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무근으로 밝혀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DJ) 비자금 의혹을 2008년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에게 제보했다는 박주원 최고위원에 대해, 국민의당이 당원권 정지 및 최고위원직 사퇴라는 나름의 강수를 뒀다. 하지만 언론 보도로 불거진 불신과 의혹 해소는 차치하고라도, 당내 갈등 봉합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이번 사건은 바른정당과의 통합 문제를 놓고 벌이던 안철수 대표 측과 호남계의 갈등에 쐐기를 박은 형국이 됐다.
당사자인 박주원 최고위원은 이번 의혹에 대해 사실무근이며 억울하다는 입장이지만, DJ를 따르는 당내 호남계는 검찰 수사 등을 통해 의혹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고 날을 세우고 있다. 국민의당이 당 차원에서 긴급하게 징계 조치에 착수한 것은 호남계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인 동시에, 여론의 반향에 대한 선제 조치로 풀이된다. 하지만 바른정당과의 통합론을 이어가며 호남 방문을 앞두고 있던 안철수 대표는 스텝이 꼬이게 됐다.
국민의당, 박주원에 "긴급 징계"
국민의당은 8일 오후 국회에서 긴급 최고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를 열고 이번 사태 대응책을 논의한 결과, 박 최고위원의 당원권을 정지시키고 최고위원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긴급 징계 조치"를 취했다고 김경진 원내대변인이 전했다. 이날 조간신문 보도로 의혹이 불거진 지 한나절 만이다. (☞관련 기사 : 박지원 "'DJ비자금' 제보 의혹 충격"…안철수 대형 악재)
김 원내대변인은 "박 최고위원은 비상 징계 사유에 해당될 수 있기 때문에 (안철수) 당 대표가 일단 긴급 징계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며 "당헌당규상 적절한 절차를 밟아서 당원권 정지를 시키고, 그렇게 되면 최고위원직은 자동으로 정지되니 최고위원 사퇴 조치까지 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 대변인은 '호남계 일각에서는 국정조사 실시 주장도 있었다'는 질문에 "국정조사를 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면서도 "논의 과정에서 우리가 관련자들과 전화 통화를 해보니 보도 내용이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했다.
국민의당은 박 최고위원에 대한 '긴급 징계' 조치를 확정하기 위해 당무위를 소집할 예정이며, 이 과정에서 징계의 적절성 여부를 가리다 보면 자연히 사실관계가 파악될 것으로 보고 "별도의 진상조사위원회는 구성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김 대변인은 "(박 최고위원의 당원권은) 일단 '잠정 정지'이고, 당무위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 경우에 따라서는 출당 조치도 취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당 지도부 차원의 사과나 유감 표명 예정이 있을지에 대해 김 대변인은 "우리 당이 생기기도 전의 문제"라며 "당 지도부가 공개 유감 표명을 하는 게 적절할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있어서 잠시 보류한 상태"라고 했다.
박 최고위원은 여전히 "나는 제보한 사실이 없다. 양도성 예금증서(CD) 사본을 제공한 사실도 없다. 기사에 실린 행위를 한 적이 없다"며 당에 낸 소명서를 통해 "억울하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고 김 대변인은 전했다. 박 최고위원은 이날 오후 7시 본인의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밝혔으나, 당 지도부는 "당의 입장이 이렇게 정해졌으니 안 하는 게 좋겠다고 권고하고 있다. 안 했으면 한다"는 의견을 전했다고 김 대변인은 밝혔다.
당 회의에서 '이번 사건에 정치적 배경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나왔는지 한 기자가 묻자, 김 대변인은 "아주 오래된 사안이 갑자기 불거져 나오면 사실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중요한 것은 이게 사실이냐 아니냐이지 음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자체의 진위 여부이고, 동기나 배경에는 관심을 가질 생각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안철수 호남행 휘청…安 "재검토해 9일 아침에 결정"
회의에서는 박 최고위원에 대한 처리 문제와 함께, 주말(9~11일)로 예정된 안철수 대표의 호남 방문 일정을 예정대로 진행할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뤄졌다. 김 대변인은 "안 대표가 내일 아침까지 제반 상황을 살펴보고 재검토해서 결정하겠다고 했다"며 "(의원들은) 대체로 '가지 말아야 한다'는 기류가 더 많았지만, 대표는 '본인이 이런저런 정보와 상황을 종합해 보고 재검토해본 후 내일 아침까지 결정해 통보하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앞서 이날 오전 안 대표 측에서는 "이것 때문에 호남 방문에 차질이 있을 일은 아닌 것 같다"(이행자 대변인)는 입장을 밝혔지만, 박지원 전 대표 등 호남계에서는 고개를 젓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오후 YTN 방송 인터뷰에서 "현재 (호남 민심이) 굉장히 격앙된 상태에서 목포를 방문했을 때 불미한 사건이 난다면 제2의 '정원식 총리 밀가루 사건', '김영삼 대통령 광주 유세 사건'으로 번질 수 있다"며 "좀 진정이 되고 그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안 대표의 호남 방문, 특히 목포 방문을 연기해 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이미 송기석 비서실장한테 전달했고 오늘 공개적으로 의원들에게 발언했다"고 밝혔다.
박 전 대표는 특히 "하필이면 박주원 최고위원은 통합파이고 안 대표를 굉장히 추종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폭발될 수 있다고 예상한다"고 경고했다. 안 대표의 이번 호남행 자체가 바른정당과의 통합 문제를 놓고 호남 민심을 설득하기 위한 것인데, 이 와중에 통합파이자 친안(親안철수)계로 분류되는 박 최고위원이 호남의 정신적 지주 DJ를 음해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음을 지적한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이번 의혹 사건에 대해 "보도를 보고 (박 최고위원이)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궁색한 변명을 한 것을 봤다"며 "사실관계의 파악은 정당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검찰에서 DJ 사자명예(훼손), 이희호 여사 등 유족·측근들의 피해 등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조사를 해야 되고, 더욱이 검찰 식구(박 전 최고위원은 검찰 수사관 출신이다)가 당시 여당(한나라당) 의원에게 이러한 것을 제보했다고 하면 검찰의 명예를 위해서도 공소시효에 관계없이 조사해서 사실을 밝히는 것이 '적폐 청산'의 하나라고 요구한다"고 했다.
박 전 대표는 나아가 "이러한 적폐에 가담했던 사람이 우리 국민의당에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통렬한 반성과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여태까지 숨겨오다가 언론·사정당국에 의해 밝혀졌다고 하면 이것은 책임을 져야 되고 정리가 돼야 된다"고 박 전 최고위원을 넘어 안 대표까지 간접 겨냥했다.
DJ정부 청와대 법무비서관 출신인 박주선 국회부의장도 이날 본회의 전 의원총회에서 공개 발언을 신청해 "박 최고위원은 개인적으로 저하고 굉장히 가까운 사이지만, 보도가 사실이라면 우리 당 당원 입장에서 경악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제발 사실이 아니길 정말로 빌겠지만, 만일 사실이라면 당 입장에서 박 최고위원에 대해 법률적·정치적 책임을 단호히 물어야 하고 나아가 지도부 입장에서 대국민 사과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 부의장은 "'이유미 (제보 조작) 사건'으로 우리 당 근간이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지만 이것은 그것을 능가하는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우리 당은 DJ의 정신과 가치, 족적을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당"이라며 "한나라당과 야합해서 DJ의 업적을 폄하하고 부정부패 범죄인으로 낙인찍는 행위를 했다면, 그런 분이 최고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있었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당 정체성이 논란이 될 수 있고 백척간두에 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당에서 진상을 규명하는 동시에 검찰에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적극적·능동적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대중평화센터 "법적 대응 검토"…김홍걸 "국민의당 호남 의원, 입장 분명히 하라"
국민의당 밖에서도 박 최고위원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사단법인 김대중평화센터(이사장 이희호)는 이날 "박 최고위원은 진실을 밝히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어 "김대중평화센터는 박 최고위원에 대해 법적 검토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이번 사건에 대해 "매우 충격적"이라며 "이 이사장과 유족은 향후에도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작성자·유포자에 대해 엄중한 법적·사회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DJ의 3남인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은 SNS에 글을 올려 "제가 작년에 국민의당이 '김대중 정신을 계승한다'는 기치를 걸고 나왔을 때 '평소에 원균처럼 행동하면서 필요할 때만 이순신 장군을 본받겠다고 하면 누가 믿어주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역시 그들이 '원균의 집단'임이 확인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은 "그동안 친이·친박 출신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나, 유권자들을 현혹해 정치생명을 연장하려 했던 호남 의원들이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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