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고위급 회담 무기한 연기"(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 명의 통지문), "조미 수뇌회담(북미 정상회담) 재고려"(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 담화).
북한이 16일 남한과 미국을 향한 경고 메시지를 내놨다. 지난 1월 김정은 국무위원장 신년사로부터 시작된 한반도 정세 변화에 급제동을 건 것이다.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인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핵화 협상의 판을 흔들려는 시도로 보인다.
북한은 우선 한미 공군의 연합 훈련인 '맥스선더(Max Thunder)' 훈련을 "판문점 선언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며 조선반도 정세 흐름에 역행하는 고의적인 군사적 도발"로 규정했다. (☞관련 기사 보기 : 북한, '맥스선더' 비난하며 돌연 고위급회담 무기한 연기)
최근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가 국회에서 저서 출판 기념 간담회를 진행한 점도 문제 삼았다. "최고 존엄과 체제를 헐뜯고 판문점 선언을 비방중상하는 놀음"이라는 것이다.
맥스선더 훈련이 '남북간 군사적 긴장 완화' 조항을 담은 '판문점 선언'과 충돌한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이번 훈련에는 F-22 전투기 8대가 처음으로 참여하고, 미 전략폭격기인 B-52 전개도 예정된 것으로 알려져 북한을 자극했을 개연성이 크다.
북한으로선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예고하고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가입을 시사하는 등 비핵화를 위한 성의를 보였음에도, 한미가 전략자산까지 동원한 군사훈련을 진행한 대목은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쌍방적 조치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김정은 위원장이 예년 수준으로 한미 군사훈련을 하는 것은 이해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예년 수준을 넘어선) 훈련을 했기 때문에 반발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지난 11일에 시작된 훈련을 닷새가 지난 뒤에 문제 삼은 점은 납득이 어려운 측면도 있다. 또한 북한은 태영호 전 공사를 "인간 쓰레기"라고 맹비난했지만, 민간인 신분인 그의 출판 관련된 활동을 정부가 단속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북한이 모르는 것도 아니다.
이에 따라 북한이 맥스선더 훈련 등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우며 고위급 회담을 무기한 연기한 데에는 우리 정부에 모종의 경고 메시지를 던진 포석으로 보인다.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쥐는 한편, 문재인 정부를 통해 미국의 고압적 태도를 제어하려는 다목적 카드라는 것이다.
앞서 북한은 지난 1월에도 별다른 이유 없이 평창 동계올림픽 계기 예술단 사전점검단의 방남 계획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한 적이 있다.
굴욕 협상 강요한 볼턴...북한 이유있는 항변
보다 직접적인 북한의 불만은 김계관 부상의 담화를 통해 나온 '대미 메시지'로 표출됐다. 김 부상은 "대화 상대를 자극하는 망발", "불순한 기도의 발현", "사이비 우국지사" 등 상당히 과격한 언사를 동원해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맹비난했다. (☞관련 기사 보기 : 북한, 강경파 볼턴에 '직격탄'…북미 협상 '판흔들기')
볼턴 보좌관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함께 북미 정상회담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참모다. 북한을 두 번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큰 틀의 의견 조율을 나눴던 폼페이오 장관과 달리, 볼턴 보좌관은 'PVID(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선결조건으로 거론하며 북한을 자극하는 강경 발언을 쏟아내왔다.
볼턴 보좌관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함께 북미 정상회담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참모다. 북한을 두 번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큰 틀의 의견 조율을 나눴던 폼페이오 장관과 달리, 볼턴 보좌관은 'PVID(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선결조건으로 거론하며 북한을 자극하는 강경 발언을 쏟아내왔다.
특히 그는 지난 13일(현지시간) 방송 인터뷰를 통해 "북한 내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 재처리 능력이 완전히 제거돼야 한다"면서 "모든 핵무기를 처분하고 해체해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에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리비아 핵폐기 때처럼 북한이 보유한 모든 핵무기와 핵물질을 '핵무기의 무덤'으로 불리는 미국 오크리지 연구소로 가져와 완전히 폐기하겠다고 공개 선언한 셈이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볼턴 보좌관은 NSC 보좌관에 정식 임명되기 전인 지난 3월 23일에도 자유아시아방송(RFA)와의 인터뷰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테네시주 오크리지의 안보단지 창고에 리비아 핵 시설물을 보관하는 것과 비슷한 핵 폐기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볼턴 보좌관의 매파적 '소신'은 폼페이오 장관이 두 차례 방북을 통해 북한과 큰 틀에서 합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핵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뒤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며 환영 입장을 냈던 분위기와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한미 언론이 볼턴 보좌관의 발언에 주목해 '리비아식 해법'을 트럼프 정부의 공식 입장처럼 기정사실화하자 이에 자극받은 북한이 단속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실제로 '리비아식 해법'은 북한이 수용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조지 W 부시 정부 시절이던 지난 2003년 핵프로그램 폐기 협상을 미국과 진행한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드 카다피는 2004년 초부터 핵 및 탄도미사일 관련 문서와 장비들을 미 오크리지 국립연구소로 넘겼다.
핵 포기의 대가로 카다피는 안전 보장조치를 원했지만 과정은 더뎠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과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와 장비 1000톤을 미국에 넘기는 등 모든 핵프로그램을 폐기한 뒤인 2006년에 가서야 테러지원국 지정과 경제 제재 해제 조치를 얻을 수 있었다.
어렵게 얻은 '당근'은 오래가지 못했다. 카다피는 2011년 본격화된 '아랍의 봄' 사태 때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지원을 받은 반군에 의해 사살되는 무참한 최후를 맞았다. 미국 정부는 리비아 민주화 운동의 여파에 의한 결과라는 입장이지만, 핵무기 개발을 포기한 "치명적 실수"(<뉴욕타임스>의 표현)로 정권 유지에 실패한 지도자의 최후라는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카다피의 비극적 운명을 본 북한은 2011년 "'리비아 핵포기 방식'이란 바로 '안전담보'와 '관계개선'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상대를 얼려넘겨 무장해제를 성사시킨 다음 군사적으로 덮치는 침략방식"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북한 입장에선 볼턴 보좌관이 주장하는 '리비아식 해법'이 '최고 존엄'과 체제의 명운을 미국에 저당잡히고 발가벗은 채 굴욕 협상을 하라는 모욕으로 해석될 수 있다.
미국 내에서도 볼턴 보좌관이 주장하는 리비아식 해법으로는 북미 정상회담에서 생산적인 결과가 나오기 어렵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북한은 김계관 부상의 담화를 통해 리비아식 해법 거부 입장을 분명히 하고, 볼턴 보좌관을 겨냥한 '말폭탄'을 퍼부으며 북미 정상회담을 재고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실제로 협상의 판을 깨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미 협상에서 볼턴 보좌관의 영향력을 제어하려는 '작심 반격'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북한의 메시지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위험한 협상'을 즐기며 회담장을 박차고 나올 수도 있다고 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판 흔들기'에 어떤 대응을 할지가 주목되는 가운데, 그동안 한반도 운전자 역할을 수행해 온 문재인 대통령도 22일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미 간 신경전 조율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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