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에 이어 15일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서 "건국"을 언급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박 대통령의 건국 언급이 놀랍지 않다. 어떤 측면에서 건국절 논쟁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재삼 확인케 하는 계기이며, 기실 박 대통령 주장대로 대한민국은 1919년이 아닌 1948년에 건국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박 대통령의 '건국' 언급과 관련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얼빠진 주장"이라고 반박하는 등 '건국절' 반대파의 반발이 거세지만 '건국 70주년이 되는' 2년 뒤에 8.15가 건국절로 바뀐다 하여도, 작금의 상황을 보면 이상할 일이 아니다. 물론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건립됐으므로 그날을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를 왜곡하고 헌법을 부정하는 반역사적, 반헌법적 주장"이라는 문 전 대표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한민국이 "반역사적, 반헌법적"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고, 지배되고 있다는 "반역사적, 반헌법적" 현실에 입각하면 1948년 8월 15일은 당당히 건국절이 된다. 단 "반역사적, 반헌법적" 현실을 수용한다고 해도 건국절을 제정하기 전에 선결 과제가 있는데, 흔히 미군정기로 알려진 1945~1948년 미국 점령기의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과 함께 한반도 전역 혹은 한반도 남쪽에서 열린 정치 공간의 의미는 입장과 진영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특히 대한민국으로 이어진 남쪽에서는 지배 블록을 형성한 세력이 친미 성향이어서 이 시기 미국과 미군의 역할에 대해 가능한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게 사실이다. 해석의 문제는 최근 점차 승자의 역사가 되어가는 반전이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사란 특성상 사실(史實) 자체의 왜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배 블록 중심의 왜곡된 역사 해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해석과 별개로 해방 공간이 지속된 시기의 명칭은 새롭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이름이 곧 역사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름을 바로잡다 보면 '해방 공간'이란 표현 또한 수정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일제 패망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또는 '건국'까지 1945~48년의 3년을 미군정기로 기술하는데 이 '미군정기'란 표현은 잘못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전승국 혹은 전승한 연합국은 적국을 점령했다. 독일은 4개국에 분할 점령되었으며, 일본은 미국에 의해 점령되었고, 일본의 영토로 간주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점령지인 일본과 한반도 남쪽에서 전승국 미국은 군정을 실시하였는데, 이게 이른 바 미군정기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1945~52년 시기는 미국의 일본 점령기(U.S Occupation of Japan)로 불린다. 독일에서도 전후 시기에 '점령'이 명기된다.
동일한 관점에서 한국의 미군정기는 미국(군) 점령기로 수정되는 게 타당하다. 한반도 38도선 이남에 진주한 미 점령군 사령관이 점령지에서 군정청을 열어 실질적인 정부를 운영하였다면, 단지 군정으로 표기하여서는 안 된다. 일본과 독일에서처럼 미 점령군에게, 즉 미국에게 주권이 이전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미국군점령기 남한의 공용어는 영어였다. ('맥아더 포고령 1호'에 다음과 같이 명기되어 있다. "Article V. For all purposes during the military control, English will be the official language. In event of any ambiguity or diversity of interpretation or definition between any English and Korean or Japanese text, the English text shall prevail.")
한국 현대사에선 군정이 세 번 존재하는데, 알다시피 한 번이 미군, 나머지 두 번은 한국군에 의해서다. 물론 적국 점령지에서 펼치는 군사 정부를 군정이라고도 하기에 그냥 두루뭉술하게 미군정이라고 해 '점령'을 소거하고 지나갈 수는 있다. 그러나 외국군에 의한 주권적 점령은 군사 쿠데타에 의한 정권 장악과는 구별되어야 하며 따라서 통치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미국군에 의한 최초의 군정 시기에 대해서는 미국군 점령기로 표기하는 게 혼란을 줄일 수 있다고 본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정권을 장악하였지 대한민국을 점령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 단독 정부 수립일이라기보다는 대한민국 건국절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흔히 말하는 일제 치하, 즉 일본 점령기와 미국 점령기를 거쳐 실제로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전혀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건국절 주장이 관점에 따라 그다지 틀리지 않았을 수 있다. 실제로 임시정부의 법통은 미국 점령군에 의해 부인된다. 임시정부로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 항일 투쟁 등을 통해 나름의 민족적이고 주권적 정통성을 확보하였다는 기존 주장에 대해 미국 점령기 3년의 새롭고 낯선 주권적 상황은 임시정부의 연속성을 끊어놓으며 그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할 근거가 될 법도 하다.
1919년의 건국은 일본 점령기 '영토 밖에서' 주권적 안티-테제를 수립함으로써 근대 국가의 명시적 깃발로 정통성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정통성을 지닌 임시정부는 '영토 내에서' 미국 점령기에 결정적으로 부인당한다. 친일 세력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주도 세력으로 참여하며, 미국이 적극적으로 친일 세력을 친미 세력으로 재편하며 대한민국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1919년의 법통은 사실상 소멸되고 만다. 척결되어야 할 반민족 세력이 외세와 결탁해 대한민국을 내용상 '약탈'해 갔기에 그들에게 1948년 8월 15일은 건국절이 될 수밖에 없는 셈이다.
하지만 '건국절' 주창자들은 미국 점령에 따른 주권의 단절이란 설정을 수용할 수 없기에 이 같은 관점의 '건국절'을 배격할 것이다. 이영훈 서울대학교 교수가 언론에서 '건국절' 정당성의 근거로 국제 사회의 인정을 거론하며 1919년은 잉태고, 1948년 출산이란 식으로 에둘러간 게 그나마 모양 빠지지 않는 건국절 옹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국단체총협의회(애총협), 나라사랑기독인연합(나기연) 회원들이 15일 오후에 서울 청계광장에 모여 국민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들은 "성주군민들이 좌파 등 외부 세력으로부터 선동 당해 반대하고 있는데 빨리 사드를 설치해야 한다"고, 또 "사드 배치 반대는 한미 동맹을 와해시키고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방 이후 금과옥조로 숭상된 이들의 '친미-종북' 프레임은 자연스럽게 건국절 제정 주장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오늘은 해방 71주년이지만 동시에 건국 68주년 기념일"이라면서 "국가 차원에서 건국절을 지정하고 광복절과 함께 기념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해방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얻어진 것이지만 진정한 광복이 아니다"며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한 1948년 8월 15일, 건국일을 국경일로 제정해야 한다"로 강조했다.
이 교수에 비해 이 단체들의 주장은 직설적이다.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했다는 표현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화려한 수사 뒤에는 자유·민주와는 크게 상관없어 보이는 모리배적 탐욕이 엿보인다. 그들이 쟁취한 나라, 박 대통령이 자랑스러워하는 나라는 어쩐지 안중근 의사가 지키려고 한 그 나라와 다른 것 같다. 장담하건대 백범 김구가 꿈꾼 나라와도 다를 터이다.
각설하고, 어떠한 논리를 갖다 대든 '건국절'에는 안중근의 나라, 김구의 나라를 빼앗아가려는 책략이 담겨있다. '건국절'은 마침내 망국절이 될 수밖에 없다. 국민 국가 내에서 법통과 정통성은 정신과 이념에 관계된 것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 특히 민족적 주체성 관점에서는 임시정부 법통의 승인만이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비록 일본과 미국이라는, 또는 북한을 기준으로 일본과 소련이라는 두 차례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하더라도 공화국으로서 국민 국가의 깃발을 내건 임시정부의 수립을 건국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통일을 포함한 민족 자존의 보루이다. 이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안중근과 김구의 나라를 안중근과 김구의 대척점에 선 사람들의 나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이념 수준에서만이라도 대한민국을 그들의 나라로 내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글의 일부 내용은 필자의 책 <선거 파업>(영림카디널 펴냄, 2016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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