록금에 더해 학생수당과 무이자에 가까운 학생대출이 주어진다. 스웨덴은 무상 대학등록금, 월 50만 원의 학생수당, 월 90만 원의 학생대출(졸업 후 25년 내 상환)을 제공한다. 졸업 후 취업을 원할 경우, 누구나 전 국민 고용안전망의 지원을 받는다. 취업할 때까지 직업훈련·취업알선과 함께 수당을 받고, 취업 후 실직하면 고용보험의 실업급여를 받는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청년 고용·복지 정책이 부실하다. 재정의 제약 때문이다. 장차 증세로 마련될 돈은 보편적 청년 고용·복지 정책에 쓰는 게 옳다.
3) 정명이 아닌 재난기본소득과 농민기본소득
이재명 지사는 경기도민 모두에게 10만 원씩 지급하면서 재난기본소득이란 이름을 붙였다. 코로나19 재난 상황에서 정부가 돈을 푸는 것은 확장 재정정책이다.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지자체들도 이런 돈 풀기 정책을 재난지원금 또는 이와 유사한 명칭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재명 지사는 고집스럽게 재난기본소득이란 명칭을 사용·홍보했고, 정치적으로 큰 이득을 봤다. 국민들이 재난으로 어려울 때 정부가 나눠주는 현금(아주 좋은 것!)을 기본소득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일반명사로서의 기본소득을 확산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재난지원금은 재난기본소득이 아니다. 따져보자. 정부와 상당수 지자체들이 지급했던 재난지원금은 가구 단위의 일시적 지원이므로 기본소득의 핵심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 또 많은 지자체들은 소득하위 50%에게만 지급했다. 그런데 경기도는 모든 개인에게 10만 원씩 지급했다. 이는 기본소득의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의 원칙에는 부합한다. 하지만 정기성과 충분성의 원칙에는 어긋난다. 일시적 현금 지급은 정기성의 원칙에 위배되고, 10만 원을 12개월로 나눈 월 8300원은 충분성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재난기본소득은 정명이 아니다.
이재명 지사의 경기도는 농민기본소득 조례안을 통해 농민기본소득을 도입할 예정이다. 농민기본소득도 정명이 아니다. 거론되는 금액(월 5만 원)은 기본소득의 충분성 요건에 부합하지 않고, 무엇보다 모든 인구 중에서 농민만을 구획해 현금을 지급하는 것은 기본소득의 보편성 요건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농민수당’이 올바른 명칭이다. 실제로 농민수당을 지급하는 지자체들이 늘고 있다. 농촌의 인구 감소와 지역의 소멸을 막으려는 노력이다. 지속 가능한 농업・농촌과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농을 보호・육성하기 위해서는 농민수당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농민수당에 대한 지난해 보건복지부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심의 결과를 보면, "농업인 소득안정망 확충을 위한 국가의 정책 방향에 부합하고, 농업 인구의 지속적 감소 및 소득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한 지자체 차원의 사업 추진 필요성을 인정"한다고 했다. 농업이 공익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으나 이 부분이 시장 가격에 반영되지 못하므로 농민수당을 통해 이를 보상하려는 것이다. 농민수당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지급하는 게 아니라 농민에게 지급하는 것이므로 기본소득의 보편성의 요건에서 벗어난다. 또 농촌·농업의 공익적 역할을 수행하는 농민에게만 조건부로 지급하는 것이므로 기본소득의 무조건성 요건에서 이탈해 있다.
기본소득 담론, 포퓰리즘의 도구돼선 안 된다
이재명 지사의 경기도 발 기본소득 정책들은 모두가 기본소득 담론의 정명이 아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가짜 기본소득이다. 그는 청년기본소득, 재난기본소득, 농민기본소득, 그리고 푼돈 기본소득을 조례나 정책 제안으로 제출했고, 경기도 홍보비를 이들 기본소득 광고에 아낌없이 지출했다. 온 국민에게 정명이 아닌 가짜 기본소득을 설파했던 것이다. 가짜를 앞세운 포퓰리즘이 진실을 이길 순 없다. 여의도 정치권도 깊게 성찰하길 권한다. 지속 가능한 보편적 복지국가의 미래를 준비할 시간이 우리에게 많이 주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가짜 기본소득들의 공통점은 일부 인구만을 대상으로 큰 예산을 들이지 않은 방식으로 진행될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청년기본소득, 농민기본소득 등의 특정 직업군 기본소득(특고기본소득 등), 생애선택 기본소득, 푼돈 기본소득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연간 10~20조 원의 재정으로 기획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부분기본소득의 연간 200조 원에 비하면 20분의 1에서 10분의 1에 불과하다. 정치적 힘을 가진다면, 이 정도의 재정(GDP의 0.5~1%)은 충분히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푼돈 기본소득은 복지국가가 추구해야 할 실질적 보편주의라는 보편적 복지국가의 길을 경합적으로 방해한다. 이것이 정명 아닌 가짜 기본소득이라는 포퓰리즘을 정치 과정에서 배격해야 할 이유이다.
나는 기본소득 담론의 진짜 옹호자들이 내부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의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과 거리가 먼, 기본소득 담론의 5대 요건에서 본질적으로 하나라도 위반된 온갖 종류의 가짜들을 배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짜 기본소득으로는 기본소득의 본질적 비전을 달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본소득 담론의 진정성마저 왜곡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좌파든 우파든, 기본소득은 부분기본소득 또는 완전기본소득을 정공법으로 제시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를 대체하는 기본소득 국가로 전환되든 그렇지 않든, 정명과 정공법은 어떤 식으로든 바람직한 제도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짜와 편법이 아닌 정명과 정공법이 중요한 이유이다.
※ 이 칼럼은 2020년 7월 30일 류성걸 미래통합당 국회의원 주최로 열린 '기본소득의 모든 것' 토론회에 제출된 필자의 글을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혀둔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