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을 찬성하는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비슷한 이유로 반대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비틀어보았다.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논리 가운데 ‘사회주의 배급제’와 기본소득을 같이 보는 낡은 시각을 제외하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많이 거론된다. 기본소득은 돈이 너무 많이 드는 정책이라 현실성이 없고 도입될 경우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준다. 또 기본소득처럼 모두에게 ‘소액’을 분배하는 정책보다 그 돈을 모아 ‘진짜 힘든 사람’에게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기본소득 반대 논자들이 공통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은 이 논리의 극복이 기본소득 실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
지난 7월 23일, 국회 대정부 질의 이틀째 경제 분야 질의에서 조정훈 의원(시대전환)이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에게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때 홍 부총리가 대답한 내용도 위에서 짚은 이유와 상통했다. 홍 부총리는 코로나19 사태 초기 ‘재난기본소득’ 논의가 부상했을 때부터 기본소득에 대해 일관된 반대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다. 이날 홍 부총리가 답변한 내용들은 이러하다.
이날 홍 부총리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기본소득을 반대했다. 첫째, 재정 부담. ‘국가 예산의 3분의 1이 복지 예산’인 상황에서 막대한 재정이 드는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것은 무리이다. 둘째, 효과 부족. 한정된 재원을 더 힘들고 어려운 국민을 잘 선별해서 지급하는 것이 같은 돈을 1/n으로 지급하는 것보다 효과적이다. 셋째, 시기상조. 아직 도입한 다른 나라가 없으므로 우리가 먼저 실험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홍 부총리의 ‘3불가론’은 국가 재정과 세수를 관리하는 신중한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홍 부총리의 인식과 의견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첫째, 기본소득 도입은 재정에 너무 큰 부담인가?
먼저, 홍 부총리가 말한 것처럼 한국은 정말 ‘국가 예산 520조 가운데 3분의 1을 복지 예산으로 쓰는’ 나라인가? 2020년 국가 재정 총지출은 531조다(2차 추경 기준). 재정 총지출을 12대 분야로 나누면 보건·복지·고용 분야에 배분된 재원은 185조다. 이것이 홍 부총리가 말하는 ‘사회복지 예산’이다. 이렇게 보면 홍 부총리가 말한 대로 우리나라가 국가 예산의 3분의 1보다 많은 돈을 복지에 쓰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는 개념상 혼란이 있다. ‘재정’과 ‘예산’은 다르다. 재정은 예산보다 큰 개념이다. 국가 재정은 주로 세금으로 조성된 예산과, 별도의 적립 방식을 가진 ‘기금’으로 구성된다. 재정은 ‘예산 + 기금’이다. 우리나라가 2020년에 지출하는 531조 가운데 예산 지출은 367조이고 기금 지출은 164조이다(국회예산정책처).
기금은 국가 재정의 울타리 안에 있지만 별도의 회계로 운영된다. 특히 사회보험성기금의 경우 수입은 가입자의 기여금이고 지출은 가입자에게 지급하는 보험금이다. 이 기금을 국가는 관리할 뿐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 보건·복지·고용 분야 지출 185조에도 기금 관련 지출이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국민연금기금이다. 2020년 국민연금기금의 예상 지출은 27.4조다. 고용보험기금의 지출은 16.5조, 산재보험기금이 7조다. 사학연금기금, 공무원연금기금, 군인연금기금의 지출도 고려해야 한다. 이 돈을 다 합친 사회보험성기금 지출은 80조 정도다. 이 기금은 가입자가 재정을 부담하며 정부는 기금 관리 외에는 거의 부담하는 게 없다.
그렇다면 남은 105조(185조-80조)가 정부가 보건·복지·고용 분야에서 순수하게 예산으로 지출하는 돈, 즉 세금을 거둔 수입에서 지출할 수 있는 규모다. 그렇다면 홍 부총리가 말한 ‘복지 예산’은 국가 재정 총지출 가운데 약 19%(105조/531조*100), 총지출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복지 예산’ 가운데 현금 지급만 놓고 보면 규모는 더 작다. 생계급여, 의료급여, 아동수당, 기초연금, 장애인연금 등을 합하면 27조 남짓이다. 고용촉진, 취업촉진 등의 목적으로 다양하게 지급되는 현금 급여들을 다 합쳐도 2020년 본예산 기준으로 54조 정도다(여기에는 고용보험에서 지출되는 실업급여는 포함되지 않는다). 올해 5월에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추경으로 14조 규모의 정부재난지원금이 편성되었다. 이와 함께 코로나 대응 목적의 몇몇 선별적 현금 지원을 합치면 2020년의 ‘현금 복지’는 약 70조 규모다. 재정 총지출에 비교하면 13%, 복지 지출(185조)에 비교하면 37% 수준이다. 일부 언론은 현금 복지가 국가 재정을 고갈시키는 것처럼 떠들지만 실제는 겨우 이만큼이다. 보건복지부에 의하면 국가 복지 지출 가운데 현금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OECD 국가 평균은 60%이고 우리나라는 40%다. 현금 지출 비중을 GDP에 대비해서 보면 더 초라해서 우리나라는 4.2%로 꼴찌인 멕시코 바로 앞에 있다.
복지 예산이라는 말을 사회보험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느슨하게 쓰더라도 한국의 복지 현실이 매우 취약하다는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2019년 한국의 GDP는 1919조이므로 보건·복지·고용 분야 지출 185조는 GDP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2018년 기준으로 OECD 국가들의 GDP 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은 평균 20%이며 우리나라는 11%로 칠레, 멕시코와 함께 최하위권이다(보건복지부). 결론은, 한국이 비슷한 경제 규모의 국가들 수준으로 국민 삶의 질을 높이려면 복지 지출을 ‘혁명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 도입에 재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미 충분히 많은’ 복지를 전제로 두고 풀어갈 게 아니라, 복지 지출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그 지출의 어느 정도를 기본소득에 배분할지’ 논의해야 하는 문제다.
둘째, 선별적 지급이 더 공정하고 효과적인가?
재원을 일부 빈곤층에만 선별 분배할 경우 지원에서 배제된 중산층이 반대하면서 분배 규모가 오히려 줄어드는 ‘재분배의 역설’에 대해서 이미 많은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지적했다. 여기서는 선별적 지급 논리가 가리고 있는 현실, 작금의 조세·재정 구조가 전혀 공정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려 한다. 복지 지출에 재원이 극히 작게 배분되는 상황을 교정하지 않고서 그 작은 재원을 ‘전 국민에게 5만원씩 줄 것이냐 빈곤층에게 100만원 줄 것이냐’ 하는 식의 협소한 논점에 가두어 선택을 강요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홍 부총리가 말한 것처럼 재정 부담 때문에 당장 기본소득을 도입하기 어렵고 또 선별 지원이 불가피할 정도로 재원이 한정적이라면, 우선 정부 재정을 획기적으로 증대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곧 증세를 추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부는 증세 의지를 전혀 보이고 있지 않다. 이는 7월 22일 정부가 발표한 세법 개정안에 명백히 드러난다. 일부 긍정적인 개선 시도는 있었다. 10억 초과 소득에 과표구간을 신설하고 45% 세율을 부과하여(기존에는 5억 초과 42% 세율) 고소득자 ‘핀셋 증세’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세법 개정안은 상장주식 양도차익에 대해 5천만원까지 비과세하기로 하고 종합부동산세 부과 대상자는 최상위 1%인 51만 명에게 국한했으며 소득세 세액 공제와 감면 범위를 더 늘렸다. 고소득자에게 많은 이익을 줌으로써 소득 역진성의 문제가 컸던 소득세 공제·감면 제도를 폐지하거나 축소하라는 요구는 이번 개정안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한겨레’에 따르면 이번 세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5년 간 세수는 올해를 기준으로 볼 때 오히려 줄어든다고 한다.
복지 지출을 늘려야 하는 마당에 세수를 감소시키는 세제 개편을 추진하고,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에 주저하며, 역진적이고 불공정한 소득세 공제·감면제도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 도입의 재정 부담 논쟁이나 ‘재정 제약’을 전제로 한 복지 효과 논쟁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지점에서는 기본소득 지지자나 기존 복지 제도 지지자는 힘을 합쳐야 한다. 양쪽 논자들 모두 한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한국 복지 지출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을 ‘증세 정치’를 촉발하는 정치적 도구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은 ‘재정환상’을 깸으로써 재분배의 역설을 극복한다.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세금이 올라도 국민 절대 다수가 순수혜자가 되기에, 증세를 정치적으로 관철하기가 선별 복지에 비해 훨씬 수월해진다. 기본소득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바탕으로 적극적 증세에 나서고, 이를 기본소득 재원과 다른 복지 서비스의 재원으로 함께 사용하면 된다.
셋째, 기본소득이 어느 나라에도 도입되지 못한 가운데 우리가 먼저 시작하는 건 시기상조인가?
코로나 19 대응에서 한국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방역의 성공 덕분이 크다. 그러나 국민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이 ‘정부 재난지원금’이 도움이 되었다고 답하는 건(김승섭·이승윤, 2020) 무엇을 시사하는가? 비슷한 시기 다른 나라들도 천문학적 규모의 금융 지원과 재정 지출을 시도했지만 한국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IMF에 따르면 한국은 GDP 대비 1.2%의 재정을 투입했고 독일은 4.4%를 투입했는데, 성장률 전망치는 한국은 –2.1%이고 독일은 –7.8%다(2020년 6월). 한국이 선방한 데 봉쇄 없이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모든 가구에 동일한 금액을 일시 지급’한 재난지원금 즉 재난기본소득이 효과가 있었다고 추론하는 게 합리적이다. 만약 시민들이 재난기본소득의 신속한 지급을 요구할 때 기획재정부가 ‘현금 지급은 안 된다, 전국민에게 주는 건 안 된다, 소득 70%까지만 지급하자’라며 딴지를 걸지 않았다면 더 빨리 지급되어 코로나 대응 효과가 더 컸을지도 모른다.
전례 없는 시기에는 전례 없는 정책 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재난지원금의 성공적 효과는 그 실험 정신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이보다 확실한 기본소득 실험 효과를 어느 나라가 확인했겠는가? 누구도 지금 당장 최대 수준의 기본소득을 지급하자고 하지 않는다. 14조 규모의 ‘재난회복기본소득’(유종성, 2020)을 코로나로부터 경제가 회복될 때까지 상·하반기 한 차례씩 계속 지급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한국은 코로나 위기를 기회 삼아 방역과 경제 활동에 성공함으로써 글로벌경제의 선두 주자로 치고 나가고 있다. 위기 극복의 핵심 정책인 재난기본소득을 발전시켜 실행해나간다면 한국은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선진국으로 설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 불가론의 이면에는 사실은 용기 부족과 과거 방식의 집착이 있다. 적극적 증세와 재정 확대를 주저하는 심리, 불공정한 조세·재정 제도를 바로잡으려는 단호함의 부족,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창조적 실험 결과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도그마티즘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모두의 것은 모두에게 돌려주자’는 단순명쾌한 철학에서 출발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사회가 공유한 부에서 나오는 평등한 권리다. 기본소득은 공정하고 효율적인 조세·재정구조를 수립하고 과감한 증세를 이끌어내 복지혁명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자 경로다. 기본소득은 정의롭고 필요하며 실현가능하다. 재정이 있어야 기본소득을 도입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기본소득을 도입함으로써 증세와 재정 확대를 더 잘 할 수 있다는 인식 전환이 요구된다.
홍 부총리는 23일 대정부 질의 중에 기본소득 불가론을 언급하면서도 “장기적으로 논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국회 차원에서 논의가 시작되면 참여하겠다”고도 했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은 ‘기본소득공론화위원회’를 설치하여 기본소득의 쟁점과 전망을 국민과 함께 논의하자고 제안하였고 관련 입법을 준비 중이다. 기본소득 논의에 참여하겠다는 홍 부총리와 기본소득공론화위원회에서 더 많은 대화를 하기를 기대한다.
오준호 용혜인 의원 비서관은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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