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이 가결되었지만 여전히 광장에서는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있다. 주말마다 수십만 명이 광장을 찾고 있다. 왜 이렇게 많은 시민은 촛불집회에 계속 나오는 것일까? <프레시안>에서는 '퇴진행동' 연속기고를 통해 교수, 시민·인권활동가, 노동운동가 등에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본다.
세월호 참사가 1000일에 이어진다. 우리는 열한 번의 집회를 통해 1000만개의 촛불로 그들을 기억하였다. 임옥희의 말처럼 애도를 "먼저 떠난 친구들을 기억함으로써 뒤에 남은 자들이 그들의 삶을 떠안는 사회적 책무를 다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촛불을 든 우리는 천 개의 나날을 보내고서야 겨우 이제 그들을 애도하여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이 세월동안 우리는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우리 한국 사회 또한 끝없이 침몰하고 있음을 목도하였다. 너무도 비리하고 너무도 무능한 정부와 아귀축생의 탐욕에 빠져 마치 갑질과 경영을 구분 못하는 재벌 2,3세 후계자들이 한 통 속으로 우리의 삶을 압박하며 옥죄어 왔다.
최근 터져 나온 '박근혜-최순실-이재용'의 국정농단사건은 그 한 증후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우리의 삶을 앞에 두고 무엇을 떠나보내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도 가려내지 못한 채 깊은 우울증을 앓아 왔던 것이다.
영화 <동주>에서 명희조 선생은 이렇게 가르친다.
"주권 없이 이상향을 노래해 봐야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나."
촛불은 이렇게 생각함의 힘으로 밝혀진다. 그들은 우리에게 "생각하지 말고 복종하라"고 명령하지만, 촛불을 든 우리는 "복종하라, 그러나 생각하라!"라는 칸트의 정언을 실천한다.
권력과 금력의 협박에 찰나적인 폭력으로 대항하기보다는, 그들의 규율에 복종하면서 동시에 그런 협박이 도대체 어떻게 하여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본원적으로 그리고 급진적으로 심문한다.
"이것이 나라인가"라는 냉철한 질문을 해대며, 저 무기력한 우울증 속에서 새로운 세상의 의미를 찾고자 한 것이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사유에 '세월호 7시간'이 들어간 것은 이 때문에 중대사건이 된다. 국회의 탄핵소추의결을 이끌어낸 것이 촛불의 힘이라면, 이런 저런 핑계로 주저하던 의원들을 압박하여 그 탄핵사유에 이 세월호 참사를 부가한 것 또한 우리의 힘이었다.
세월호의 문제는 국가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안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헌법 전문)한다는 국가의 존재목적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국가를 찾았을 때 정작 대통령은 그 자리에 없었고 부정한 탐욕과 무능한 타성에 절은 관료들만이 그를 대신하였을 뿐이었다. 의원들을 비롯한 정치권이 이를 기피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국가를 대표하며 국가를 위해 자신들이 군림하고 통치한다는 그 허위의식이 여기서 우리의 조롱거리로 전락하며, 그들의 권력과 그들의 협박이 허상이자 환각에 불과하다는 우리의 자기각성이 여기서 진실로 증명되는 것이다.
또는 우리가 스스로 정치의 주역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는,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급진적 사고가 여기서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네 번째의 탄핵사유인 '생명권보호의무 위반'은 세월호와 더불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애도하기 위한 제문(祭文)에 값하게 된다.
제도권 정치가 탄핵심판을 제쳐두고 대선과 개헌에 몰입함은 이런 맥락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탄핵은 헌법재판소에서 진행되는 절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국민들이 촛불로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내었을 때 그 명령은 두 가지를 향한다.
그 첫째는 헌법재판소에 대한 것으로 이미 국민이 신임을 거두어버린 대통령을 법적으로 마무리하여 소거하라는 것이며, 그 둘째는 국회에 대한 것으로 이런 대통령, 이런 정권이 존재할 수 있게 내버려둔 우리의 통치시스템 자체에 대한 진실규명과 반성의 작업을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럭저럭 이어지고 있는 전자에 반하여, 이미 국정조사조차 맥이 빠지고 있는 후자이다. 이미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을 탄핵하여 권한정지상태에 몰아넣었고, 여당인 새누리당조차 해체하여 분당과 내부적 갈등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소위 제왕적 대통령 운운하면서 국회의 운신조차도 힘들게 만들었던 우리 제도정치의 한계가 그 자체로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국회는 -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야당은 - 국정운영은 물론 이 촛불의 정치마저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과정은 비유적으로 의미 있다. 대통령 측 대리인들은 법적으로는 탄핵이 불가피함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란 지연작전이다. 되도록 지연시키면서 박사모와 같은 어용단체들이 촛불의 민심을 조금이라도 가릴 수 있게 되는 날만 기다린다.
극도로 보수적인 재판관들이 나름 꿈틀거릴 수 있는 여유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되는 요행수만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개헌을 앞세우며 대선에 올인 하는 제도권정치 역시 촛불의 민심으로부터 떠나고자 함에 있어서는 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천만 대중들의 요구를 그저 이용하고자 할 뿐, 그 요구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거나 혹은 무시한다. 촛불을 전후하여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에 집중하기보다는 어떠한 통치구조 어떠한 권력체계가 자신과 자기 집단에 유리한가만을 따져 개헌론으로 얽어낸다. 혹은 개헌론을 제기하는 것 그 자체로써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안간힘을 다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중이 사라진,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낸 87년 헌법의 '절차적 민주주의'처럼, 촛불의 함성을 내지르는 천만의 대중들을 또 다시 정치의 장으로부터 분리하고 배제하는 탈정치의 공간을 재생산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고민은 광장의 함성이 일상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다는 현실에 있다. 광장에서는 주권을 외치고 민주주의를 떨쳐 보지만, 막상 주말을 넘어 주중의 일상으로 되돌아오게 되면 여전히 우리는 '을'로 남아 그들의 압박과 협박에 시달려야 한다. 주말은 당당한 유권적 시민일 수 있었지만, 주중에는 여전히 우리는 이 갑갑한 세상을 우리의 맹목적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촛불의 함성이 정치가 저급한 통치술의 수준을 떠나 이런 삶의 질곡을 제대로 교정하라는 명령에 맞추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것은, 약탈국가의 한 축을 이루는 재벌과 대기업의 횡포를 혁파하고, 검찰이나 언론 등 기성권력의 갑질을 조장하였던 세력들을 개혁하며, 선거법과 정치관계법을 바로잡아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로써 국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과거청산·개조의 작업이 즉각적으로 그리고 실효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요구한다.
또한, 우리가 집을 필요로 하는데, 정부가 기껏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집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집 살 돈을 빌려줄 금융기관에 돈을 줄 뿐이라는 지젝의 한탄을 극복할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할 것을 명령한다.
선택권은 소수의 권력자들이 행사하는 반면, 나머지 우리들은 그 선택이 야기하는 위험만 부담하게 되는 이 잘못된 틀 자체를 깨어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탄핵은 대통령의 탄핵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된 시스템의 탄핵이자 우리 삶에 부과된 질곡의 탄핵으로까지 이어진다.
그것은 박근혜-이명박의 탄핵이자 사드와 한일위안부합의의 탄핵이며, 새누리당의 탄핵이자 이재용의 탄핵이고 또한 저 비열한 개,돼지론과 수많은 갑질에 대한 탄핵이다. 물론 개헌도 대선도 나름 중요한 이벤트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런 탄핵을 전제로 하여서만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광장에서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들이 광장에서처럼 여전히 주권적일 수 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개헌도 대선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천 일의 애도로써 세월호의 그들을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
애도는 "사회적 청자"(임옥희)를 필요로 한다. 억울한 죽음의 이야기를 함께 풀어냄으로써 오랜 애도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슬픔과 고통을 치유하며 그들을 떠나보내는 동력을 이룬다. 그러나 진정한 애도의 대상은 우리들 혹은 우리들의 기억에 등록된 우리들의 삶이다.
광장의 촛불과 함께 일상의 촛불을 켜 나갈 때, 주말에 내지른 함성이 주중의 직장과 지역에서도 같이 울려 퍼지도록 할 때 우리의 탄핵은 애도의 제의가 그러했듯이 이 세상의 억압과 질곡의 고통을 떠나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지젝의 말처럼 "이제는 다시 진지해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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