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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살 부인하는 전두환을 단죄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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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살 부인하는 전두환을 단죄하는 방법

[기고] 이제라도 특별법 만들어 정식 수사해야

1980년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민중항쟁(공식 용어로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오늘로 38주년을 맞이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은 "광주 민중 학살의 주범은 전두환"이라고 끊임없이 주장하며 단호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어떤 정권도 이 문제로 그를 법정에 세우지 않았다. '결정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전두환은 지난해 4월 장남 전재국이 대표로 있는 출판사(자작나무숲)를 통해 <전두환 회고록>(전 3권)을 펴냈다. 1권 <혼돈의 시대>는 광주항쟁의 실상을 왜곡하고 시민군을 모독하는 내용 투성이였다. 5·18기념재단 등이 "5·18 단체들과 희생자들의 인격권을 침해했으니 그 부분들을 삭제하지 않고서는 출판·배포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법원에 제기한 가처분신청이 8월에 받아들여졌다. 전두환 부자는 같은 해 10월, 삭제 명령을 받은 부분들만 검게 가린 채 다시 회고록을 발간했다. 5·18 관련 단체들은 이번에도 무려 40곳의 내용이 '허위' 또는 '가공'이라는 이유로 출판·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바로 이런 대목들이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학살해 암매장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한 목적은 북한 지령을 받고 미전향장기수 등을 해방하여 폭동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계엄군과 시위대의 충돌은 무장한 시민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공수부대의 자위권 발동이었다."

"나는 광주에서 진행되는 작전상황과 관련해 조언이나 건의를 할 수조차 없었다."

법원은 지난 14일 "5·18 관련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는 40곳을 삭제하지 않고서는, 출판·배포해서는 안된다"고 판결했다.

전두환은 왜 이렇게 후안무치하고 지각이 없을까? '회고록'에 자신이 쓴 내용들이 역사에 길이 남기를 바라기 때문일까? 그는 이미 1996년 1월 14일, 내란 및 반란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12월 16일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듬해 4월 17일 대법원이 확정한 2심 판결 내용은 어마어마하다. "반란수괴, 반란모의 참여, 반란 중요임무 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 이탈, 상관살해 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 참여, 내란목적 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 김영삼 정권이 옥살이 2년 만에 사면하지 않았다면 전두환은 지금도 무기징역을 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인물이 아직도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국민의 세금으로 공식 경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비극적 희극'의 표본이다.

지난해 광주항쟁 37주년 기념일을 전후로,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들을 살육했다는 증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공중에서 헬기가 조준사격을 했으며, '광주 출격'을 위해 몇몇 공군기지에서 전투기들이 대기명령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올해에는 전두환이 광주 발포명령의 장본인이라는 간접 증언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 505보안부대 핵심 수사관으로 일했던 허장환(70)의 발언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지난 15일 이렇게 밝혔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를 다녀간 뒤 그날 밤 자위력 구사라는 미명 하에 발포명령이 내려졌다는 말을 상관인 S중령에게 직접 전해 듣고 실탄 무장 지시를 받았고 실제 실탄도 받았다."(연합뉴스 5월 16일자). '전남·북 계엄분소 합동수사단 광주사태 처리수사국 국보위 특명단장'이던 그는 1988년 12월 6일 서울 여의도의 옛 평화민주당 당사에서 "광주사태의 사전 조작 및 발포 책임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양심선언을 한 바 있다.

정석환(전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직무대리)은 1995년 12월 전두환·노태우 사건과 관련해 검찰에서 조사를 받으며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1980년 5월 22일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 11공수여단장 최웅에게 격려금 100만원을 전달하라고 나에게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5월 22일은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최초로 발포한 다음 날이었다.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 국군보안사령관으로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탈취한 '신군부'의 우두머리였다. 명목상의 대통령은 최규하였고, 계엄사령관은 이희성이었지만 전두환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광주 시민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지난 38년 동안 광주 학살에 대해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5·18유족회의 집계에 따르면, 항쟁 당시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은 65명이었다. 부상했다가 숨진 사람은 400명이 넘는다. 군경 사망자는 27명인데, 군인들끼리 벌인 오인전투 사망자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계엄사는 광주항쟁과 관련해 2,500명이 넘는 시민과 대학생을 체포해 600명 이상을 검찰에 송치했다. 이런 민족적 참극의 주범을 가려내어 엄중히 처벌하는 것은 입법·행정·사법부가 함께해야 할 역사적 과업이다. '광주 민중 학살 주동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 야만적 범죄를 단죄하는 작업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 5.18 관련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는 40곳을 삭제하지 않고서는 출판과 배포를 할 수 없다는 법원의 결정이 나온 전두환 회고록.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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