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지표는 많겠고 사람마다 지표에 관한 생각이 다르겠지만, 사회 구성원의 삶에서 흑백논리가 관철되는 항목이 많을수록 성숙도가 낮다는 게 개인적인 판단이다. 반대로 회색의 영역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또 회색이란 색깔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회색이 소멸하고 흑백(黑白)의 선택밖에 남지 않은 사회는 좌초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빨치산이냐 토벌군이냐의 두 가지 선택 중에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었던 한국 전쟁기 지리산 자락의 사회상이 그렇다.
2016년 가을에 진입하려는 이즈음의 한국 사회는 온갖 모순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듯 다양한 영역에서 대립과 갈등이 첨예하다. 그 많은 갈등의 전선 중에서 대립이 가장 심각하고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며 대치가 오래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게 '메갈리아 논쟁'이다. 정의당 사태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듯 메갈리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제 찬반, 또는 그 이상의 격한 감정을 표시하고 있으며 이 같은 '진영'의 획정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요는 당신이 "메갈리안인가, 아닌가?"에 답해야 하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조금 순화해서 "당신은 '메갈리아'를 지지하는가, 거부하는가?"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사실상 직업이라 해도 좋을 만큼 나는 일상적으로 대학생들과 교류하고 토론을 벌인다. 내가 만나는 대학생 집단의 다수는 여성이다. 그러다 보니 '강남역 10번 출구의 살인', '"Girls do not need a prince"란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성우 김자연 씨 사건', '<시사인> 절독' 등 메갈리아, '남녀'불평등, 페미니즘 등의 주제에 더 공감하여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러나 단지 당사자성 때문에 메갈리아를 중심으로 한 이 주제가 빈번하게 논의된 것은 아니다. 이 논의에는 당사자성을 넘어서는 사회 문제의 본질이 배태되어 있다.
미러링, 혐오 등 메갈리아와 관련하여 당장 정색하며 반론을 펴지 않는 대학생 남성(또는 일반인 남성의 절대 다수)이 있다면 그가 반복해서 내뱉은 볼멘소리는 '잠재적 가해자'·'선량한 다수'론이지 싶다. 이들은 "일단 지적이 일리 있고 너희(여성) 입장을 이해하지만 과도하게 해석한 측면이 있어"라고 말한다. 메갈리아의 지적과 달리 한국 남성의 다수가 (편의상 용어를 차용하면) '한남충'이 아닌데도 일부의 문제를 전체의 문제로 몰아가며, 비슷한 맥락에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한다는 반론이다. 메갈리안들이 사태를 (사자성어를 쓰면) 침소봉대하여 근거 없는 남성 혐오를 조장한다고 비난한다. 그런가?
성범죄에 있어 성별로 피해자를 구분하면 피해자의 거의 대다수가 여성이기에 흔히 말하는 '잠재적 피해자' 또한 여성일 수밖에 없다. 여성 혐오 혹은 여성 비하 또는 남녀 차별이 온존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누구나 피해를 입을 수 있기에 여성의 피해가 개별적 사건으로 현현한다고 하여도 거기에는 보편성이 작용한다. 과거(또는 지금도?) 인종 차별이 심한 미국 같은 곳에서 특정한 개인이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에 상관없이 단지 피부색 때문에 특정한 위험에 노출되었던 상황과 흡사하다. 성범죄로 피해를 입을 실체적 확률을 예외 없이 공유한다는 관점에서 모든 여성은 누구나 '잠재적 피해자'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응하는 남성은 누구나 '잠재적 가해자'일까?
아마도 남자들이 종종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는 용어가 '잠재적 가해자'일 텐데, 이 용어는 사태를 오도할 가능성이 높다. '잠재적 피해자'는 누구도 피해를 피해나갈 수 없고 다만 어떤 확률 아래 놓일 것이냐만이 달라진다는, 그래서 피해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반면 '잠재적 가해자'는 그 자체가 형용 모순으로, 어떤 남성이 '가해자'인지는 (인간 내면의 인식 체계와 무관하게 가해가 결과로서 도출될 것이기에) 대체로 사전에 특정된다고 보아야 하기에 가해의 보편성이 추정되지 않는다. '주체'의 입장에서 '잠재적 피해자'는 분명 존재하고 보편적이지만, '잠재적 가해자'는 성립을 확언할 수 없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이지만,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가 아닐진대 여성이 '잠재적 피해자'라는 주장 또한 과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까지 나올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문제의 핵심을 비켜간다. '잠재적 가해자'론은 여성의 '잠재적 피해자'론에 맞선 남성의 대항 논리로 만들어졌다. 여성이 누구나 잠재적 피해자 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주장을 있는 그대로 판단하지 않고 "그렇다면 남자가 모두 잠재적 가해자란 말이냐?"로 맞서며 나온 논법이다. '여성 : 잠재적 피해자' 대 '남성 : 잠재적 가해자' 쌍은 비논리적 조합이다. 두 개는 각각 해명되어야 할 별개 문제이다. 이 비논리적 조합은 여성이면 누구나 피해를 입을 수 있고 그 피해의 잠재성이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데는 우리 사회가 가부장적이고 여성 혐오(혹은 여성 비하)적인 이데올로기와 습속·관행을 발전시키고 고착시켰기 때문이라는 반성을 회피하려는 기망에 불과하다.
'선량한 다수'론은 '잠재적 가해자'와 비슷하지만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잠재적 가해자'론이 남녀 불평등과 나아가 여성 혐오의 사회 구조를 외면하고 분식하는 거시 논리라면 '선량한 다수'론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즉 개연성은 인정하지만 "확실히 나는 아니다" "나는 선량한 다수에 속한다"는 이른 바 "나빼쌍"(나 빼고 다 쌍년. 여기서 쌍년은 수정되어야겠다)의 미시 논리이다. 성범죄 같이 심각한 폭력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지만, 여성을 대상으로 일상적이고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남성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사소한) 즉자적인 폭력에 대한 반론(혹은 변명)이 '선량한 다수'론이다. 여학생이 경험하는 '불편한 시선'의 폭력성에 관해서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일부 여학생을 포함한 남학생들의 반론이, 선량한 다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거짓말이다. '선량한 다수'는 "나빼쌍" 논리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며 억지로 '선량'을 살리면 '선량한 극소수'만 존재한다고 할까. 사실 '다수' '소수' 같은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남성 문화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희화화하는 행태는 뿌리 깊은 것으로, 적극적으로 주도하느냐와 소극적으로 묵인하느냐의 차이밖에 없다. 과거(그냥 과거라고 하자) 흑인을 대한 백인들의 사회적 관행과 담론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흑인 노예에게 잘해주는 '선량'한 백인 주인도 흑인 노예를 노예라고 보지 대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남' 문제가 권력 문제이기 때문에, 즉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적 대상화의 권리를 부여받은 '천부의' 권력이기에 시선 등을 통한 일상적이고 '소소한' 폭력에 남성은 무심하고 관용적이다. 얼마 전 문제가 된 남자 대학생들의 '단톡방 성희롱'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성의 분노, 특히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분노는 그렇다면 정당한 것일뿐더러 오히려 너무 늦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의 분노는 이해하지만 그들의 방식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양식' 있고 '이성'적인 '남성적인' 견해를 살펴보자. 후자의 그들은 분명 메갈리안일 테고, 자연스럽게 전자의 그들이 전체 한국 여성이라면 그 분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남성에 대해서까지 구질구질하게 이 자리에서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메갈리아가 스스로 '미러링'의 사용을 인정하는지를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그런 것으로 가정하고, 메갈리안들이 나의 견해에 관심을 둘 리 없다고 하여도 우선 나는 메갈리아의 '미러링'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술자리에서 내 나이 또래 중년 남자들과 잠시 이 문제로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다. 취지를 인정하더라도 몇몇 사례를 들며 너무나 잘못된 방법을 택했다고 그들은 메갈리아를 비판했다. 물론 나도 메갈리아의 방식이 불편하다. 그러나 동시에 메갈리아의 방식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지는 대신 일본 천황에게 탄원서를 보냈다고 가정한다면 둘 다 의미 없는 행동은 아니겠지만 둘 중에서는 폭탄 투척이 더 적절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라고 말할 배포나 패기, 전투력 없이 이 미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미친 세상에서 '정상인' 행세야말로 미친 년이란 증거다. 세상이 미쳤을 때 '미친년'은 정상으로 간주된다. 메갈리아의 등장 전과 후를 비교하면 메갈리아의 정당성은 단박에 입증된다.
혐오는 혐오만으로 극복된다. "혐오의 확대 재생산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며, 혐오를 혐오하는 사람 혹은 집단·세력에게 자제를 촉구하는 이성은 사이비 이성이다. 혐오를 혐오하는 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 최초의 혐오가 잘못되었다. 혐오를 혐오하는 것에 대해 자제나 이성을 거론하는 논리는 억압과 지배의 논리다. 백번 양보한다손 쳐도 혐오에 대해 혐오를 자제하는 이성을 호출할 수 있는 상황은 자제하는 주체가 강자일 때만 타당하다. 혐오의 대상인 약자에게, 혐오 자체를 거두지 않은 상태에서 혐오에 대한 혐오를 자제할 것을 호소하는 건 윤봉길 의사에게 도시락 폭탄을 거두라고 종용하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요체는 혐오가 지배와 강자의 논리이고, 혐오에 대한 혐오를 혐오하는 것 또한 같다. 반면 피해 입고 억압 받은 약자에게는 언제나 혐오를 혐오하는 저항의 문법이 정당하게 성립한다.
메갈리아를 다룬 <시사인>을 절독한 이른 바 '진보 오빠'·'진보 아재'들은 68 혁명의 구호 중에서 "금지를 금지하라"란 구호를 한번 떠올려보면 어떨까. 금지가 금지되어야 한다면, 금지의 목적어는 첫 번째 금지가 되어야지 두 번째 금지, 즉 금지의 금지가 목적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당 정치나 의회 정치와 관련해서는 금지의 금지를 부르짖으면서 자신의 생활 정치의 영역에 대해서 금지의 금지를 금지하자고 덤비는 모습은 '이성적 꼴통 짓'이다. 진보의 다른 이름은 생활이다.
영화 <모노노케 히메(원령 공주)>(2003년)는 아름다운 영화이면서 동시에 현대 사회의 핵심 의제를 영화적 방식으로 의미 있게 다룬다. 이 영화에서 나는 극중 여자들에 주목하였다.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상. "남자들은 믿을 수 없어"란 대사를 통해 상징되는 극중 남녀 구도. 억압에 맞서 분연하고 결연하게 전투를 벌이는 여인들. 남녀 주인공의 결합이라는 흔한 해피엔딩 대신에 각자 자신의 길로 떠나며 상호 존중하는 마무리 등. 전적이지 않더라도 약간은 메갈리아와 겹쳐진다고 말한다면 어디선가 '모노노케 히메 척살단'이라도 결성될까. 아무려나 메갈리안이든 '모노노케 히메'든 현재 이 구역에 나타난 '미친 년'은 이 구역의 '미친 놈들' 때문이다. "Girls do not need a prince"이지만 '미친 놈들'은 불가불 '미친 년'을 필요로 한다. 안타깝게도 '년'이든 '놈'이든 미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영화와 달리 쉬이 오기 어려울 것 같다.
(안치용 교수는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햅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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