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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사이다 정치 해설' 좋아하는 당신, 뉴스의 '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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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사이다 정치 해설' 좋아하는 당신, 뉴스의 '팬’입니까?

[오찬호의 틈새] 팬덤정치 그리고 팬덤언론

한국사회는 뉴스를 통해 사회를 보는 눈을 기르기 매우 어려운 구조다. 얼핏 생각하면, 내가 종일 뉴스 화면을 틀어놓는 것만으로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현상의 맥락을 깊게 추론하는 게 가능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선 제대로 된 시사평론을 만나기가 어렵다. 이슈를 냉정하게 관찰해 사회의 미래에 바람직한 방향을 중립의 유혹을 떨쳐내고 제기하는 게 시사평론이지만, 방송에서 그런 주장을 했다가는 한쪽의 입장만 대변했다며 욕만 먹는다.

발끈하는 이유는 일반적인 시사평론의 색깔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사평론은 대부분 변호사의 몫이다. 관련 법 조항이 있는지, 처벌은 가능한지, 처벌한다면 수위는 어떤지를 명료하게 (냉정히 말하면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식인데, 평론이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다. 여기에 익숙해진 뉴스 시청자들에게 누군가의 진중한 평론은 종이 아니라 횡으로 이해된다. 깊이는(종) 보이지 않고, 중립이라는 가운데를 지키지 않고 옆으로(횡) 벗어난 상황으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답답하지만, 한국의 뉴스 지형이 정치평론가들에게 과도하게 의지하고 있는 걸 보면 이해가 된다. 이론적으론 정치가 시사의 상위 범주니까 정치평론가가 시사를 해부하는 게 문제될 건 없다. 세상일 모든 게 정치의 원인이거나 결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차원에서 시사를 풀어내는 정치평론가는 인기가 없다. 방송국의 부름을 받으려면 정치의 진영논리를 철저히 대변해야 한다. 시사가 여기에 연결되어 해석되면 틀린 정책도 때론 옳고, 옳은 정책도 때론 틀리게 된다.

그런데 진영을 대변하는 자를 한 명만 부를 수 있겠는가. 이쪽, 저쪽을 다 부른다. 치열하게 싸우기라도 하면 보는 재미라도 있겠지만 어차피 교집합을 찾을 목적이 서로에게 전혀 없기에, 자기 할 말만 한다. 자신이 맡은 당의 행보를 어떻게든 정당화하고 당에 소속된 유력 정치인들의 발언을 억지로 옹호한다. 그게 다다. 아침부터 밤까지 말이다. 그래서 종일 뉴스를 틀어놓아도, 내용의 깊이가 한 걸음 나아가기도 힘들다. 남는 건 기계적 균형론이다. 그래서 무엇을 강하게 주장하는 시사평론가의 평론이 들리지 않는다. 왜 우리 편은 안 나오냐면서 발끈할 뿐이다.

감시견, 경비견 그리고 애완견

유튜브 속의 뉴미디어들은 좀 다를까? 횡이 아니라 종으로 다가가는 모양새는 분명 있다. 그런데 늘 그런 건 아니다. 종으로 가도 될지 안 될지는 지지자들이 판단한다. 환영하면, 한없이 파고들어도 된다. 반대편을 적으로 묘사해도 어차피 지지자들만 있는 곳이라 하나도 문제 될 게 없다. 매번 무탈하니, 허황된 음모론이 섹시한 추론 능력으로 둔갑하고 혐오 가득한 조롱이 풍자식 유머를 가장한다. 놀라운 건, 그곳에선 그래야만 인기가 치솟는다.

하지만 허락하지 않은 주제를 건드리는 순간 나락을 경험할 각오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평소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평론가라 할지라도 성차별에 대해서는 횡의 범위를 잘 지켜가며 뜨뜻미지근하게 횡설수설하면 장기근속에 유리하다. 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할 말'만' 해야 사랑받는다. 이곳은 듣기 싫은 말은 절대 안 듣는 곳이기 때문이다. 반대 의견이 어디서 꿈틀거리지도 않는다. 그래봤자 밟힌다는 걸 잘 알기에, 그럴 사람들은 구구절절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떠난다. 비판의 공론장이 없으니, 구성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른다. 그러니 자기들끼리, 우리는 옳다면서 좋아 죽는다. 이게 몇 바퀴 순환하니, 어느 순간 강력한 결속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공동체가 된다.

가끔은 종교 같다. 특히 그 공간의 유일한 발화자를 너무 사랑하는 모습에선 말이다. 한 명에게 쏠린 시스템에서, 그 한 명은 항상 멋지다. 당당하다. 호쾌하다. 거대 권력 앞에서도 유쾌하다. 어찌 매력이 없겠는가. 그러니 많은 것들이 사소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심각한 발언은 작은 실수라며, 위험한 음모론은 약간의 비약일 뿐이라면서 면죄부를 얻는다. 내부 시스템이라도 이런 문제를 잡아내야 하지만, 한 명이 독점한 언론에선 유기적인 성찰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오히려 혼낼 사람을 지목해 앞에 앉혀둔다. 그리고 가르친다. 이제 알겠냐면서.

1인 독주곡만 강렬하게 울려 퍼지는 방에서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환호한다. 그 스타성에 매료된다. 그래서 외부의 비판에 대단히 해괴하게 반응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부럽냐?"는 거다. 세상에나. 그런 반응이 있었던가. 언론처럼 행동할 거면, 언론다워라는 비판을 질투심 운운하며 반론하는 모습 말이다. 너무 낯설다. 나는 조선일보를 비판하고 '극좌'라는 소리도 들었고, 한겨레를 비판하고 '무늬만 좌파'라는 비아냥거림도 마주했었지만 시기하냐는 질문을 받지는 않았다.

▲'김어준의 뉴스뵈이다'에 출연한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 ⓒ김어준의 뉴스뵈이다 갈무리

부러워서 저런다는 망측한 논리는 자연스레, "네가 그런다고 같은 급이 되는 게 아니야"라는 무례한 문장으로 이어진다. 말이나 되는 소리라면 따지기라도 하겠지만 너무 황당하다. 대통령 급이 되고 싶어서 대통령을 비판할리 없지 않겠는가. 그건 상식이다. 하지만 저 바닥에서의 상식은 다르다. 비판하면, 네가 000인 줄 아느냐는 반응이 돌아온다. 000처럼 인기 얻고 싶어서 그러냐고 한다. 그런 공간에 출연하는 패널들은 자기편 도와준답시고 이렇게 내뱉는다. 도대체 그 사람 누구냐고. 그럼 지지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아, 듣보잡이구나. 열등감에 저랬구나, 깜도 안되면서 설친 거구나.

이 공동체가 특별한 경우엔 강력하고 거대한 감시견(watch dog)이 되어 권력의 빈틈을 찾는데 큰 공헌을 할 수도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를 내란이라는 퍼즐로 맞추는데 새로운 워치독 집단의 활약은 분명히 컸다. 탄핵 선고가 나오기 전까지 기계적인 균형을 맞춰가며 지난한 토론을 유도했던 언론사가 꽤 많았음을 생각하면, 사건의 본질만을 지독하게 파고들었던 유튜브 언론의 공은 높이 평가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문제는 공이 크면, 공에 취해 감시견이 한순간에 경비견(guard dog)으로 돌변한다는 거다. 한국의 현대사가 워낙 굴곡이 강한 만큼, 때로는 보수매체가 때로는 진보매체가 감시견으로서 큰 활약을 했다. 말인즉슨, 경비견으로 변질된 언론이 그만큼 많다는 거다. 그래도 그 언론을 진정으로 사랑한 지지자만큼은 그런 모습을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더 이상 진정한 보수를 대변하지 않는다거나, 한겨레는 왜 초심을 잃었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유튜브 언론을 '종교처럼' 지지하는 이들은 좀 다르다. 스스로가 경비견이 되어 전선을 구축하고 경계를 넘는 이들을 단죄한다. 비판의 내용을 따질 생각은 없고 비판자의 흠집을 들춰내기 바쁘다. 본인들은 투사적이라고 믿겠지만, 한 걸음만 떨어져 보면 주인에게 사랑받으려는 애완견(lapdog)의 모습 아닌가. 언론이 '짖지 않는' 랩독이 될 때 그 사회는 죽은 사회나 다름없는데, 언론의 소비자마저 진영 따져가며 비판 논리를 펼치는 게 어찌 별일 아니겠는가. 비판적인 뉴스를 듣는 소비자가 가장 비판적인 감시자로 거듭나야 사회는 좋아질 건데, 팬클럽 안에서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오찬호

오찬호 작가는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2년 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례에 어떤 사회구조가 얽혀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다. 자기계발 강박이 능력주의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어그러트리는 모습을 추적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2015), 경쟁사회의 내면을 파헤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2018)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최근작으로는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2024), <납작한 말들>(202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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